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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 박열
손승휘 지음 / 책이있는마을 / 2017년 6월
평점 :

서평 --------
아나키스트 박열 / 손승휘 지음 / 책이있는마을 펴냄
2017년 6월은 박열을 만난 해이다. 철저하게 오만하였으되 자신의 잇속이 아닌 동료를 위해, 무차별적인 차별과 억압에 떠는 조선인을 향한 이채로운 눈빛으로 오만했던 '박열' 그리고 '가네코 후미코'. 손승휘 장편소설 [아나키스트 박열]은 사실을 놓고 인물 중심에서 풀어가는 소설이다. 역사적인 사건에서 일본을 향해 당당히 숨김없이 행보를 단행했던 두 인간의, 투지의 동료를 각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소설이다.
'사실'이란 얼마든지 왜곡되고 부풀려질 수 있는 것이기에 삶과 투쟁의 '진실'을 향해 -그들의 삶을 직접 본 것이 아니고 그들의 삶에 관여하지 않았으므로- 소설이란 형식을 빌려서 이렇듯 두 인간의 본 모습을 마주하는 것이 심히 감동스럽다. 이 소설을 접하기 전에 먼저 앞서서 '박열'의 법정 진술과 주변인들의 증언이 담긴 책을 보았기에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치열한 삶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두 권을 함께 본다면 더욱 두 인물의 됨됨이와 그들의 사상을(사회주의를 떠나 오로지 인간만을 향한)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총 3장으로 나뉘는데 1장은 '가네코 후미코'의 시선에서 박열과의 만남과 동지로서의 삶을, 2장은 조선인 학살이 빈번했던 시나노가와에서 홀로 밝혀내고자 했던 '박열'의 의지부터 그들의 투쟁이 이어지고, 3장은 일본에 의해 붙잡힌 그들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변호사 '후세 다쓰지'의 입장에서 본다.
'우리처럼 우리에 대해서 알 수는 없지'(p17 본문 발췌), 화자인 '나'가 누구인지 알기도 전에 강렬하게 마음에 새겨진 한 줄, '우리처럼 우리에 대해 알 수는 없지'.
첫 페이지부터 두 세장 넘기며 화자인 '나'를 향해 독자인 '나'는 미소 지었다. 불온 청년 박열이 쓴 '개새끼'에 흠뻑 빠져든 '나'가 가네코 후미코임을 나는 간파했다. 그런 그녀가 박열을 만나기 위해 직접 찾아가고, 그와 남녀의 정 그 이상의 것을 나눌 수 있는 동지가 된다는 것은 그녀에게 뿌듯함과 먹먹함이 함께 존재했을 것이다.
그의 오만함을,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투철(透徹)하는 그의 정신을 가네코는 존경했다. 어릴 때 조선에서의 학대에 못 이겨 제발 떠 주길 바랐던 달을, 그러나 끝내 감추어진 채 그녀를 비추지 못했던 그 달은 박열을 통해 그녀에게 비추었다. 서로에게 태양의 불같음으로 한순간 사그라지는 것이 아니라 늘 은은하게 감싸고도는 달빛에 위안을 삼은 그들은 아닐까.
부지런히 삶을 꾸린 그들은 무엇이든 멈춤이 없었다. 어느 한순간도 세상을 향한 날 샌 비판을 감추지 않았고 육체의 고됨은 오히려 그들의 정신을 영롱하게 했다. 서로의 동반과 지지가 있었기에, 비록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을지라도 그들이 함께 했던 그 시절만큼은 열의로 세상을 살아갔다. 가네코 후미코의 무조건적인 헌신이 있었기에, 가네코를 여성으로 규정짓기보다 정신적 동반자로 이끈 박열이 있었기에 그들의 삶은 찬란하다.
그들의 중심에는 '개인의 자유'가 내포되어 있다. 사상적인 주의를 떠나(사회주의, 민주주의, 공산주의 등을 가를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 개인의 자유'를 향한 염원이 그들을 움직였다. 그렇기에 일본 법정에서도 피고가 아닌 조선인으로서, 더 나아가서는 제국 주의와 억압을 강요하는 국가에 대항하는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당당히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불의에 호통을 치며 당당히 죽음을 원하는 그들.
목적이 뚜렷했기에 그들은 가는 길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죽음이 두렵지 않다. 오히려 환영한다. 잘못을 저질러서가 아닌 신념의 문제로 그들은 사형의 선고에도 '만세'를 불렀다. 일본을 향해 쓴소리를 내뱉으며 반역이 아닌 싸움에서 졌기 때문이라는 박열의 한 마디는 '죽음'도 초월하게 한다. 그들은 일본 법정과 고문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라는 이름하에 타민족을 향한 무차별적인 박대와 학살에 모골이 송연해질 뿐이다. 인간의 광기가 어디까지 뻗칠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시절, 그들은 올바르고 매서운 눈으로 일본 제국주의를 향해 호통을 내렸다.
"너희들이 내 육체야 죽일 수 있어도 내 머릿속 사상이야 어쩌겠는가?"(p236 본문 발췌), 박열의 단단하기 짝이 없는 의지는 제국주의에 편승해 왕정과 국가에 무릎을 꿇은 이들의 의지박약을 꾸짖었다. 가네코는 죽음을 선택했다. 활자를 사랑하고, 그에 기꺼이 중독되어 당시 어린 여성으로서 쉽지 않았던 '개인의 자유'의 염을 향한 그녀이기에 그 죽음이 못내 구슬프면서도 뜻을 이룬듯 하여 숙연해진다.
제대로된 검안서도 없이 몰래 매장되어 젊은 아나키스트들이 그녀의 유골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였고, 정신적 동지를 잃은 박열을 분노케 했으며, 일본이라는 나라에 얽매이지 않은 정신으로 좌절을 끊어낸 그녀이기에 '나'는 기억할 것이다. 가네코 후미코, 박문자를. 22년 짧은 그녀의 생은 비로소 '자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