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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황혼 ㅣ 대우고전총서 39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박찬국 옮김 / 아카넷 / 2015년 8월
평점 :
우상의 황혼
하나의 긍정, 하나의 부정, 하나의 직선. 하나의 목표.......
할 건 많은데 하기 싫은 것들만 있어서 책만 많이 읽는 시기다.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고 앞으로도 새로운 종류의 일들이 있을 테지만 어쩌겠습니까, 해내야 하는 것을. 이번엔 우상의 황혼을 읽었고 카뮈가 영향을 받았다는 니체의 삶에도 드디어 관심을 가져보았다. 바로 알아보자.
우상의 황혼은 공식적으로는 9장의 목차로 이루어져 있지만 (내가 임의로 설정한)4-1. 네 가지 커다란 오류90)까지 더하여 총 10~11장의 목차로 이루어져 있다. 다음은 목차이다.
0. 잠언과 화살
1. 소크라테스 문제
2. 철학에서의 ‘이성’
3. 어떻게 ‘참된 세계’가 마침내 우화가 되었는가?-오류의 역사
4. 자연에 반하는 것으로서의 도덕
4-1. 네 가지 커다란 오류90)
5. 인류를 ‘개선하는 자들’
6. 독일인들에게 부족한 것
7.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8. 내가 옛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는 것
9. 쇠망치는 말한다.
위 목차에서 나는 1장 소크라테스 문제와 3장 어떻게 ‘참된 세계’가 마침내 우화가 되었는가?-오류의 역사를 중점적으로 이야기해 볼 예정이다.
들어가기에 앞서 개인적으로 이 글은 상당히 불친절하고 오만하고 싹바가지 없는 글이라고 생각했다. 알베르 카뮈가 어떤 글을 읽고 감명 깊게 니체를 본 건지 감이 안 잡힐 정도로 아 이 사람을..? 할 정도로 이해가 안 갔는데 3장을 보고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3장에선 플라톤을 비판하고 1장에선 소크라테스를 비판한다. 먼저 1장부터 살펴보자.
니체는 아름다움을 표방하는 고대 그리스에서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아이콘으로 떠올랐던 것은 고대 그리스가 쇠퇴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보았다. 변증법을 즐겨 쓴 소크라테스를 비판하며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을 복수에 지나지 않은 방법이라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방법으로도 사람들을 매료시켰음에 주목하며 그가 아테네 사람들을 경쟁시킴으로서 그가 그 사회의 주인이자 "현저한 예"가 되었다고 말한다.
특히 소크라테스가 사용한 변증법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이를 “천민이 갖는 원한의 표현”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상당히 자신의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니체는 변증법에 대해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데 잘 살펴보면 변증법을 ‘천민’이 쓰는 것으로 보는 입장임을 확인할 수 있다. “변증법과 함께 천민이 올라서기 시작하는 것이다.” 또한 변증법과 유대인을 엮어서 서술하는데 역자는 이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변론 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변증가였다는 의미다.”라는 설명을 추가해주었다. 이는 변증법이 약자가 사용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니체는 소크라테스를 데카당으로 여겼다. “죽기를 원했다”는 이유로. 참 각박하다. 그렇다면 본인 스스로는 데카당이 아닌가? 뭐 알빠는 아니다만... 이미 쇠퇴하고 있던 고대 그리스를 더욱 쇠퇴하게 만든 소크라테스가 원하던 것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니체는 못마땅했던 것일까? 그럼 난 무슨 쌉엠지데카당가당스일 듯.
소크라테스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자들 역시 데카당이라고 비난한다. 이는 7장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에 나오는데 35-“데카당스 도덕에 대한 비판.” 이라 서술하면서 “‘이타주의적’도덕”은 아무 쓸모도 없으며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 것은 결국 자신의 삶이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으면 이는 곧 자신의 삶이 무의미 하다는 것을 의미하다는 것을 뜻한다고 난리친다. “가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삶은 무가치하다. .... 그러한 판단은 결국 엄청난 위험이 되며 전염성을 갖고 있다. .... 경우에 따라서는 멀리 수천년 후의 삶에까지도 해독을 끼친다.”
기실 니체는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원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데카당이라고 비난한 것은 아니었다. 쇠퇴하는 고대 그리스에서 피어난 소크라테스의 씨앗이 현재 니체 시대까지도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기에 이를 혐오하는 것이다.
3장 어떻게 ‘참된 세계’가 마침내 우화가 되었는가?-오류의 역사에선 플라톤의 이데아를 비판하며 자신의 세계를 정립한다. 여기서 카뮈의 세계관도 살짝 엿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참된 세계라고 하나 도달 불가능하다면, 즉 기약할 수 없다면 과연 그것이 의미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거짓이라고 규정하고 이데아를 실제라고 규정하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거짓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옳은가? 그냥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계, 발 딛고 있는 이 세계를 진정으로 인식하자.에서 끝나지 않고! 더 나아가서, 6번, “우리는 참된 세계를 제거해버렸다. 이제 무슨 세계가 남아 있는가? 현상의 세계일까? ... 아니다! 참된 세계와 더불어 우리는 소위 현상의 세계도 없애버렸다!”
책에선 6번 문장 뒤에 괄호 치고 ‘정오, 가장 짧게 그늘이 지는 순간, 가장 긴 오류의 끝, 인류의 정점. 차라투스트라의 등장’이라는 글이 나온다. 그러니까 참된 세계가 사라지고 난 뒤 현실의 세계도 의미가 없어진 이 순간, 바로 이 정오의 순간에 차라투스트라가 등장한다는 건데.. 차라투스트라는 뭐지? 찾아보니까 또 뭔갈 읽어야 한다는 거 같은데 내가 과연 읽을 수 있을까... 아무튼...
이와 유사하게 카뮈의 작품 속 ‘정오’ 혹은 ‘정오의 시간’은 “이성은 사라지고 오직 감각만이 세계와 교통하게 되며 이 감각을 통해 시시각각으로 엄습해오는 의식의 투명함을 고정시키며 그것이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게” 하는 “새로운 정신적 세계”의 존재 가능성을 보여준다. 여기서 내가 차라투스트라를 알아야 뭔가 해결이 되겠지?
아 그리고 한 가지 생각난 건데 이방인과 관련해서 수업을 하나 들은 적 있었는데 당시 수업을 가르치셨던 교수님이 “정오의 이 시간”에 대해서 설명하시면서 ‘정오’가 땅과 하늘이 가장 수직이 되며 그림자가 가장 짧아지는 시간이 되어 어쩌고 저쩌고 블라블라 설명하셔서 솔직히 아니 왜 이렇게까지 소설을 재미없게 만드는 거지?? 했는데.. 흠 다 이유가 있으셨군요 교수님.. 미안합니다. 그치만 그땐 정말 그게 싫었어요.
그렇다면 니체와 카뮈의 차이는 무엇일까. 고착 니체의 저작 한 권을 읽고 이야기 하는 건 좀 웃기긴 하지만... 정확히는 니체와 카뮈의 ‘정오의 시간’의 차이는 어디서 나오기에 내가 카뮈에 더 이끌리는 것일까.
일단 카뮈는 “인간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자유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이 한계가 반항이 가지는 힘이라고 주장한다. 즉, 반항하는 인간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파괴할 권리를 요구하지 않는다.” 카뮈에게 정오는 부조리한 현실을 ‘명료하게’ 직시할 수 있는 시간이다. 정오는 그림자가 매우 짧게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이며 인간들의 연대와 투쟁을 위하여 새로운 시대를 창조하는 시간인 것이다. 특히 ‘반항’의 개념이 니체와 구분되는데, 니체에겐 명랑함이 있다면 카뮈는 명랑하진 않으나 전적인 자유 대신 한계를 수용하는 반항이라는 점이 킥이라면 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니체.. 아직 너무 어렵다. 카뮈도 사실 아팠을 때 시지프 신화를 읽을 수 있게 되어서 좋아할 수 있는 계기로 삼게 된 거지 니체는 아직인 것 같고.. 아마 영원히 안 읽지 않을까 싶다. 바쁘고.. 흠.. 니체? 일단 수염이 맘에 안 듦. 원색적인 비난 미안합니다. 그치만 너도 소크라테스 외모 지적부터 했잖아.
밑에는 니체가 이 책 어딘가에 적어놓은 글이다. 재미있고 공감가는 내용이지만 여전히 의문은 들어서..
“인간 각자에게 그의 특성을 부여하는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신도 사회도 부모도 조상도 각 개인 자신도 그의 특성을 부여하지 못한다. 하나의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 그가 이러저러한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 그가 바로 이러한 상황과 이러한 환경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다. 각 개인의 숙명적인 본성은 이미 존재했었고 또 앞으로 존재할 모든 것의 숙명에서 분리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의도나 어떤 의지 혹은 어떤 목적의 결과가 아니다. 그는 ‘인간의 이상’ 또는 ‘행복의 이상’ 또는 ‘도덕성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 자신의 존재를 어떤 목적에 맞추려 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다. ‘목적’이라는 개념을 고안해낸 것은 우리 자신이다....”
이게 어디있었냐면.. 잘 기억이 안 나네요. 쩝. 요즘 12시에 자고 6시에 일어나는 삶을 살아서 그런지 벌써 3시라서 너무 졸리고... 미안미안댄스
아무튼 니체는 그럼.. 이 책만 읽어서 완벽하게는 모르겠지만 명량함을 간직한 채 인생을 긍정하며 살라는 건데... 너무 생각이랑 발언하는 거랑 좀 차이가 크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음. 왤케 치와와같지?
이 책의 주요 키워드를 뽑자면 뭐 비도덕주의자, 우상, 데카당 등등을 뽑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렵네요. 졸리고.. 언젠가 이 글을 고치거나 또 비공개를 하는 날이 매우 빠른 시일 내에 오겠지만 9900원을 내고 2번 읽은 내가 아까워서 뭐라도 일단 남겨 봅니다.
아무튼.. 앞으로 저에게 남은 토익토플텝스사조사 시험을 이겨내고 기말고사를 이겨내면 뭐.. 쉬지는 못하겠지만 11월이 지나면 뭔가 재밌는 책을 읽을 수 있겠죠?
하여간에 저는 최근 20일간 5키로가 빠졌는데.. 뭐.. 기왕 빠지는 거 더 빠졌으면 좋겠네요 이상 니체 내용 너무 졸려서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