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긴 변명
니시카와 미와 지음, 김난주 옮김 / 무소의뿔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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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주 긴 변명'을 들을 준비가 되었다. 어디 해보라는 식으로, 들어줄 터이니 어디 그 '변명'을 해보라며, 어떤 온갖 색색의 변명을 늘어놓을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의 변명은 무색이다. 화려한 색으로 자신을 감춘 뒤 늘어놓는 변명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까지도 무심할 정도로 그는 자신을 대변할 변명을 늘어놓지 않는다. 그랬던 그의 무색 인생이 점차 색을 찾아간다.

 

 

 

아주 구차한 변명일 줄 알았던 나의 생각을 뒤집은 [아주 긴 변명].

 

서평----------------------------------------------------

 

아주 긴 변명_니시카와 미와 지음, 김난주 옮김(도서출판 연금술사_무소의 뿔)

 

   ‘아주 긴 변명’을 들을 준비를 했다. 아내의 갑작스러운 교통사고 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사랑, 누구를 향한 변명인지 모를 긴 변명을 들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그의 독백처럼 흘러나오는 변명에 실망하고 아내의 죽음 앞에 담담하다 못해 무덤덤한 그의 내면을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도대체 언제 ‘다른 사랑’을 위해 변명을 시작할 거야?" 그러나 이내 그 사랑이 남녀의 사랑이 아님을, 주인공인 사치오의 심경을 변화시키는 사랑의 실체 앞에서 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나’ 기누가사 사치오의 중심에는 아내 나쓰코와 주변 인물들이 있다. 아내는 자립심이 강한 여성으로 사치오가 직장을 그만두고 작가로서 성공하기까지 10년 동안 가정의 경제를 책임진다. 사치오도 그런 아내가 고맙지만 어느샌가 그들은 서로에게 마음을 닫는다. 한 사람의 독자로 남편의 작품을 냉철하게 평가하는 안목을 지녔지만 감동받은 부분을 애써 칭찬하지 않아서일까, 매너리즘에 빠질까 염려해서일까, 어느새 그의 작품을 읽지도 않게 되었고 그도 더 이상 권하지 않는다. 그렇게 서로의 생활에서 한 발짝씩 뒤로 물러나 방관하게 되는 두 사람. 자신은 결코 좋은 독자가 아니였다며 서로의 인생을 무관심으로 애써 돌리는 나쓰코.  ‘코를 훌쩍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게 참은 것은 지금 생각하면 무슨 오기였을까.’(본문 발췌 p28)

 

   아내는 떠났다. 처음에는 사치오의 마음에서- ‘나는 안도를 얻은 대신 내가 사는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렸다.’(본문 발췌 p31)- 떠났다. 남편이 작가로 성공할수록 자신이 머물러야 할 마음은 어긋났다. 그리고 나쓰코는 친구와의 스키여행에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 사치오와 나쓰코의 마지막은 잘 다녀오라는 인사가 아닌, 의미 없는 서로의 눈빛이었다. 나는 누군가와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늘 하는 인사가 마지막이라 생각지 않으니 사치오와 나쓰코도 그랬을 것이다. 어긋난 마음이지만 그것이 서로에게 건네는 마지막이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떠나보낸 아내에게 사치오는 어떤 마음일까.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는 마음보다 자신의 추도사에 더 신경을 쓰고 애써 괜찮은 척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죽음에 무덤덤한 사치오를 보며 곧 그가 얘기할 ‘사랑’을 외면하고 싶었다. 얼마나 대단한 사랑이길래 아내가 죽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그가 다시 시작된 사랑을 얘기하고 싶을까, 그래서 난 그렇게 떠난 나쓰코를 향해 사치오 대신 눈물을 흘렸다.

 

   나쓰코와 함께 돌아올 수 없는 친구의 유가족을 만난 사치오는 자신의 생활에 틈을 내어준다. 남겨진 이들이 함께하는 생활이 시작된다. 누군가 자신의 생활을 침범하는 것을 정색하고(그것이 나쓰코였을지라도) 자신도 누군가의 삶에 관여치 않았던 사치오에게 시작된 변화를 ‘사랑’이라 한다면 기꺼이 그 사랑을 응원하겠다. 처음엔 다시 시작되었다는 사랑을 남녀간의 사랑이라 단정 지었다. 아내가 죽고 난 뒤 찾아온 사랑을 삐뚤어진 마음으로 사치오의 변명을 듣기 위해 난 책을 읽어내려 갔다. 그러나 나쓰코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떠난 유키의 아이들을 돌봐주기 시작하면서 그가 쌓아올린 굳건한 내면의 성은 작은 변화와 함께 개방된다. 그 속에서 발견한 천국을 그는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 아내가 죽은 뒤에도 눈물 흘리지 않았던 그가 그 아이들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우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그들의 추억 속에 있던 아내 나쓰코의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은 몰랐던 낯선 아내의 모습이 당황스럽지만 그런 아내의 삶을 거부한 것은 정작 본인이었다. 아내에게 무관심했던 것이 아니라 표현 방법이 서툴렀던 것은 아닐까, 이미 떠나버렸다 생각했던 사랑이 마음 한편에 가려져 있던 것은 아닐까.

 

   ‘사랑해야 할 날들에 사랑하기를 게을리 한 대ϻ가’(본문 발췌 p323)를 사치오는 깨닫는다. 소소한 일상이 날마다 빛날 수 있음을 알게 된 사치오는 철저하게 방관자였던 아내의 삶을 조금씩 들여다보게 된다. 그녀의 웃음이 어떠했는지, 그녀의 목소리가 어떠했는지 기억조차 희미해진 그녀의 삶에 조심스레 발을 들인다. 사치오를 만난 나쓰코의 독백-이 사람의 ‘아직’에는 ‘드디어’가 따라붙을까, 아니면 영원히 ‘아직’으로 끝날까(본문 발췌 p20)-에 대한 사치오의 대답을 충분히 들었다. ‘그리고 기누가사 사치오는 처음으로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또 회한 때문이 아니라 그저 아내를 생각하고, 울었다.(본문 발췌 p329)

 

  살아있는 시간의 상실감을 만남과 공존으로 치유하고 아내에게 붙이지 못할 편지를 쓴다. 엄마의 고집이 담긴 생활의 기억은 아이들에게 그리움으로 다가와 그들만의 생활을 만들 것이다. 사치오와 요이치 가족에게 유키의 자전거 페달은 멈추지 않고 언덕을 오를 수 있는,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영화는 보지 않았다. 10여 일 전에 개봉한 영화, 감독 겸 작가 니시카와 미와의 작품을 그린 [아주 긴 변명]의 여운을 남기고 싶다. 애당초 책 표지에 설정되어 있는 배우들에게 이미지를 맞추고 싶지 않아-그렇게 이미지를 각인시키다 보면 내가 느끼는 사치오, 아카리와 신페이 그리고 요이치를 국한되게 생각할 것이고 그 틀에 맞추게 될 것이다. 그래서 반들반들하게 컬러 인쇄된 표지는 벗겨냈다. 그리고 담백하게 써진 [아주 긴 변명]을 들여다봤다. 처음에는 변명을 듣고 싶었는데 종국에 나는 그의 대답을 듣고 있었다. 그의 마음을 들었다. 그가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내가 아니라 자신이었다고. 그랬기에 그렇게 세상사 모든 일이 시큰둥해 보였을 뿐이라는 그의 마음을 들었다.

 

   잔잔한 바람이 한 차례 불었다. 남겨진 그들의 인생에 지난 간 바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애써 만들지 않아도 ‘살아야 할’ 그림은 그려진다. ‘없을 때’라는 건 언젠가는 돌아온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잖아.(본문 발췌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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