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이라는 감각 꿈꾸는돌 46
김서나경 지음 / 돌베개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서나경의 우정이라는 감각은 청소년 소설의 뻔한 화해 공식을 거부하고, 인물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감각에 집중한다. 이 책을 읽는 것은 타인이라는 미지의 행성을 탐사하며 내 마음의 가장 연약한 지점에 닿는 경로를 발견하는 일과 같다. 작가는 무작정 껴안기보다 보이지 않는 주파수를 맞추듯 상대의 신호를 세밀하게 수신하려 애쓰는 인물들을 그려낸다.

껄끄러운 관계마저 어느덧 친구가 되고 나를 비추는 거울이자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통로가 된다. 결핍을 가진 ‘1’이라는 존재들이 서로의 차이를 뭉개지 않고 있는 그대로 감각할 때, 우정은 세상을 향한 다정한 저항이자 구원이 된다. 일상적인 문장 속 깊은 통찰은 관계에 지친 우리에게 서툰 감각이야말로 연결의 시작점임을 일깨우며, 잊고 지낸 주변의 표정과 목소리를 다시금 돌아보게 만든다.

 

 

오브제로 읽는 관계의 사회학: 신발과 먹거리

 

김서나경의 소설집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오브제는 신발(운동화)’이다. 자꾸만 보이는 아이에서 온누리의 주변을 맴도는 시선, 궤도를 벗어나면에서 영음이 신어야만 하는 산 같은 신발, 담력 테스트에서 뒤축이 무너진 진이 형의 더러운 운동화와 형 옆에 놓인 찬희의 신발.

신발은 인물이 서 있는 지면, 즉 그들의 사회적 위치와 심리적 상태를 상징한다. 정연에게 운동화가 더 빨리 달리기 위한 마법이었다면, 사고 후 영음에게는 주저앉아야만 신을 수 있는 고통이다. 작가는 신발을 신고 벗고, 혹은 누군가의 곁에 나란히 놓는 행위를 통해 관계의 거리를 조절한다.

 

또한 먹거리는 인물들이 마음을 여는 최소한의 매개체로 등장한다. 위시내가 푸른빛에게 건네는 딸기우유와 소보로빵, 구은해가 아람에게 내밀던 껍질째 먹는 빨간 사과. 이것들은 세련된 선물이 아니다. 투박하고 일상적인 것들이다. 하지만 이 사소한 먹거리를 함께나누거나 거절하는 과정을 통해 인물들은 서로의 영역에 진입한다. 특히 사과에서 사과는 사죄(謝罪)와 과실(果實)의 중의적 의미를 담아, 관계의 타이밍과 성의에 대해 깊은 사유를 끌어낸다.

 

 

결핍의 연대: ‘1’들이 모여 만드는 기적의 숫자

이 소설집의 인물들은 대부분 사회적·가정적 결핍을 안고 있다. 조손 가정, 부모의 이혼과 방임, 가부장적 폭력, 사고로 인한 장애 등 이들은 저마다 고립된 섬, 숫자 ‘1’로 존재한다. 추천사에서 김태호 작가가 언급했듯,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버티다 무너진다. 그러나 이 소설들이 희망적인 이유는 1 옆에 또 다른 1이 다가와 앉기 때문이다.

작가는 1+12가 되는 단순한 결합을 말하지 않는다. 혼자였던 세계가 문을 열고 타인을 받아들일 때 발생하는 전폭적인 확장을 말한다. 이는 강수환 평론가의 표현처럼 차이를 뭉개버리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끌어안으며 확장하는 세계. 작중 청소년들은 서로가 닮아서 친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어두운 바닥을 목격했기 때문에 연대한다. 내가 나여도 괜찮다는 안도감은 나만큼이나 엉망진창인 타인이 내 곁에 있어 줄 때 비로소 완성된다.

 

 

우정이라는 감각, 그 투명한 저항

김서나경의 글쓰기는 차분하지만, 서늘한 칼날을 품고 있다. 그녀는 청소년들을 어른들의 시선으로 재단하거나 보호받아야 할 약자로만 가두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스스로 관계 지도를 그려 나가는 능동적인 주체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작가가 보여 주는 우정에는 달콤한 위로만이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차이를 지워버리려는 세계의 폭력에 맞서는 새로운 저항의 방식이다.

우리는 모두 한때는 ‘1’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1’일지 모른다. 이 책은 그런 우리에게 말한다. 비록 삶의 궤도가 뒤틀리고 십자가 같은 상처가 손등에 새겨졌을지라도, 누군가의 반짝임을 목격하는 감각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핸드폰을 끄고 먼지가 햇살 아래 반짝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게 만드는 소설. 우정이라는 감각은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 나 자신을 가장 다정하게 마주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거울이다. 우리는 우정을 통해 타인뿐만 아니라, 비로소 자기 자신에게도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차분하게 증명해 낸다.

삶이 무미건조해질 때마다, 혹은 사람에게 환멸을 느낄 때마다, 우리는 이 책 속 인물들이 건넨 사과 한 알과 운동화 끈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곳엔 여전히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가장 인간다운 감각이 살아 숨 쉬고 있을 테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