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
류시화 지음 / 푸른숲 / 2000년 6월
평점 :
절판


추천권유도 6

 

2천 년 말 우리 사회가 한창 류시화 앓이를 할 즈음 나도 본 작품을 읽은 적이 있는데

최근 나의 서가에 꽂혀서 방을 드나들던 자기를 다시 읽어 주기를 고대하면서 항시 나를

응시하고 있던 이 작품을 다시 한 번 접하게 되었다.

 

당시 작품을 읽고 나는 몇 가지의 주제를 갖고 독후감을 기록했었다.

첫째 삶은 늘 미지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할 뿐이지. 아무 것도 약속하지 않기 때문에 후회

        없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현실이 아무리 급박하게 돌아가더라도 간혹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삶의 방향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해 보고

둘째는 종교란 우리가 [여행자]라는 사실, 그리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 자각하게 하는 것으로 명상을 잃어버린 종교는 맹신에 빠짐을 명심하고

       명상은 종교를 통해 생겨난 것으로 명상 없이 종교를 접한다는 것은 근본을 잊어버리

       는 행위이니 항상 깨어 있어야 하며

셋째는 인간은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남의 기준에 맞도록 끝없이 요구받기 때문에 마음

       의 병에 시달리고 무언가를 찾기 위해 헤매고 있는 불쌍한 존재임을 항시 잊지

       것이며

넷째는 나비의 애벌레 우화의 순간을 재촉한다고 다른 것에 비해 빨리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비의 생명을 단축하는 해위인 것처럼 모든 것에는 때가 있음으로

       항시 참을성을 갖고 인내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라는 조급증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기억되며

마지막으로는 사랑에 대해 언급하면서 사랑에는 묘한 속성이 있고 그것은 마치 불사조가

자신을 불로 태워서 죽어 버리고 그 재에서 다시 소생하듯이 사랑은 죽음을 거칠수록 더욱

큰 사랑으로 연결되니 사랑의 시작은 물론 사랑의 죽음 또한 두려워 말라고 독후감을 정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모르겠다.

이런 글로써 나름 정리한 당시의 느낌과 지금 내가 작품을 읽고 느낀 점이 시간이 흐른

현 시점에도 동일하게 다가오고 있다면 좋겠는데, 오늘 작품을 읽으며 그 의미를 나름의

방식으로 재 해석해 보니 처음에도 느꼈을 터인데 당시는 그렇게 가슴에 와서 닿지 않는

내용이 지금은 거슬리고 있다.

아마도 내가 그런 삶을 살아보지 못해 생긴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저자의 젊은 날의 방황 방식에 관한 사항이다.

저자가 작품과도 같은 소산물을 만들어 낸 배경이 된 젊은 날의 방황이 나는 한 편으로

부럽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있는 자의 치기 어린 넋두리처럼 느껴졌다.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같은 시대를 살았던 내가 상상적으로만 생각했던 젊은 날의 그런 삶을

저자가 쉽게(?) 경험한 것에 대한 부러움 속에 그럼 나는 헛살았을까?’하는 생각이 선뜻

들어서 일 것이다.

하지만 작품에서 회개를 하지 않고 죽어가던 어떤 예술가가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사람은 두려움이 없다

라고 일갈하는 대목에서 내 삶에 대한 변명과 함께 조그마한 위로를 느껴본다.

그것은 아마도 저자는 개인적인 삶의 사유를 통한 자신감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나만의 방식과 나만의 적극적인 생활 자세로 삶을 열심히 그리고 그 분의 표현대로

불꽃'같이 살면서 자신감을 찾았기 때문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말이다.

그런 측면을 놓고 볼 때 저자의 주장인 진정한 삶이란 불꽃처럼 사는 삶이다라는 그 분의

주장에 완전 동의하는 바이다.

없었고 부족했기 때문에 더 열심히 살아야 했고, 공부를 잘 못했기에 공부 잘하는 나의

친구들이 쉽게 놓칠 수 있는 부분에서 최선을 다 했으며, 수중에 학습을 원만히 진행할

수 있는 금액이 부족했기에 나라에서 주는 장학금 완전 공짜 장학금이 아니라 조건부

장학금으로 나는 졸업 후 전부 상환하였다 - 에 기웃거렸으며 그도 저도 안 될 때에는

오로지 현실에 충실할 수 밖에 없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공부도 못하는 게 행실까지 개판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서였다.

결국 내가 살아 왔던 불꽃같은 삶이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나의 삶에 대한 끊임없는

가지치기와도 같은 생활의 연속이었던 것이며 나는 인내를 해 왔고 오늘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생활이 고리타분 할 수도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나 분명한 것은

누구에게 나의 과거와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 이야기했을 때 손가락질 받지 않고 있다는

것은 크게 잘 못 살아 온 나의 삶이라는 생각은 든다.

세월이 많이 흐른 어느날 오늘을, 작품을 읽는 순간을 뒤돌아 보았을 때 누군가 내게

삶이 당신에게 무엇을 주었고, 배우게 하였는가를 묻는다면 나는 생활 속에서 불꽃처럼

사는 자세를 가르쳐 주었고, 배웠다고 이야기할까 생각합니다.

그 불꽃은 내 속에서 아직도 활활 타 오르고 있으며 내가 목숨을 다 하는 그 날까지

점점 더 세차게 타오를 것이라는 이야기를 자신 있게 해 줄 것입니다.

       

 

읽고, 느끼고, 생각하며 나를 돌아보자

 

- 명상이란 결국 내가 사라져서 자연과 존재와 하나가 되는 일이라고 한다면, 기도 역시

   어떤 의미에선 마찬가지다. 그것은 내가 사라져서 신이 내 안에 들어오는 일이다.

 

- 고요하면 맑아지고, 맑아지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보인다. (성철 스님)

 

- 신은 내가 신을 바라보는 바로 그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

 

- 마지막 날을 맞은 것처럼 오늘을 맞이하자. (크리슈나무르타)

 

- 위대한 사람과 하찮은 사람은 없다. 다만 위대한 일과 하찮은 일이 있을 뿐. 위대한 사람

   은 하찮은 일까지도 위대한 일로 만든다. 그가 하는 모든 하찮은 행동, 모든 하찮은 몸짓

   에서 위대함이 흘러 나온다.(오쇼 라즈니쉬,[장자.도를 말하다]에서)

 

- 부처도 가장 큰 고통을 애별린(愛別隣)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은 

   그만큼 큰 고통이다.

 

- 누가 우리의 삶을 증언해 줄 것인가? 예술인가, 혁명인가? 아니다. 오직 사랑만이......

   그러나 사랑은 침묵이다. 우리는 모두 남 모르게 죽어간다. (알베를 까뮈)

 

- 운명의 펜은 절대로 철자법이 틀리지 않는다. (13세기 회교 신비가)

 

- 불교에서는 우주를 [욕계, 색계, 무색계]의 세 가지 차원으로 분류하고 있다.

   [욕계]란 우리의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를 말한다

   [색계]란 각자의 꿈에 나타나는 빛과 생각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말한다

   [무색계]란 모든 사람의 이념 속에 있는 절대 정신의 세계 곧 이데아의 세계

 

- 사람들은 스스로 나누어 놓고서는 그 분별심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단죄한다.

   스스로 괴로워하고 스스로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삶 역시도 두려울 수 밖에 없다.

   삶은 곧 죽음으로 가는 여행이기 때문이다.

      

- 우리를 삶에서 지쳐 쓰러지게 하는 것은 고독이나 가난이 아니라 남 모르게 간직한

   비밀이다.

 

-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사람은 두려움이 없다. 종교는 두려움을 심어 주는 것이 아니라

   삶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하는 것이며 나아가 소멸될 수 밖에 없는 육체의 두려움을

   떨쳐 버리게 하는 것이다.

 

- 영혼이 먼저 있고, 종교는 그 영혼의 비밀을 알기 위한 창문이다. 무엇보다 진정한

   종교란 이웃을 돌보는 것이다.

 

- 삶을 비관하는 사람이 지난 행복했던 시절을 잘 기억하지 못하듯 이제 비가 며칠째

   내린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뜨거웠던 태양을 기억하지 못한다.

   저 비의 구름 위로 올라가면 태양이 있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속에는 또 다른 

   세계가 있고 그 곳에는 다시 우리가 들어갈 또 다른 세계가 있음에도 우리는 곧잘 그 

   사실을 잊는다. 그리고는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리라 생각한다.

 

- 천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천국은 천국으로 향하는 바로 그것이다.

                                                                                          (갈매기의 꿈, 리차드 바크)

  

- 짐승들은 밖의 것에서 두려움을 느끼지만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것 때문에 두려워

   하는 것

 

- 삶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하나는 방황이고, 하나는 여행이다. 내면의 방황이 끝날

   때 삶의 진정한 여행이 시작된다.

 

* 본 독후감은 2014년에 작성된 것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