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닉네임을뭐라하지 > <자기 앞의 생> / 에밀 아자르 / 용경식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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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제법 많은 수의 독자 서평에서 평균 별표수가 네 개 반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래서 보게 되었다. 에밀 아자르가 누군지도 몰랐고 로맹 가리가 누군지도 몰랐으니, 그 둘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 역시 몰랐다. (자랑이냐?) 여하튼 난 비평가나 평론가의 글 - 특히나 고지식한 단어와 난잡한 문장들의 나열로 된 것 - 보다는 많은 수의 일반 독자들이 매긴 별표점수를 꽤나 옹호하고 선호하고 신뢰하는 편이다. 어찌됐건 내 결정은 탁월했다.
처음 100페이지를 읽는 동안엔 꽤나 버거웠다. 환절기 즈음에 닥쳐오는 내 수면증이 가장 큰 문제였으리라. 책을 펴고 5페이지를 채 넘기지 못하고는 졸아댄 것이다. 소설의 내용은 집중적으로 내게 와 닿지 않았다. 이야기 속에 몰입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책장을 덮지 않았다.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이 책을 간과해버리기 힘들었다. 성귀수가 말한 작품의 명성과 읽는 사람의 무지와의 관계도 신경 쓰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 스스로가 굳이 책을 덮을 필요를 못 느꼈다. 왠지 계속 읽어도 될 것만 같았다.
100페이지를 넘어선 그제야 나는 이 소설과 하나가 되었다. 주인공인 소년 모모(모하메드)가 하는 말들은 물 흐르는 듯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굉장한 속도로 이야기가 나에게 다가왔다. 페이지가 넘어가면 넘어갈수록 이야기는 더욱 가슴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 뭐랄까, 문학상의 존재가치가 이런 소설의 발굴에 있다면 그보다 더한 가치는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꽤나 오랜만에 느껴지는 말 그대로의 ‘감동’이 전해져왔다.
번역소설의 한계도 필요 없었다. 아랍인과 유태인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을 굳이 알 필요도 없었다. 프랑스의 사회·문화적 배경 역시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모두들 인간이라는 것, 그들 모두는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 당연한 진리지만 망각한 채 드문드문 떠올리는 그런 사실들만을 느끼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소설은, 읽는 사람 누구에게든 가 닿아 가슴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사랑. 말 그대로의, 사랑. 그 어떤 정의도 무색하게 만드는 그 어떤 한계도 초월해버리는 진정으로 순수한 ‘사랑’. 그 큰 힘으로 우리 앞에 놓여진 생은 더욱 빛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저런 수많은 난관들을 불식시키고 죽음 앞에서 자신의 생을 더욱 밝혔던 모모처럼. 말과 머리가 아닌 순수한 몸으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새도 없이, 그렇게 모모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다.
뒤늦게 난 이 소설에 주옥같은 문구들이 여기저기서 빛을 발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빅토르 위고를 너무나 사랑하는 호밀 할아버지의 입을 통해, 혹은 호밀 할아버지를 너무나 존경하는 주인공 모모를 통해. 자기 앞에 놓인 생을 진정으로 살아본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는 그런 진리들을 곳곳에 숨겨두었다. 뿌리 깊이, 그래서 흔들리지 않게. 알아서 슬프지만 인정해서 아름다울 수 있는 그런 말들, 또 말들.
아, 오랜만에 좋은 소설을 읽었다. 소설가 조경란은 책 뒷부분에 ‘좋은 책을 읽을 때면 아직도 나는 가슴이 뛰고 그 사실을 누구에게든 비밀로 부치고 싶다.’라는 말을 했으나, 난 아니다. 좋은 소설을 읽었다는 사실이 스스로 너무 뿌듯하고 흡족해서, 다른 사람에게 더욱 자랑하고 또 말해주고 싶다. 솔직히 지금 내가 받은 느낌들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적확하게 표현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솔직히 말해 지금 받은 이 느낌을 작은 상자 안에 담은 채, 꽁꽁 얼려 보관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면, 그 작은 상자를 드문드문 꺼내어 보며 행복할 수 있을 테니까. 멀지 않은 시기에 다시 읽어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