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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세계를 스칠 때 - 정바비 산문집
정바비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정바비. 가을방학의 멤버. 줄리아 하츠라는 밴드도 했다고 하지만 잘 모른다. 그저 계피와 짝을 이룬 가을방학의 멤버로 처음 알았다. 곡을 잘 쓰는데 노래는 잘 못한다고 알려졌다. 악기 연주도 수준급인데 패션 센스는 좀 없다고 느껴진다. 그 정도. 딱 그 정도 알고 있는 남자 뮤지션. 그런데 그가 글을 잘 쓴다. 세상에나.
정바비의 산문집. <너의 세계를 스칠 때>을 읽다. 정바비의 원래 이름을 알았다. 굳이 여기 적고 싶지는 않지만 그 이름은 음악과는 안드로메다만큼 멀게 느껴진다는 것 정도는 말하고 싶다.
그의 책에 자주 언급되는 단어들. 사랑, 연애, 섹스. 이건 한묶음이라 하자. 리처드 도킨스는 유별나다. 에른스트 루비치는 낯설다. 비치 보이스는 반갑다. 정치, 종교 이 둘도 한묶음(싸움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일본어, 영어, 언어. 국문학도니까 그렇다고 치자.
그리고 하루키. 이 글을 읽다보면 이게 하루키 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만큼 닮아있다. 문체도 상상력도 전개도. 이건 욕이 아니다. 수준급이라는 이야기다.
읽다보면 첫장부터 끝장까지 스르륵 넘어간다. 글발이 장난이 아니다. 글쟁이로 나섰어도 대성했으리라. 특히 언어에 대한 예민함이 좋다. 한국에만 오면 푸대접을 받는 s에 대한 고찰이 돋보이는`s에 대한 예의`는 영화번역가들이 심사숙고해야할 문제를 던져준다. 유머 감각 또한 그에 못지 않게 뛰어난데 그게 대중적이지 않은 게 문제다. 유머감각을 다룬 `그들의 유머감각` 일부를 인용한다.
`교문을 나서면서 학생회보로 보이는 책자 한 권 들고 나서서 전철 안에서 쭉 끝까지 읽어보았다. 제목이 `고대문화`이고 웹사이트 제목은 komun.net이었다. 고대문화를 줄여 `고문`이라고 한 것이다.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들이란 게 느껴져서 좋았다. 안에 있는 글도 훌륭했다. 숙독한 다음 재활용함에 고이 넣었으니 언젠가 펄프로 재림하여 수많은 고대인들처럼 다시 한 번 국민 교양과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리라 믿는다.
돌이켜보면 내가 사귀었던 이 학교 출신 여학생들도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유머 감각의 소유자들이었다. 나랑 교제했다는 게 그 증거다.`
그 다운 글을 하나 고르자면 이것. 짧지만 이게 정바비의 감성의 핵심이다.
`위키디피아에 의하면, 이탈리아 북서부에 `브라`라는 이름의 마을 있다고 한다. 인구 3만이 채 안 되는, 비유하자면 A컵쯤 되는 아담한 마을인 듯하다. 언젠가 그곳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싶다.`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