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 잔
캐서린 맨스필드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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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단편소설의 매력인가. 자기소개도 없이 시작하는 이야기에, 오직 작가가 내미는 조각들만 순서대로 받아 가며, 인물을 그리고 상황을 추측해야 한다. 수많은 일상 중, 그 일부분을 떼어온 듯, 친숙하지만, 어느 부분을 떼어온 지 알 수 없어서 고개를 몇 번이나 갸웃거리며 읽어야 할 만큼 독단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낭창하고, 발랄해서 재잘거리는 사춘기 소녀들의 일상을 듣는 것처럼 자꾸만 귀를 기울이게 된다.

관계의 퍼즐을 하나하나 맞추며 작가를 쫓아가면 이야기 자체에만 집중할 수 있는 순간이 오고, 그 모습에 작가는 칭찬하듯, 깜짝 선물처럼 이야기의 마지막 조각을 쥐여준다. 시작은 명랑하고 생기발랄한 감성이었는데, 어쩌다 이런 결말이....? 잘 따라온 착한 아이에게 주는 선물 치고는 좀 많이 충격적인데, 어디서나 볼 수 없는 선물에 마음이 빼앗기는 심정이다. 충격을 받으며 마지막 조각을 끼워 넣고, 전체를 돌아보며 다시금 감탄을 내뱉었다. 오, 이것이 캐서린 맨스필드의 매력인가!

불친절한 전개 방식이 이렇게 설렐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하나부터 열까지, 미주알고주알 다 알려주는 친절한 이야기에 익숙해져 있어서, 무심하게 하나씩 툭 던져주는 이야기에 적응하긴 만만치 않았지만, 적응하는 과정마저 흥분되고, 적응하고 나니 얇은 책 두께에 야속해진다. 나 이제 이 불친절한 바다에 몸 맡길 준비를 다했는데...?

차 한 잔이 절실한 이야기이다. 내가 아니라 인물들이. 불안하고 심란한 순간, 따뜻한 온기와 포근한 향을 머금으며 심신의 안정을 찾고, 기분을 환기 시키듯. 모두에게 차 한 잔을 권해주고 싶다.

난 사람들이 여향가방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저런 내용물로 채워진 뒤에 출발해서

던져지고 떠밀리고 떨어지고 분실되었다가 발견되고,

갑자기 반쯤 비워지거나 터질 듯이 꽉꽉 채워지고,

그러다 마침내 궁극의 짐꾼이 궁극의 열차에 던져 넣으며

덜컹덜컹 실려 가는....

P. 49

하여간 난 무언가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매달리는 사람들을 질색합니다.

떠난 것은 떠난 거예요. 다 끝났습니다.

그러니까 잊어버려요! 무시해요.

혹여 위로가 필요하면, 한번 잃어버린 것은

어차피 다시 되찾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독여요.

모든 것은 늘 새롭게 변합니다.

당신 곁을 떠나는 순간 변해요.

P.55

오, 홀로 숨어서, 누구를 방해하거나 누구에게 방해받지 않고,

원하는 만큼 머루를 수 있는 곳이 없을까?

이제라도-실컷 울 수 있는 곳이 이 세상에 한 군데도 없나?

P. 176

내 삶과 일반적인 죄수의 삶이 어떻게 다릅니까?

유일한 차이는, 나는 제 발로 감옥에 들어갔고

아무도 나를 꺼내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P.220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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