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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네 소사 1
정용연 지음 / 휴머니스트 / 2012년 7월
평점 :
이 책의 존재를 알게된 건 최근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다 읽으면서
19~20권 즈음의 작가 후기에 이 책이 잠깐 언급된 내용이 있어서였습니다.
<정가네 소사>는 할아버지 대부터 삼대에 걸친 작가 본인의 가정사를 그리고 있는데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골드러시가 만연했던 시절 금 채굴에 뛰어들었다가 결국 몰락한 외할아버지,
무면허 의사였던 아버지,
그토록 원했던 사관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형,
못난 지아비들 때문에 억척지게 일해야했던 삼대의 여인들 등
집안사를 정말 날것처럼 속속들이 들춰내고 있습니다.
공개석에서 드러내기 쉽지 않을법한 본인의 첫사랑 이야기까지 그대로 담겨있기도 하지요.
윤태호의 웹툰 <인천상륙작전>은 일반 가정을 주인공으로 삼으면서도
한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이 그대로 묻어있어서 선이 매우 굵은 작품으로 볼 수 있는 반면,
정용연의 <정가네 소사>는 정말 제목 그대로 '소사',
작가 본인의 집안사를 잔잔하게 돌이키면서 남기는 회고록 같은 성격입니다.
세은(세계은행)에서 빚내 잠실을 만들고 누에를 키우다
일본 중국 간 수교로 인해 정부 수매량이 줄어들면서
원래부터 그리 넉넉지 못했던 형편이 더욱 어려워지기도 하고
서울로 이주하면서 다른 집에 보냈던 개 거뭉이가 줄을 끊고 다시 돌아왔던 서글픈 추억이나
역설적으로 할애비가 어떻게든 자식들 먹여살려보겠다고 파놓은 금 방죽 흙구덩이에
손자가 빠져죽는 역설까지, 작가는 담담하게 회고합니다.
집안사를 다룬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림이나 에피소드 하나하나에 작가의 애정이 담뿍 담겨있는 작품이라
완성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는데
3권 마지막 후기를 보면 작품을 그리기 시작한지 7년만에 빛을 보게 되었다고 하니
그 기간 전부를 이 작품을 그리는데 매진한 건 아니더라도
얼마나 공들여 그렸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돈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고,
돈이 되지 않는 이야기, 돈이 되지 않는 그림 등등... 돈이 되지 않는 건 무용(無用)하듯
- 1권 p27 중
이 책은 소위 '잘팔리는', 혹은 잘팔릴만한 책이 전혀 아니고
'12.7월 출간되어 2년이 넘게 지난 지금 제가 받아든 책은 역시나 '1쇄'입니다. -_-...
현대사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태백산맥>처럼 선이 굵지도 않고
화려한 수사나 미학이 없는데다
소설, 만화, 작화 등에 어느 정도 동원되기 마련인 '화장'조차 전연 없는 탓이겠지요.
심지어 검색만 하면 무한히 쏟아져나오는 리뷰조차 몇 없다는게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렇더라도 너무 무겁지도 않게, 하지만 절대 가볍지도 않게
힘을 빼고 연기하는 절정의 연기자처럼 조용조용 무덤덤하게 나열된 수사는
순수미학, 그 자체로
구한말, 일제, 냉전 및 이념, 새마을운동, 군부정권, 민주정권 등을 숨가쁘게 달려온 현대사를
이런 식으로 힘 빼고 어루만져주는 작품도 있다는 데 큰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