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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의 침묵 - 불가능한 고백, 불면의 글쓰기
김운하 지음 / 한권의책 / 2013년 11월
평점 :
불가능한 고백, 불면의 글쓰기 <릴케의 침묵>
글을 읽는 법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글쓰기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맘에 드는 문장을 읽을 때, '어떻게 이런 문체를 쓰게 되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작가들이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자신만의 색을 넣어 쓴 책들. 소설이건 에세이건 신기하게도 작가마다 가진 고유의 색깔이 있다. <릴케의 침묵>를 읽으면서 내가 느낀 작가의 이미지는 차분하고 지적이며, 말하고자 하는 것들에 대해 깊게 생각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사랑하는 형용사들이 있다. 우리말에는 다른 어떤 언어들보다 섬세한 뉘앙스를 가진 형용사와 부사들이 많다. 나는 언젠가 책을 읽다가 '하염없이'란 단어가 쓰인 한 문장에 눈물을 흘릴 뻔했다. (p.21)
하염없이. 사전에서는 시름에 싸여 멍하니 이렇다 할 만한 아무 생각이 없이,라고 풀이된다. 하염없이라는 형용사가 갑자기 애달프게 느껴졌다. 문장에 명사,형용사,동사에 대해서는 영어공부를 할때 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내가 좋아하는 형용사는 뭘까,, '고즈넉하다'
언젠가 '고즈넉'이라는 말을 듣고 마음이 차분해졌던 적이 있다. 고즈넉하다~라고 하면 고요한 안개속에 쌓인 오두막이나 정자가 연상된다. 고요하고 아늑한 느낌의 형용사. 언제들어도 귀품이 있고 점잖아지는 말인것 같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언어보다 침묵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p.23)고 작가는 말한다.
릴케의 침묵은 단순한 언어의 부재가 아니었다. 고요한 침묵 속에 침잠해 있을 때가 가장 많은 말을 하고 있는 순간이다. 릴케가 10년 동안 침묵해야만 했던 것은 글쓰기와 언어의 원칙인 침묵에 대한 진지한 헌신 때문이다. (p.94)
'단순한 언어의 부재가 아닌 침묵'. 입을 닫고 말을 안하는 것이 아니라, 입을 닫고 생각을 하는 침묵의 방법이라고 이해하게 된다. '고요한 침묵속에서 가장 많은 말을 하고 있는 순간'은 가장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순간이다. 내가 침묵하는 순간은 언제인지, 입 밖으로 말을 내뱉기에 앞서 생각하는 시간은 얼마나 되는지를 곰곰히 되짚어 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패잔병처럼, 무기력하고 절망한 채로 어둠 속에 주저앉는다. 시간은 흐르고, 새하얗게 변해버린 밤의 어둠을 응시한다.
모든 불면의 밤들은 오직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밤이다. (p.101)
패잔병처럼, 목숨을 부지한 병사처럼, 하지만 그 누구도 살아있지않은 죽은 사람들 속에서 무기력하고 절망한 채로.. 와 문장이 애석하다. 이런 문장을 쓴 작가가 참 멋져보인다. 잠들지 않은건지, 잠들지 못한건지 그 불면의 밤들 속에 깨어있는 '나'
나도 불면의 밤을 여러번 보낸 적이 있다. 올해 들어서 쉽게 잠들지 못한 날이 꽤 된다. 그때마다 그냥 끄적이듯이 쓴 글들을 나중에 읽어보니 오그라들정도로 감성적이었다.
작가가 말하는 '불면의 글쓰기'는 불면의 밤, 침묵하는 밤속에서 이뤄지는 불가능한 고백이라고 말한다.
'침묵하는 밤이 털어놓는 고백 자체가 불가능한 고백인 탓이다. 불가능한 고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그것이 바로 불면의 글쓰기다.'(p.101)
앞으로 잠 못 이루는 밤들을 소중히 여겨야겠다. 혹시 깨어있을때는 만나지 못했던 또 다른 내가 나올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릴케의 침묵>을 읽으면서 글쓰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김운하 작가가 쓴 다른 책들도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