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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철학 ㅣ 들뢰즈의 창 1
질 들뢰즈 지음, 이경신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평점 :
1.
들뢰즈의 저작인 [니체와 철학]은 포스트모던 혹은 후기구조주의를 열어젖힌 시조라 할 수 있는 니체를 새롭게 살려내고, 니체와 더불어 각자가 서로를 넘어서는 영역에서 ‘니체의 들뢰즈 되기’와 ‘들뢰즈의 니체되기’가 만들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들뢰즈가 서술한 여타의 저작과 마찬가지로 이 텍스트 역시 어느 부분이 니체의 주장이고 어디까지가 들뢰즈의 주장인가를 구분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거니와, 들뢰즈가 항상 주장하듯이 그다지 의미있는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역자가 역자후기에서처럼, 이 텍스트는 들뢰즈-니체의 저작이며 이 둘 ‘사이’의 ‘되기’의 생성물이다.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는 이미 당대에서 역사적으로 진행되어온 다양한 철학적 담론의 허구성과 그 철학들이 가진 권위를 전복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이러한 그의 사유는 후기구조주의가 기존의 담론체계를 해체해가는 방법론적 기원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해체론의 중심에 있었던 데리다의 경우에서처럼, 니체의 원용은 기존의 모든 것을 해체하는 것에서는 효과적이었으나, 그 해체의 작업이 진행될수록 자신의 존립근거조차 해체해야 하는 난점에 봉착함으로써 모든 것을 붕괴시키는 파국으로 치닫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비해 들뢰즈는 기존의 수많은 철학자들이 만난 니체와 달리, 해체를 넘어 새로운 생성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2.
[니체의 철학]은 가장 먼저 니체의 계보학을 통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차이를 복권시킨다. 들뢰즈-니체에 따르면 자명하게 존재하는 가치나 보편적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가치는 구체적인 행위자, ‘누구’의 가치이다. 그리고 그러한 ‘누구의 가치’에 대한 평가가 바로 ‘우아함과 저속함, 우아함과 비루함, 우아함과 몰락’의 ‘가치평가’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우리가 자명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그 기원에 있어서 구체적인 대상들이 만들어낸 차이에서 기원하는 것일 뿐, 그 가치가 본래적으로 담지하고 있는 ‘가치’는 없다. 오히려 당연한 것 또는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가치들은 구체적인 대상들의 차이에 의해서 산출된 ‘평가’일 뿐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이고 정의로움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혹은 누가) 아름답고 무엇이(혹은 누가) 정의로운지를 묻는 것은 원초적 본질의 입장 그리고 변증법에 대립하는 소피스트적 기술의 전부를 함축하는 완성된 방법이다.(145쪽.)
이와 같은 들뢰즈-니체의 질문 방식은 ‘가치 그 자체의 본질’ 혹은 어떤 가치의 본질이란 무엇인가를 추구했던 플라톤의 이데아적인 접근방식과 정확히 반대되는 것이다. 가령 플라톤은 ‘선의 이데아’, ‘선 자체’가 무엇인가를 탐구해 갔다면, 들뢰즈-니체의 방식은 ‘누구의 선인가?’를 집요하게 찾아들어간다. 따라서 이와 같은 질문의 방식은 초월적인 ‘보편 개념’에 대한 비판이자 구체적인 삶과 실재적인 실존의 방식에 대한 가치평가이며, 다양한 차이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가치의 가치’의 창조가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가치 자체를 평가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가치목록을 만들었던 칸트의 ‘사심없음’과, 객관적 사실에 기초해 가치를 평가했던 공리주의자들은 모두 현실의 비판을 포기하고 타협했거나 현실의 불합리를 보증한 인간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철저하게 현실이라는 내재성에 근거한 들뢰즈-니체의 사유방식은 어떤 의미에서 오히려 유물론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들뢰즈-니체의 방식에 의하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을 평가할 수 있는 절대적인 외재적 준거들은 붕괴하며, 오직 중요하게 남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
니체의 개념인 ‘권력의지’는 통상적인 의미의 권력을 갈구하거나 바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 권력의지는 존재 자체의 본성이며, 존재하려는 힘을 전개하려는 욕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리학에서 영감을 받은 개념인 권력의지는 차이나는 힘들을 서로 융합시키면서 힘들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변이 혹은 생성을 이끌어 나가려는 의지로 이해할 수 있다. 권력의지는 어떠한 주체에 귀속되는 의지가 아니라(주체를 둘러싼 수많은 문제점을 생각해 보라.), 비주체적이고 전인격적인 역동적인 의지이다. 그러므로 힘과 결부된 권력의지의 작동은 어떠한 외재적 준거나 목적도 상정되지 않는 순수 내재적 개념이라 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여기에서 산출된 생성은 그 어떠한 외부적 잣대로부터도 자유롭다.(화산의 폭발은 나쁜가? 아니면 비도덕적인가?) 아울러 권력의지는 하나의 주어진 실체도 아니며, 항상 변화하고 생성하는 과정에서만 존재하는 것일 뿐, 이 변이의 흐름과 생성의 과정 너머에 존재하는 실재는 아니다.
권력의지는 미분적인 동시에 발생적인 힘의 계보학적 요소이다. 그것은 관계 속에 놓여 있는 힘들의 양적 차이와 동시에 그 관계 속에서 각각의 힘에 귀결되는 성질이 유래하는 요소이다.(103쪽.)
권력의지로 드러나는 힘들의 결합에는 항상 우월한 힘과 열등한 힘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힘들의 결합 혹은 힘들의 관계가 만들어 내는 것이 신체이다. 여기서 들뢰즈-니체는 신체를 이루는 두 힘 중, 열등한 힘을 반응적 힘(부정)으로 그리고 우월한 힘을 적극적(능동적, 긍정) 힘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힘들의 관계는 신체를 구성하는데, 그 신체는 적극적 힘들, 긍정의 힘이 지닌 권력의지만으로 드러나며, 반응적 힘들, 부정은 적극적 힘에 굴복함으로써 스스로의 역능을 상실한다(오직 긍정만이 신체를 구성한다).
따라서 신체는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는 무한한 역능 자체이면서도 지금까지 계속하여 의식보다 열등한 것으로 파악되어왔다. 이에 비해 그(들)는 의식보다 신체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의식은 항상 자신의 외부와 관련된 의식이며, 외부의 권력에 의한 타협물이며 동시에 반응적 힘들의 의식이다. 오히려 우리는 외재성에 기원하는 의식이 아니라 철저하게 내재적인 힘들의 관계에 기인하는 신체에, 그리고 이 신체를 이루는 지배적인 힘인 적극적인 힘에 주목해야 한다.
들뢰즈-니체는 의식을 강조해온 지금까지의 사유를 부정한다. 의식=반응적 힘들은 그들 스스로를 부정하고 항상 지배적 힘과 타협하면서, 원한과 복수를 불태운다. 그리고 이러한 타협과 복수에 찬 원한은 새로운 생산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작동 방식을 보존하면서 어떠한 변화도 허용하지 않는 무의 의지를 생산한다. 이러한 원한이 내면으로 향한 것이 바로 가책인데, 원한에서 비롯된 가책, 책임성, 죄의식 등의 강조로 점철된 역사가 기독교의 역사이며, 노예의 의식에 손을 들어주는 변증법의 역사이다. 특히 이(들)은 변증법의 원리가 원한에 가득 찬 반응적 힘들의 집합이 적극적 힘들을 질식시키는 서사를 기획함으로써 새로움, 생성,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봉쇄하며, 모든 존재들을 원한의 구렁으로 함몰시켜 간 원흉이라고 비판한다.
4.
니체는 이러한 권력의지의 작동방식이자 긍정적 힘들의 존재 원리로 영원회귀를 설명한다. 이때 영원회귀는 불교적인 윤회나 동일한 것으로의 반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원회귀는 끊임없이 도래하는 순간, 즉 영원히 지속되는 카이로스적 시간 속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권력의지의 작동이자, 긍정의 작동 원리라 할 수 있다. 현재는 지나감과 도래함이 공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 자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하나의 축이자 요소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영원한 현재 속에서 권력의지는 부정에 의해 지속되는 진리, 존재, 동일자 등의 어떤 초월적 요소와도 무관하게 항상 긍정만을 선택하며, 이러한 긍정의 연속된 선택이 바로 영원회귀의 원리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영원회귀 속에서 동일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회귀 속의 동일성은 되돌아오는 것의 속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차이나는 것을 위해 되돌아오는 상태이다. 그래서 영원회귀는 하나의 종합으로, 즉 시간과 그것의 차원들의 종합, 다른 것과 그것의 재생산과의 종합, 생성과 자신을 생성으로 긍정하는 존재의 종합, 이중적 긍정의 종합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101쪽.)
영원회귀는 오직 차이만을 생성하며, 영원회귀 속에서 모든 차이는 유쾌한 생성, 생성의 존재(영원한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만 남는다. 그리고 영원회귀는 모든 부정의 정신을 일소해버린다. 지속되는 현재의 이행 속에서 부정은 새로움을 만들어 낼 수 없으며, 따라서 부정 자체는 스스로 소멸하거나 ‘부정의 부정’을 통한 긍정으로의 전환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니체가 ‘생성에는 죄가 없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마찬가지로 들뢰즈-니체가 말하는 ‘이중긍정’이란, 오직 긍정만이 존재이며 이 긍정에 대한 긍정만이 끊임없이 생성하는 이행의 존재를 구성한다는 의미이다. 이에 반해 부정은 허무주의적인 ‘무의의지’만을 가지며 따라서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한다.
권력의지와 영원회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면 최소한의 이해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진리, 당위, 도덕으로, 양심, 죄의식, 가책으로 표상되는 수많은 초월적 개념이 지닌 음험함을 벗어나 사유할 수 있는가? 매 순간 순간 머리가 아니라 신체의, 사유 이전의 신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가? 이와 관련해서 끊임없이 ‘현재’로만 제시되는 삶에서 항상 최선의, 오직 긍정의 삶만을 살 수 있다면, 우리는 다음 생에서 이와 다른 삶을 선택할 것인가?
5.
포스트주의의 다양한 사유들이, 그리고 세계화라는 일련의 흐름들이 우리를 훑고 지나간 오늘날 모든 단단한 것은 먼지처럼 날아가 버린듯하다. 또 표면적으로 모든 차이들이 허용되고, 모든 다양한 것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유토피아가 도래한 듯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더욱 더 다채로워지고 더욱 더 풍요로움을 구가하는 자유의 평화시대를 맞이했고, 그 속에서 행복해지고 있는 것일까?
오히려 현실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와, 그에 따라 굶을 수 있는 자유, 발언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허용한 것이 아닐까? 노동자들은 직장을 잃을 수 있는 자유와, 기업은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자유와, 지식은 자신의 지적 생산물이 현실과 그 어떠한 연대를 맺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누리는 것은 아닐까. 그 자유를 만끽하면서, 그 자유를 열망하면서 우리 스스로 부정으로 가득 찬 이 세계의 구조를 더욱 강력하게 재생산하는 것은 아닐까. 유명했던 비틀즈의 맴버였던 존 레논은 이미 오래 전에 혀를 빼물고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상상해 봐요. 천국이 없다고 생각해 봐요.
하려고만 하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거에요.
발 밑에는 지옥이 없고 머리 위에는 하늘만 펼쳐져 있다고.
상상해 봐요 모든 사람들이 오늘 밤을 위해 살아간다고.
국가가 없다고 상상해 봐요. 그다지 어렵진 않을 거에요.
신념을 위해 죽이지도 않고 죽일 일도 없고, 또 종교마저 없다고 상상해 봐요.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간다고 상상해 봐요.
나를 몽상가라고 하겠지요.
하지만 나만 이런 꿈을 꾸는게 아니랍니다.
(……)
하지만 어쩌면 이것은 상상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며 삶의 문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