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정면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43
김선향 지음 / 실천문학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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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정면> 김선향

’메갈리아’와 페미니즘 논쟁으로 페이스북 타임라인이 뜨거웠던 여름,
김선향의 시집 <여자의 정면>을 읽었다.

여자들

자정 무렵 AK PLAZA 주차장에서 다섯 손가락을 펴들며
취객과 흥정하는 여고생

반짝반짝 빛나도록 변기를 닦다가
고무 장갑을 낀 손으로 눈물을 훔치는 가사도우미

원고 청탁 대신 술자리 청탁을 받고
나혜석 생가터를 배회하는 등단 10년차 무명 시인

밤이면 밤마다 장안문 앞 중년나이트에 가서
부팅으로 허기를 때우는 팔등신

남편에게 폭력을 유도해 승소한 뒤
연하의 정부와 살림을 차린 촌뜨기

파키스탄 이주노동자와 위장 결혼을 해주고
오백만 원을 갈취한 뚱보

돌쟁이 딸 대신 돼지저금통을 안고 나와
고향 하이퐁에 보낼 돈을 모으는 노래방 도우미

이 시집에는 온갖 ‘여자들’이 가득하다. 단화를 신고 온종일 마트에서 일하다 계류 유산이 된 여자, 관계 후의 피를 보고 처녀인 줄 알고 좋아했던 성 매수 남자에게 그건 생리혈일 뿐이라고 말하고 뺨을 맞은 소녀, 페미니스트 모르몬교도인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는 여자, 피멍 든 팔을 붕대로 숨기고 밥상을 차리는 여자, 온종일 생닭을 토막내는 여자, 아들을 낳아 대를 잇기를 바라는 시어머니와 쥐도 새도 모르게 아기를 지우고 산부인과 지하 식당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 설렁탕을 퍼먹는 여자… 그리고 이 여자들을 바라보는 한 여자가 있다.

잠꼬대를 다 하네.
가랑이를 벌리고 누워
이-랏-샤-이-마-세-

우린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산더미 같은 배에 올라탔어. 흰밥을 배불리 먹고 돈도 번다고 했지. 후지코시 비행기 공장에 도착했네. 소금 뿌린 주먹밥 한 덩이로 하루를 견뎌야 했지. 뱃가죽이 달라붙어 허릴 펼 수 없었네. 한 푼도 주지 않았네. 그믐밤, 도망치다 헌병에게 붙들려 트럭에 태워졌네.

군인들이 달려들어 옷을 벗기기 시작했네. (어머니, 제발 도와주세요.) 두려움에 떨던 눈물만이 트럭에 고였네.


- 진창에서 피어오르는 연꽃 中

시인은 여자들을 바라본다. 듣는다. 그 여자들이 된다. 열다섯에 위안부로 끌려간 강덕경 할머니가 되고, 팽목항에서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밑에서 쓰려져 통곡하는 박은미씨가 된다.

억울하게 죽은 무명 여배우에 관한 기사에서 혀 잘린 ’여자들’을 본다.

자줏빛 연못

무명의 여배우가 입김처럼 사라졌다.

세상은 곧 잠잠해졌고
후문만이 무성했다.
피로 물든 그녀의 유서가 떠돌았다.

그들은 오늘밤에도 산해진미 앞에서
어떤 꽃의 모가지를 꺾을까
젓가락으로 뒤적거리고

그녀는 연못 바닥에
납작하게 누워있다.

헐벗은 여자들이 신음한다.
- 실직당할까봐 참았어요.
- 신고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심연은 혀 잘린 여자들의 절규로
파문이 번진다.

’은백색의, 아니아니 누런, 노파들’에서는 자식을 위해 힘겨운 세월을 살았지만 이제는 늙어 볼품 없어지고, 생계를 위해 폐지더미 리어카를 끌고 내리막길을 가는 어머니들을 처연한 시선으로 지켜본다.

다문화센터에서 여성결혼이민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시인은 한국에 온 외국 여성들에게서도 ‘여자들’을 본다. 그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더 해주고 싶어한다.

가만있자, 프엉은
하노이의 오월을 붉게 물들이는 꽃이름이 아닌가

종일 고단했는지 붉은 꽃이 깜박

때마침 함박눈이 내려서
딸 이름 설화가 바로 저 눈꽃이라고 일러준다

방안에 붉은 꽃, 흰 꽃
두 송이 시들지 않는 꽃이 활짝


- ‘붉은 꽃, 흰 꽃’ 中

시인의 눈에 이처럼 다양한 ‘여자들’이 들어 오고,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은 시인 역시 ‘여자들’과 같은 처지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그가 만난 여자들의 모습에서 자신을 보고, 현시대의 여성을 본다. 아프다 말하는 대신 그가 본 여자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준다. 개인의 아픔을 말하는 대신 ‘여자들’의 정면을 보여 준다.


<여자의 정면>을 읽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메갈리안이 옳다 그르다’, ‘페미니즘은 어떠해야 한다’ 머리로 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여성의 삶을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 아닐까. 한 명의 여성이 처한 개별적인 삶과 그 속의 상처에 공감할 수 있을 때, ‘여자들’ 전체의 삶을 바꾸는 일, 페미니즘에 대한 의식이 자연스럽게 생겨날 것이다. ’여자의 정면’을 본 사람은 달라지는 법이다.


추측하건대 김선향 시인은 ‘페미니즘’을 염두하고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자의 정면>이 훌륭한 페미니즘 책이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에 관심있는 분들께 <여자의 정면> 시집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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