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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새우범생 > 삼일절 새벽에 읽은 <식민주의적 상상력>
바리에떼 - 문화와 정치의 주변 풍경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고종석 선생님의 신간 『바리에떼』(개마고원, 2007)의 서문에는 2부의 첫 번째 글인 <식민주의적 상상력>(이하 <상상력>)을 꼼꼼히 읽어달라는 당부의 말씀이 있다. 나는 그 부탁에 기꺼이 호응해 삼일절 새벽에 그 글을 가장 먼저 읽었다. <상상력>은 복거일 선생님의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이하 『변호』)를 비판한 글로서 친일 문제에 대한 많은 성찰거리를 남긴다. 『변호』는 일제 식민통치는 가혹했으며 조선인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설파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식민통치가 조선의 근대화를 앞당겼다며 인구증가율 등을 들어 논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보인다’는 표현을 쓴 것은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 선생님은 『변호』의 주장을 “과격한 상황론”이라며 『변호』의 저자가 지금껏 취해온 개인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중시하는 우파적 스탠스와 다름을 지적한다. 특히 “이런 환경결정론을 일제 하의 친일 행위에만이 아니라 다른 수많은 범죄들, 특히 궁핍에 기인한 강력범죄나 ‘이념 범죄’들로까지 넓혀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의 논거가 한결 진지하고 단단해(93쪽)”질 것이라며 권유할 때는 무척 통쾌했다. 『변호』의 논리를 차용해 삼일절 새벽에 거리를 질주한 폭주족들도 이 날의 역사적 의미를 다소 요상하게 기린다는 상황론으로 넘어가 주면 어떨까? 각종 불법과 비리로 구속된 재벌 관계자들이 어려운 경제여건이라는 상황론으로 말미암아 유유히 옥문을 빠져나오는 것보다 훨씬 작은 너그러움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변호』는 통계적 수치를 통해 식민통치의 경제적 효용을 입증하려고 노력하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유주의자(!)인 나는 그런 식민통치로 이룩한 경제발전이 그다지 자랑스럽지 않다. 개개인의 자유를 몇몇 통계수치로 가늠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기도 하거니와 설령 가늠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훼손된 자유에 대한 비용 처리가 너무 인색하다. 추상적 가치를 계량화하기 즐기는 복 선생님의 장점이 바래는 순간이다. 고 선생님의 의구심대로 “일본 식민통치에 대한 변호의 연장선에서 박정희를 바라보고 있(107쪽)”다 보니 이런 무리수를 던진 건 아니었을까.


복 선생님은 징집제도로 젊은이들이 맛보는 비참함은 우리 사회의 복지를 크게 줄인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또 징집 제도는 병사들의 낮은 생산성도 문제된다며 주관적 측면에 대한 계량적 접근을 시도한다(복거일,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죽음 앞에서』, 개마고원, 2000, 197~203쪽 참조). 이런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은 복 선생님은 『변호』에서 예의 그 장기를 선보이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고 보니 한국이 징병제 국가가 되고 군사주의 문화에 시달리는 게 일제와 아주 무관하지 않기도 하다.


일제가 조선을 돼지 키우듯이 먹여놓고 탐스러운 살코기를 음미하려했는지, 진심으로 내선일체를 퍼뜨려 이등국민으로나마 편입하려 했는지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도록 하자. 조선과 비슷한 정착자 식민지로 손꼽히는 미국,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한 <상상력>의 논박으로 충분할 듯싶다. “앵글로색슨족의 입장에서는 세 나라가 지상의 낙원일지 모르겠지만, 원주민의 입장에서는 잃어버린 고향(101쪽)”에 지나지 않음은 또렷하다. 추출 식민지와 정착자 식민지 사이의 섬세한 차이를 헤아리는 것보다 “모든 식민주의는 그냥 나쁘다(105쪽)”라고 외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다.


복 선생님이 힘주어 말씀하시는 그 자유주의가 경제적 자유를 떠받드는데 힘을 다한 나머지 정치적 자유에는 무심해서 당혹스럽다. 조선인들이 제 자유를 헌납하고 이룩한 경제적 이득에 우호적 눈길을 건네는 게 마뜩찮다. 게다가 그 헌납은 자유의지도 아니었다. 이런 점들을 부러 견뎌내더라도 “‘우리 모두가 죄인인데 누가 누구를 탓하랴’ 하는 전 국민적 반성주의(123쪽)”만큼은 단호히 반대한다. “죽은 자는 더 궁극적 소수다. 산 사람들과는 달리, 죽은 사람들은 연합을 이룰 수 없다. 그들은 홀로 누워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후대 사람들의 선고를 받는다”는 복 선생님의 주장에도 거의 동감할 수 없다.


안락하게 자연사함으로써 일신과 가문의 부귀영화를 건사한 이들은 충분히 남는 장사를, 보다 정확히는 부당이득을 취했다. 『변호』를 소수를 위한 변명으로 보기에는 그들은 너무 다수였고 주류였다. 다수파와 주류에게 관용을 베풀라고 강요하는 건 어색하다. 관용은 의무라기보다는 권리다. 친일 행위를 했던 지식인 및 사회 지도층을 더 엄준하게 꾸짖는 것이 사회 발전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억지스럽다. 그네들이 누렸던 자유만큼의 책임을 요구하는 건 그리 지나친 요구는 아니다.


사회 상층부에 대한 윤리적 기대 수준을 낮추려는 시도는 일제시대에 지나지 않고 오늘날까지 그 파장이 전해진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는커녕 남들 다 지키는 준법정신도 발휘하지 않은 이들이 사회 상층부에 머무르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보아 왔다. 지식인의 변절이 일제에게 적잖은 선전 도구가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어쩌면 『변호』는 “일정한 생활 근거가 없으면 한결같은 마음이 없어진다(無恒産無恒心)”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이들의 단골 문구이기도 하다. 그러나 맹자는 곧이어 “일정한 생활 근거가 없으면서도 항상 꾸준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는 오직 선비만이 가능하다(無恒産而有恒心者, 惟士爲能)”고 말씀한다. 무항산유항심은 차치하고 무항산무항심도 아니고 유항산무항심이었던 지도층을 보는 씁쓸함이 가시지 않는다.


일전에 유시민 선생님은 민주화 유공자 보상법을 게임이론을 빌려 설명하며 경제정의의 실현으로 볼 것을 주창했다(유시민, 『WHY NOT?』, 개마고원, 2000, 74~84쪽 참조). 나는 그 제안에 공감하며 반복되는 게임에서 대한민국 구성원들이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도록 탄탄한 경제정의를 세우길 희망한다. 일제 치하와 같은 암울한 상황이 다시 벌어질 때 자유를 애호하고 폭력에 반대하는 시민과 지식인들이 더 늘기 위해서라도 친일파에 대한 최소한의 기록과 평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열악한 형편에서도 대한민국에 대한 ‘배신전략’보다 ‘협조전략’을 선택하는 게 장기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나는 이것이 보다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접근이라고 본다.


역사는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 복 선생님은 ‘진화’라는 말을 좋아한다. 복 선생님은 진화에도 큰 추세는 있음을 인정한다(“‘친일은 없다’ 발언으로 논란 일으킨 복거일씨.” 동아일보. 2002. 06. 03. 참조). 생존을 선(善)으로 여기는 복 선생님께서도 인간은 점차 이타적으로 나아가는 추세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복 선생님은 『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에서 개인들의 이기심은 ‘상호적 이타주의(reciprocal altruism)’로 발전한다고 주장한다. 게임이론의 “‘되갚기’의 놀라운 성공에 담긴 함의들은, 생명체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협력한다는 통찰(“‘게임이론’ 벗어난 對北유화정책.” 동아일보. 2005. 11. 14. 참조)”을 조명하는 칼럼에서도 그런 낙관이 읽힌다(참여정부의 되갚기 정책이 미흡함을 질타하는 칼럼을 읽으며 나는 그의 되갚기가 편향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인간이 상호적 이타주의로 진화해감에 있어 되갚기가 필요불급하다면 왜 친일파는 예외가 돼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물며 여기서의 되갚기는 부관참시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며, 후손들을 단죄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저 진상을 규명하고 부끄러운 과거를 기록하겠다는 정도다. 광복 이후에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최린이 자신의 친일행적을 사죄하며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지를 찢어 죽여달라”고 참회한 것과 같은 반성이 드물고 드문 까닭은 친일파들의 상당수는 확신범이었다는 방증이다. 적어도 부끄러움을 인지할 능력을 잃었다는 징표다.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 헌법이 그렇고 그렇게 살다간 자들과 그네들의 후손(특히 힘센 자들)의 명예권, 인격권까지 보호해야할 가치가 있을까 싶다.


<상상력>은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해서 부득이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책 제목 바리에떼(Variete)는 프랑스어로 ‘다채로움’이라는 뜻이다. <상상력>을 비롯한 여러 정치 에세이를 관통하는 원칙은 균형감각이 아닐까 싶다. “치우침으로 치우침을 치유하지는 못한다(58쪽)”는 명제는 이 책의 핵심 주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사회적으로든 유전적으로든)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차가운 인식과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지녀야 한다는 뜨거운 믿음 사이의 균형(58쪽)”을 찾기 위한 정성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내가 고 선생님 글을 달게 읽는 이유는 불완전한 인간의 냄새를 맡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좀 더 기품 있게 살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는 과정의 신산함이 거침없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죽음은 그 개인에게 우주의 소멸이다”라는 구절을 늘 가슴에 새기고 산다면 한번 뿐인 삶을 대충 살지 않는 힘이 될 것이다. 책에 실린 각종 평론 외에 선생님이 지인들에게 건네는 사랑 표현도 넉넉한 덤으로 읽어봄직 하다. 아니, 또 하나의 본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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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노아 > 후유증이 큰 책
쥐 I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장르를 어떻게 구분해야 할 지 잠시 난감했다.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것이라 역사쪽으로 분류할 수도 있고, 개인의 자서전으로 볼 수도 있고, 매체를 생각하면 만화쪽으로 구분할 수도 있겠다.  나는 개인의 일대기라는 쪽으로 카테고리를 분류했다.

소문을 익히 듣고 구입했는데, 첫장 넘겨보고 숨이 턱 막혔다.  소프트하고 샤방샤방한 그림이 있을 리 없지만, 그래도 까만 테두리에 까만 그림, 까만 글씨, 도통 음영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온통 까만 책 속 내용이 읽기도 전에 벌써 숨쉴 공간을 주지 않는 답답함으로 다가온 것이다.  여기서부터 시작이구나... 하는 긴장감이 바싹 엄습했다.

작가는 2차 세계대전 때 아우슈비츠를 경험했던, 그리고 살아남은 부모를 둔 유태인 작가다.  여러 실험적인 작법을 통해 신선하고도 독특한 만화작법을 연출해 낸 그는 아버지를 인터뷰하여 이 작품을 완성하였다. 1권에 8년, 2권까지 모두 13년에 걸친 작업이었고, 이 책은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단순히 이 책이 히틀러에 의해 학살된 억울하고도 불쌍한 유태인 이야기라고만 짐작하면 책의 절반만 읽은 셈이 될 것이다.  유태인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학살 당했는 지는 모두 안다.  하지만, 그랬다!라는 결과만 알 뿐이다.  이 책에는 그들의 처절한 생존 싸움이 무서울 만큼 솔직하게 그려져 있다.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위험한 상황, 당장에 누가 죽을 지 알 수 없는 상황, 그 와중에선 믿을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사랑하는 가족도 내가 살기 위해선 뻔히 죽을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등 떠밀어 내보낸다.  죄책감조차 사치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당연한 일이 되어버린다.

살아남는 자는 착한 자도 아니고 명예로운 자도 아니다.  능력있는 자!  악착같이 살아남을 수단이 있는 자!  작 중 작가의 아버지인 블라덱은 딱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구사할 수 있는 언어와, 손에 익히 재주와, 긴박하게 움직여야 하는 예민한 본능을 가지고 지옥같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남는다.  그의 처세술은 로빈슨 표류기의 로빈슨도 못 쫓아올 수준이다.;;;;;

전쟁은 끝났고, 그는 살아남았다.  그의 아내도 살아남았다.  새 인생을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로울 수 없었다.  작가는 대학에 가서야 모든 아이들이 악몽에 시달리는 부모의 괴성에 한밤에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놀랍게 체득한다.  굶주림이 무엇인지를 아는 아버지는 절약이 습관화된 정도가 아니라 신성시할 정도다.  그런 악착스러운 모습들은 아들과의 사이를 자꾸 벌어지게 만든다.  아버지의 가치관으로, 전쟁을 경험해 보지 못한 아들의 생활습관이나 직업 등은 모두 한숨 나오는 것으로만 보일 뿐이다.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개선해보고자 애쓰지만 이내 지쳐버린다.  병든 아버지를 자기 집에 모셔 와 살 생각은 감히 하지 못한다.  자살한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아버지도 똑같은 무게로 그를 억누르고 있다.

작가가 보여준 극단적 비극의 한 단면은 인종차별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자신이 유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살았던 그 아버지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도둑 취급하며 어찌 상대할 수 있느냐고 펄펄 뛰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들은 아버지가 정말 싫어진다.

작품은 이야기 말고도 여러 독특한 점을 지닌다.  작품 속에서 유태인은 쥐로 묘사되고 독일인은 고양이로 그려진다.  폴란드인은 돼지로 묘사되고 미국인은 개로 나왔으며, 프랑스인은 개구리로 그려졌다.

그가 1권의 성공 이후 사회적 부와 명성을 얻으면서 더 고독해지고 더 우울해지고 더 힘들어하는 모습은 몹시 인상적이다.  그의 책상 밑으로 셀수도 없이 많은 쥐들이 갈비뼈를 허옇게 드러낸 채 죽어 쌓여 있는 모습이 같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이 겪지 않은 일일지라도, 그가 유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끔찍했던 기억은 유산처럼 그가 짊어지고 갈 몫이 되어버렸다.  피할 수도 없고 벗어날 방법도 없는 채로.

아버지가 마지막 인터뷰를 마치며, 그를 이미 죽은 형의 이름으로 부른 장면도 책장을 바로 넘기지 못하고 멈추게 하는 힘을 지녔다.  형은 가스실로 보낼 수 없다며 숙모가 독약을 먹이는 바람에 여섯 살의 나이로 죽었다. 

현 시점에서 이스라엘은 전세계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비난받을 짓을 했고, 비난 받고 있지만 아마도 끄떡도 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무섭게, 독하게 만들었을까.  2차 세계대전의 악몽이?  수천년에 걸친 유랑 생활이?  그 모든 이유들을 도합해서 오늘의 그들을 만들었을 것이다.  자신들은 단지 생존하기 위해서 싸울 뿐이라고 항변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들은 불과 60년 전의 일을 잊은 것일까.  가해자이면서 뉘우치지 못하는 일본도 욕먹어 싸지만, 피해자였으면서 다시금 가해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대체 어떤 양심을 갖고 있는 것일까.

이 책은 분명 좋은 책이다.  읽어 마땅한 책인데, 후유증이 남을 것이다.  가슴 속이 더 무거워지는 답답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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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인지과학의 제3의 움직임

교수신문(06. 07. 23)에서 학술동향 기사를 옮겨온다. 이정모(성균관대 심리학과) 교수가 쓴 '인지과학과 제3의 움직임'이 기사의 제목이고 '뇌·신체·환경의 종합…정서와 의식 넘어선 움직임'이 그 부제이다. 인지과학쪽 책들을 교양수준으로는 갖고 있고 더러 읽어본지라 '업계'의 동향에 대해서 한번쯤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로 여겨진다.

 

 

 

 

-마음의 본질은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하는가 하는 탐구에서 등장한 인지과학이 최근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 동안의 인지과학을 지배해온 데카르트적 존재론의 패러다임을 벗어나려는 그러한 움직임이다.

-1950년대 후반에 등장한 인지과학은 그동안 두 단계의 중요 패러다임을 거쳐 왔다고 할 수 있다. 첫 단계는 마음에 대한 컴퓨터 은유를 바탕으로 한 고전적 인지주의 또는 계산주의의 시기로, 인간 언어의 추상적 구조에 바탕하여, 심적 내용은 표상, 심적 과정은 계산으로 개념화하여 마음의 본질을 탐구한 시기였다. 둘째 시기는 이러한 고전적 인지주의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 등장한 연결주의와 신경과학의 전개다. 이 시기에는 생물적 뇌의 추상적 구조(연결주의)와, 실제적 구조(신경과학)에 바탕하여 마음을 탐구하되, 언어의 통사적 구조에 바탕한 표상주의는 배격하고, 기호(상징) 이하 수준의 계산, 신경적 계산을 강조한 시기였다.

 

 

 

 

-그러나 전통적 인지주의는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하드웨어의 중요성을 격하시켜 뇌의 탐구를 소홀이 하였다. 심신동일론 관점에 서있다고 볼 수 있는 연결주의나 현재의 신경과학도 근본적으로는 현상을 경험하는 주체와 그 대상인 객체를 이분법적으로 보는 데카르트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두뇌=마음’의 개념 틀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인지과학에서 제3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심신이원론이건, ‘두뇌=마음’의 심신동일론이건 현대 과학에서 지지받기 힘들다는 것이다. 마음은 두뇌 내부의 작용만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두뇌, 신체, 그리고 세계가 연결된 집합체 상의 현상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거슬러 올라가면, 윌리엄 제임스, 듀이, 로티 등의 실용주의 철학자들과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등의 대륙의 철학자들이 이미 제기한 것이었지만, 현대 인지과학에서 이러한 주장의 타당성을 먼저 강하게 드러내준 사람들은 철학자들보다는 인공지능 및 로보틱스 연구자들 그리고 발달심리학자들과 신경과학자들이었다.

-인공지능학자인 로드니 브룩스(Rodney A. Brooks, 사진)는 1990년대 초에 그 당시를 풍미하던 내적 표상 조작 중심의 인공지능시스템이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표상이 없는 지능시스템이 앞으로의 로보틱스 연구가 지향하여야 할 방향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한편 발달심리학 연구자들은 어린아이가 걷기를 학습하는 행동 등을 내적 표상 개념이 없이 동역학체계적 틀을 적용하여 설명하는 것이 더 적절함을 보였다. 마음이란, 특정 지식이 표상으로 뇌에 내장됨 없이, 환경과 괴리되지 않은 개체가 환경에 주어진 단서구조들과의 상호작용하는 실시점의 행위에서 일어나는 비표상적 활동이라고 본 것이다.

 

 

 

 

-한편 신경과학자들은 뇌와의 연결이 단절된 척추체계가 통증 감각과 학습에서 일종의 인지적 반응을 보인다는 것과, 신경계가 아닌 전신에 퍼져있는, 호르몬 관련 세포 수용기들이 정서반응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정서적, 의식적 사건이 뇌만의 사건이 아닐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마음=두뇌’ 식의 단순화된 생각의 위험성을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인지과학 내의 경험과학에서의 이러한 논의나 연구 추세는, 철학이 개입하기 이전에는 데카르트적 틀에 대한 산발적 압력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제 21세기 초, 현 시점에서 철학이 이러한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인지과학의 경험과학적 연구의 새 변화들이 어떤 하나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묶일 수 있는가 하는 개념적 기초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마음과 뇌가 동일한 것이 아니며, 마음은 뇌를 넘어서, 비신경적 신체, 그리고 환경, 이 셋을 포함한 총체적인 집합체에서 일어나는 그 무엇으로 개념화하여 인지과학의 기초를 재구성하는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자연과학적 인지과학과 인문학의 철학을 연결하여 새로운 틀을 이루어 내려는 이러한 작업은 마음의 문제를 협소한 주관적 차원에 국한하지 않고 개념화한 듀이 등의 고전적 실용주의철학자들의 계승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주체와 객체가 괴리되지 않은 세상속의 존재로서의 인간의 일상적 인지를 강조한 하이데거적 재구성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새로운 움직임의 철학자들이 대부분 ‘동역학체계’ 틀로의 변화를 주창하는 것을 본다면, 과거의 ‘계산의 언어’에서 ‘뇌의 언어’로, 그리고 이제 ‘동역학체계의 언어로’ 개념화하는 작업이 인지과학의 여러 분야에 앞으로 중요한 변화를 가져올 것임은 확실하다. 그러나 뇌, 신체, 환경의 총체로서 마음을 개념화 한 인지과학의 새 틀이 신경과학, 심리학 등에서 생산적인 연구 프로그램으로 구체화되려면, 앞으로도 자연과학으로서의 인지과학과 인문학으로서의 철학을 연결하는 추가적 작업이 더 심층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06. 07. 26.

P.S. '마음=뇌'가 아닌 뇌로부터 분리된 마음(혹은 마음으로부터 분리된 뇌)이라... 흠, '사이보그지만 괜찮아!'가 농담만은 아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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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세류 > 마초와 남자는 다르다
남자는 원래 그래? - 남성 性을 가로지른 모리오카 교수의 성 담론
모리오카 마사히로 지음, 김효진 옮김 / 리좀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읽게 된 계기 : 김신명숙의 추천사

주례사비평이 욕을 먹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추천사의 경우에는 찬사 위주다. 이 경우에는 그 추천을 누가 했는가에 따라 구매가 좌우될 것이다. 이 책의 경우 김신명숙이었다는 것이 내게는 큰 흔들림이었다.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마초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서 그녀의 글은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는 수준을 담보해왔다. 그런 그녀가 추천했으니, 맘이 흔들릴 수밖에. 만약 추천사가 없었거나, 다른 이가 썼다면 아마 구매까지 이뤄지진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생각난 사람 : 마광수교수

자기의 경험을 솔직히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사건과 실화’ 정도의 잡글(?)에 머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저자가 교수라는 신분이기 때문에 하나의 논문으로 발표가 됐고 그것들이 모여져서 하나의 책을 이뤘다. 이 점에서 마광수 교수가 생각난 건 어쩌면 당연한 일. 마교수의 경우에도 ‘즐거운 사라’ 이전부터 자신의 솔직한 생각을 발표해왔으니 말이다. 그는 얼마나 많은 곳에서 ‘인공미’, ‘15cm 하이힐’, ‘페티시즘’을 부르짖었던가. 모리오카 교수도 그런 면에서 교수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솔직하게 썼다는 점은 인정된다.

내용과 관련하여

분명 어느 정도 공감가는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까 저자는 남자들이면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얘기를 하면서 그 속에 숨은 것들이 무엇인지를 밝혀내고자 하는 것이다. 예컨대 야한 비디오는 끝까지 보는 일이 없다는 점. 그건 오직 남자의 ‘사정’수단으로 사용된다는 것. ‘사정’ 후에는 바로 꺼지는 운명을 갖고 있는 야한 비디오. 이것에 대해 저자는 ‘사정’ 후 남자의 무기력감 때문이라고 얘기를 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성만큼 ‘강한 만족(?)’을 얻지 못하는 열등감 때문이라는 얘기 등을 제시한다.

한계와 관련하여

분명 공감가는 부분이 있더라도 한계가 있다는 것 역시 당연하다. 이건 마교수의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인공미’, ‘15cm 하이힐’을 좋아하는 남자도 있을 테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 이 책의 경우도 저자 자신의 경험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아무리 냉철히 분석한다고 하더라도 쉽게 보편화하기는 무리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저자도 일정부분 인정하고 있다.

마초근성 버리기

어땠어? 좋았어? 이런 질문들도 어쩌면 마초근성의 다른 한면을 이루고 있다고 보인다. 남자는 언제나 여성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생각들이 사방에 퍼져있다. 상황이 이러니 이 글을 읽는다면, 남자는 원래 그래야된다는 편견에 대해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대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 김소희 기자가 말했듯이, 그런 건 대화로 서로 만들어 갈 수 있는 거니까. 대화, 이것이 마초가 되지 않는 첫 번째 길이자, 자기 몸을 알아가는 두 번째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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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제이슨 > 거장들에 관한 이야기...
열정과 기질
하워드 가드너 지음, 문용린 감역, 임재서 옮김 / 북스넛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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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근현대의 창조적인 거장들 7인의 연구를 통해서, 창조적인 거장들은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낸 책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파블로 피카소,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T.S 엘리엇, 마사그레이엄, 마하트마 간디의 7개의 축약된 전기가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낸데, 그래서 이 책은 분량이 700여페이지에 달하고, 읽는데 시간도 많이 걸리는 방대한 양이다.

저자가 밝혀낸 전형적인 창조자들은 청년기에 집안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특정한 분야에서 10년이상 어느분야를 완전히 통달하기 위해서 노력하며, 일정한 시간이 되면 자신이 관심이가는 문제영역을 발견하게 되고, 어느시점에서는 동료들과 고립되어서 자신만의 작업에 몰두한다. 이 시기가 중요하다고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는데, 창조자들은 자신이 도약의 문턱에 와 있지만 정확히 그게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외로운 몰입을 지속하고, 이시기에 소수의 친구 혹은 동료들에게 인지적, 정서적 도움을 받으면서 자신의 세계를 완성해간다. 운이 좋으면, 이시기를 지나서, 위대한 업적을 지닌 대작을 발표하게 되고, 그로인해서 동시대의 전문가 집단에게 인정을 받으면서, 다시 인간관계가 넓어지게 된다.

창조자는 어떤 위와 같은 몰입의 시기에 자신의 혁신적인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몰입을 유지하기 위해서 특별한 계약, 파우스트적 계약을 맺게 된다. 창조자는 자신과 주변사람을 끊임없이 채찍질하면서, 다른 인간관계등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신의 창조적인 작업을 지속한다. 대작을 발표한 이후에 또 10년이 지나면 좀더 포괄적이면서 이전 작품을 통합한 혁신적인 대작을 발표하게 된다.

저자는 창조성이란 것은 재능있는 개인, 장(비평가, 제도), 분야/학문 영역의 세가지요소가 맞아 떨어져야하며, 위대한 창조성을 발휘했던 사람들은 한사회의 경계에 위치하며, 위의 3가지 영역의 비동시성의 고통을 받으며, 그것을 이용하여 위대한 창조적인 업적을 쌓았다고 주장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거장에 대한 일반론적인 이론도 재밌게 느껴졌지만, 구체적으로 언급이된 7명의 다양한 분야의 거장들의 삶에 내재하는 수많은 결점과 모순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위대한 업적으로 이어지는 삶을  살아간 모습이 흥미롭다. 간디처럼 세계평화에 기여하고, 인도인의 마음을 휘어잡았던 인물이 친밀한 관계인 가족들하고의 인간관계가 서투른 모습,말년에 자신의 곁에 나체의 젊은 여자를 자도록 한 일, 피카소의 냉혹한 주변관계, 복잡한 결혼생활, 스트라빈스키의 끊임없는 법률소송과 주변사람과의 다툼, 프로이트의 카리스마적이지만, 까다롭기 이를데없는 추종자 조직관리와 추종자들의 자살.

어떤 것에 가치를 두고,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인류역사에 이름을 남기고자하고, 무언가를 창조하고자하고, 결국은 죽음 앞에 허무한 인생을 느끼고, 자신의 유한한 삶의 시간을 유의미하게 쓰고자 했던 사람들이 거장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모두는 거장의 삶에서 배워야만할 것들이 분명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지만, 위대한 것을 이뤄낸 거장들은 외로움의 시간을 이세상에 의미있는 가치있는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절대시간에서 많은 시간을 투여하고, 노력해서 수십년에 걸쳐서 어마어마한 다작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만들어왔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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