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르소, 살인 사건 - 카뮈의 <이방인>,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
카멜 다우드 지음, 조현실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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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읽었던 [이방인] 인가, 20년도 더 넘은, 오래전에 읽었던 이방인은 위대한 작가 알베르토 카뮈의 작품이었고, 한 살인자의 독백처럼 기억될 뿐이었다. 그렇게 기억 한 편에 머물렀던 작품을 다시 끄집어낸 신간이 있다. [뫼르소, 살인사건]

 

 

살인자의 독백 속에 툭 하고 이름도 없이 머무른 '아랍인'의 남은 가족이 씁쓸한 긴 세월을 되씹어 내뱉는 이야기다. 양장본으로 표지 디자인은 뫼르소를 나타내고 있다. 1942년 2월, 단지 '태양'에 어지럽고 눈이 부셔서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며 항변했던 뫼르소는 이제 태양을 등지고 있다.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허무함일까, 자기로 인해 삶이 져버린 '아랍인'에 대한 후회 때문일까...

 

 

카멜 다우드는 알제리에서 태어난 작가이다. 그렇기에 알제리의 독립과 이슬람 종교에 대해 보다 더 깊게 생각해봤을 것이고 감히 이방인을 비틀어서 그 속에 숨어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카뮈도 알제리 태생이다. 또한 기자이며 글을 쓰는 작가라는 공통점을 지닌 두 사람이다. 다만 카뮈는 프랑스 지배령의 알제리에서 태어났다면 다우드는 독립 알제리에서 자랐다. 다우드는 [이방인]을 뒤집어 보면서도 그 플롯을 그대로 따라가는 이야기 구성을 통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오늘, 엄마는 아직 살아 있네'(본문 발췌), 첫 문장부터 이방인과 대립된다. 이 강렬함은 읽는 내내 지속된다.

 

 

너무 오래전에 읽었던 터라 다시 [이방인]을 펼쳤다. 카멜 다우드의 [뫼르소, 살인사건]을 읽기 전에 다시 사건을 재구성하고 싶었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아랍인'에 대한 기억을 되살릴 필요가 있었다. [뫼르소, 살인사건] 덕분에 [이방인]을 다시 보게 되었으니 참으로 고마운 책이다.

 

 

 

서평----------------------------------------------------

 

 

 

뫼르소, 살인사건_카멜 다우드 지음, 조현실 옮김(문예출판사)

Meursault , contre-enquête by Kamel Daoud

 

 

'오늘, 엄마는 아직 살아 있네'(본문 발췌)로 시작하는 첫 문장의 강렬함은 [이방인]의 첫 시작 '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를 연상케 한다. 두 문장의 대립은 궁금증을 일으켜 얼른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지 않고는 못 배기는, 더 이상의 지체는 허용하지 않는 매력을 보여준다. [이방인]이 뫼르소의 사건을 독백처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사회의 부조리에 빗대었다면 [뫼르소, 살인사건](이하 살인사건)은 죽은 자에 얽매인 산 자의 삶을 찾으려는 내면을 보여준다.

 

 

살해된 '아랍인'에 대한 의문에서 이 소설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이름조차 없었던 '아랍인'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에 대한 궁금증이 소설의 바탕이 된다. 여기서 살아있는 엄마는 죽은 자의 모친이다. 죽은 아들을 찾아, 그 시체를 찾아 한없이 떠돌아야 했던 그의 어머니와 동생, 남겨진 가족의 삶에 대한 것이다. 그의 이름을 아는가, 그의 이름을 알려준 것은 화자인 그의 동생 '하룬'이다. 하룬은(자신의 이야기 속에서만 존재하는) '아랍인 무싸'의 그림자를 뒤쫓아 사건을 재구성한다.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무싸'를 찾아 나서는 여행에 동참하게 된다. 어떤 의미도 없이 죽어간 이름 없는 '아랍인'에게 '무싸'라는 이름을 부여하여 살아 있었던 인물로 그에게도 인격이 있었음을, 한 명의 존귀한 생명이 있었음을 주지시켜 준다. 책을 읽다 보면(이야기를 듣다 보면) 하룬과 함께 와인 바에 앉아 떫고 시큼한 와인 한 잔에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이방인]이 뫼르소의 살인과는 무관하게 어머니의 죽음 이후 보인 무관심의 행동을 이유로 '사형'을 구형한 인간의 부조리와, 기독교와 반기독교로 대변되는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살인사건]에서는 죽은 자와 그 그림자를 쫓는 산 자의 삶을 증명해야 하는 부조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룬은 '무싸'에 파묻혀 있다. 그들의 어머니는 살아 있는 아들보다, 살아있었던 아들을 찾는 일에 몰두한다. 끊임없이 '무싸'를 찾는 '오늘, 살아 있는' 어머니를 통해 '나'의 존재를 확인받아야 하는 부조리를 보여주고 있다.

 

 

어디에도 '무싸'는 존재하지 않는다. 살인자의 독백에도, 태양이 작열했던 1942년 바닷가에도 무싸는 없다. 영원히 사라졌다. 하룬은 살인자의 독백에 따라 그 바닷가에서 형의 그림자를 찾는다. 처음 살인사건에 대한 책을 마주했을 때(사형을 구형 받았으나 뫼르소가 출소하여 그때의 살인사건을 책으로 펴낸 것으로 가정하고 있다.) 그 어디에도 그의 형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던 것에 분노했던 하룬은 결국 뫼르소와 같아진다. 프랑스인 뫼르소를 살인의 순간 자기변명만을 위해 미사여구를 늘어놓은 파렴치한 인물로 매도했음에도 자신이 살해했던 프랑스인 조제프에 대한 죄책감은 없다.

 

 

뫼르소에 대한 복수가 완성되었다고 생각해서일까, 프랑스에 대한 복수였을까, 그 후 하룬과 그의 어머니는 묵혀왔던 '살인사건'에서 해방된다. '드디어 살인을 저지를 운명에서 해방되었다.'(본문 발췌)고 살인의 순간을 묘사하며 묵은 세월을 떨쳐버린다. 그러나 알제리 독립 때의 혼란하던 시기의 이방인(프랑스인)으로 대변되는 타인에 대한 살인은 용납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점을 제시한다. 프랑스령 시대의 아랍인에 대한 압박이 해방 후 어떻게 표출되었는지 보여준다.

 

 

프랑스 지배령의 알제리가 궁금하고 독립 이후의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뫼르소를 '이방인'으로 규정한 카뮈와 뫼르소를 이방인에 앞서 '살인자'로 인지한 카멜 다우드의 '알제리'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못내 궁금하다. 작가는 프랑스인으로 대변되는 지배자들과 피 지배인인 알제리 국민들의 대치 상황을 [살인사건]에서 다루고 있다. 식민시대의 국민이 그러했듯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살해되었으나 시체조차 찾을 수 없을 만큼 관심 밖이었던 그들이 처한 그 시대를 대변하고 있다. 또한 작가는 카뮈의 작품을 곳곳에 배치하여 부조리에 대해 암시하고 있다.

 

 

단지, 이름 없이 사건 이름으로만 불리던 아랍인의 죽음 전 삶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지배자와 피 지배인에 대한 대립과 백인과 비(非) 백인의 대면이 가져온 사회 현상을 비꼬고 있다. [이방인]에서 레몽에게 구타를 당한 여인은 식민지하에 있던 알제리 국민의 고통은 아니었을까. 뫼르소의 여인이었던 마리는 프랑스를, 구타당한 여인은 알제리를 대변하게 된다. 그 여인을 지키기 위한 '아랍인'은 해방을 위한 투사는 아니었을까. 태양의 작열에 밀려 총을 쏘고 말았던 뫼르소는 단지 한 사람이 아닌 알제리의 해방을 방해하는 정치적 요인은 아니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긴 역사인지(본문 발췌)-132년 동안 프랑스의 그림자에 묻혀 있던 알제리인들의 포효는 1962년 독립까지 지속된다. 우리나라 또한 35년간의 일제 강점기에서 수많은 부당함을 겪어 왔다. 그보다 100년은 더 지배하에 있던 알제리 국민들의 고통은 어찌 말로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방인]의 카뮈도, [뫼르소, 살인사건]의 카멜 다우드도 알제리 태생이다. 그런 만큼 '이방인'인 타인을 향한 시선과 타인이 보내는 눈길을 하나의 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식민자들은 자기들이 길들인 것들에는 이름을 주고, 자기들을 괴롭히는 것들에게선 이름을 빼앗으면서 재산을 늘려왔다네.'(본문 발췌, 25~26page)

 

 

[살인사건]은 [이방인]의 장면이 곳곳에 오버랩된다. 뫼르소의 기독교에 대한 반감과 하룬의 이슬람교에 대한 비판은 죽음은 종교와 무관하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살인을 저질렀다고 종교에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인가, 신이 용서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살인은 추억이 아니다. 단죄 받아야 할 죄인 것이다.

 

 

뫼르소의 마지막 독백은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이방인 발췌), 하룬 또한 '나도 역시 구경꾼들이 많았으면 좋겠네. 또 그들의 증오가 맹렬했으면 좋겠고.'(본문 발췌)로 1962년 살해했던 프랑스인 조제프-평생 자신을 쫓아다니는 유령에게 하듯이 독백으로 마무리한다. '법정의 정의가 아니라 균형의 정의를 찾고 싶은 거야.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하나 있지. 유령에게 쫓기지 않고 떠나버리고 싶은 것.'(page 15)

 

 

뫼르소는 카뮈가 매혹되었던 mer(바다)와 soleil(태양)을 의미하는가, 바보처럼 죽는 다는 뜻의 뫼르(meurt) 소(sot)인지 아니면 아랍어로 발음되는 엘 메르술(사자_使者, 전령_傳令)이란 뜻인가. 하나의 작품을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실존주의의 대표작이라 일컫는 [이방인]을 같은 언어로 쓰되 다른 방향으로 써 내려간 작품이기에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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