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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인의 귀향 ㅣ 에스프레소 노벨라 Espresso Novella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 / 북스피어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지난 주 금요일에 알라딘에서 책 주문해놓고 어제(수요일) 하루 종일 책 배송을 기다렸는데, 오후 5시에 드디어 택배아저씨가 도착했다. 이제 당분간은 정말 책 안 질러야지 하고 지른 한 무더기 책 중에서 어제 밤에 제일 먼저 읽은 건 그 이름만으로도 기대감을 가지게 하는 작가인 젤라즈니의 <집행인의 귀향>. 어제 밤엔 조금 피곤해서 제일 얇은 이 책을 얼른 읽어버리고 자려고 했는데, '에스프레소 노벨라'라는 시리즈 이름에 걸맞게, 얇기는 해도 에스프레소 마냥 상당히 밀도 있어서 읽는데 생각보다 꽤나 시간이 걸려버렸다.
시간이 좀 걸린 이유는 아무래도 이 소설이 나의 굳은 머리로 추리를 시켰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젤라즈니의 특징 중 하나인 신화의 응용은 포함되지 않은 한편, 탐정급 해결사가 나와서 사건 조사하고 다니는 내용은 이 책이 처음이다;. 이것은 <신들의 사회> 스타일과는 또다른 젤라즈니식 SF가 아닌가! 첫 장면부터 인상적이었고, 그 장면이 복선이 되어 책 중간 중간에 암시가 되고, 말미에 이르러 다시 한 번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분위기는 어딘지 모르게 <다이디타운>이 연상되지만 결말은 <프로스트와 베타>가 생각났다. 그러니까,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미스터리와 스릴러 형식이 아주 능숙하게 활용되고 있지만, 결국 뜯어보면 이래저래 자아에 대한 복잡한 생각들은 젤라즈니였다는.
이 책의 문제거리이신 '행맨'에 대한 설명은 '역시 젤라즈니'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로봇, 텔레팩터, 인공지능, 그리고 행맨이 어떻게 다른지, 행맨의 '뇌'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행맨의 사고 능력은 어떻게 발전했는지 등 이야기의 사실상 주인공인 행맨에 대한 상세한 밑그림은 이 중편의 커다란 매력 중 하나다. 이러니 내 머리가 열심히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 행맨이라는 놈이 사건을 도대체 왜, 어떻게 저지른거야!' 하면서. 책의 거의 마지막까지 숨도 못 쉬게 범인을 쫓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상상한 결말과는 완전히 정반대로 마무리되어서 책을 덮을 때는 살짝 맥이 빠지기도 했다. ('XXX는 나쁜 놈이었어야 하는데 왜 아닌거야!' 가끔 추리 소설을 볼 때마다 지르는 비명이 이번에도 나왔다는;)
책 뒷표지에 써있는대로, '자아발견과 죄의식'이라는 철학적 고민도 그냥 넘어가버리기엔 아까운 소재다. 어떻게 자신의 자아를 그런 식으로 확립했는지, 그리고 죄의식이 거기에 기여하는 바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행맨의 마지막 이야기는, 사과를 따먹은 인간은 죄의식을 가졌지만 여전히 인간의 창조물인 행맨보다 불안한 자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 같다. 그러니까 화자가 행맨을 부러워하는 것이겠지. 어찌 보면 작가는 행맨을 통해 하나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화자의 '센트럴 데이터 뱅크'에 대한 의견도 읽을 거리 중 하나. (그러나 화자가 '채소파와 땜장이파' 운운 하는 부분에서는 그만 웃고 말았다.:))
<집행인의 귀향>에 대해 두 가지 엄살을 부리자면, 하나는 책 두께에 비해 가격이 살짝 비싸다는 것. (앞자리가 6이었으면 좋겠음..;) 또 하나는 <내 이름은 레기온>이라는 중편집의 다른 작품을 무지하게 보고 싶어져버렸다는 것. 도대체 볼 수는 있게 될까? ㅠ.ㅠ 그래도 <그림자 잭>도 봤고, <집행인의 귀향>도 봤고, 이제 <드림마스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젤라즈니 팬으로써 참 행복한 2010년의 시작이 아닐 수 없다.
@ 읽으면서 내내 화자의 이름은 '레기온'일까 아닐까 은근 신경쓰였다.-_-; (결국 안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