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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열두 방향 ㅣ 그리폰 북스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르귄의 헤인 시리즈(어둠의 왼손, 빼앗긴 자들)와 어스시의 마법사 시리즈를 너무나 재미있고 인상깊게 읽었던지라 이번 단편집도 많은 기대를 하고 읽었다. 단편들이어서 그런지 장편이 주는 서사적이고 오래도록 남는 깊은 여운보다는,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짤막한 우화가 주는 교훈적인 느낌, 그리고 마치 장편의 외전을 읽었을 때의 반가움이 감상의 주를 이뤘다.
'어둠의 왼손'과 '빼앗긴 자들'을 읽을 때는 서로 다른 두 자아(내지는 인류)가 만났을 때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화하는지에 대해 특히 주목하면서 봤고 거기에 많이 감동했는데, 이 단편집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왠지 인간의 나약함과 어리석음부터 희망과 구원에 대해서까지 여러가지 군상의 인간을 날카롭게 지적당하는 느낌이다. 아마 첫 시작인 '샘레이의 목걸이'에서부터 그런 느낌을 많이 받은 모양이다.
모든 단편이 인상적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인상적인 작품은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였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느낄 수 있기에 불행했던 오스번의 이야기는 내가 연민을 느낀다는 사실조차 미안하게 만들었다. 갑자기 시미즈 레이코 만화 단편선이 떠올랐던 이유는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에서 나온, 식물로 뒤덮인 파란 별이 시미즈의 단편인 'Magic'에 나온 그 별과 이유 없이 닮았다고 느꼈기 때문이겠지. 아름답지만 외로운 별.
단편집을 읽는 동안 내내 마치 SF 단편 만화처럼 영상이 눈 앞에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제목이 '바람의 열두 방향'인 이유는 무한히 많은 바람의 방향만큼이나 많은 인간상들을 말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