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창비시선 371
유병록 지음 / 창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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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이 잘 잡힌 시의 예

- 유병록,「입술」

 

 

 

 

 

​  유병록의 시집을 재차 이야기한다. 최근에 그의 시집을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고, 읽고 나서는 할 말이 더 많아졌다. 작년 초에 유병록 시집을 처음 완독하고 났을 때에 소감을 적은 바 있다. 그 때는 시「빨강」 단 한 편을 언급하면서 해소되지 않은 아쉬움이 있었다. 이번에도 긴 시평을 쓸 자신이 없어서 시 한 편에 대한 단상을 옮겨본다.

  시「입술」​을 먼저 읽어본다.

 

 

 

입술

 

 

  하늘에서 내려온 줄을 물자 물고기의 몸이 솟구친다 비

늘에 닿는 공기의 질감, 젖은 외투를 벗는 기분

 

  육지를 가볍게 뛰어넘어 공기의 생에 닿으려던

 

  입술에서 시작한 고통이 온몸에 퍼진다 지느러미는 너무

작은 날개, 물 밖의 생을 꿈꾼 죄를 실감하고

 

  칼날이 살을 발라낸다 가시만 남은 몸으로 풀려난다

 

  물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납작하게 떠오른다 살점이 있

던 자리에 물이 또 바람이 차오른다

 

  핏물이 수면에 번지고

  한쪽 눈은 물 밖을 한쪽 눈은 물속을 응시한다 시야에서

정오의 세계와 자정의 세계가 겹친다

 

  지금은 바람으로 물의 기억을 말리고 물로 바람의 꿈을

씻어야 할 때

 

  바람의 목소리로 또 물의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입술이

떠내려간다 물의 바깥에서 바람의 외곽에서

 

 

- 시집 中

 

​  유병록 시집의 어조에는 깊은 우울과 함께 날선 비정함, 차가움이 있다. 건조한 문장들이 시가 지닌 감정선을 유지해나간다. 시가 지닌 무덤덤함에는 무게감이 실려있는데, 그것은 생과 사의 관념을 감당하고 있는 무게다. 흥미롭게도 이 무게감은 하나의 존재에 무게중심을 잡는다. 그래서 그 무게를 온전히 감당하는「두부」​같은 시는 수작이다.

  자, 이제 「입술」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이 시에는 기본적인 서사가 있다. 물고기가 미끼를 물고 지표로 올라와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다. 낚시의 장면을 포착하여 생생하게 그려냈다기 보다는, 그의 다른 시가 그러하듯 죽음에 다가가는 대상의 시적 묘사에 주력하고 있다.

 처음에 나타난 물고기의 생은 희망적이었다. 1연에서부터 물고기가 낚싯줄을 물고 수면 위로 떠오르는 ​모습이 제시된다. 이때만 해도 비늘에 닿는 공기의 질감은 젖은 외투를 벗는 듯하여 물고기는 가벼운 기분을 만끽했을 것이다. 바닷물에서 바로 공중으로 튀어오르는 몸짓은 공기의 생에 닿으려던 시도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3연. 입술에서부터 고통이 온몸에 퍼진다. 공기의 생을 누리기에는 지느러미가 너무 작은 날개다. 물고기는 물 밖의 생을 꿈꾼 죄를 그제서야 실감한다.

 4연. 외부의 고통이 본격적으로 물고기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모든 살을 빼앗기고서 가시만 남은 몸으로 풀려난다. 물고기의 육신은 이미 죽은 상태다. 몸이 물속에 버려졌는데, 육신이 죽어서 움직이거나 물속으로 가라앉을 수 없다. 가벼운 몸 탓에 납작하게 떠오르고 만다. 살점이 있던 자리에는 물과 바람이 채워진다(이러한 서술에는 육신이 사라지고 남은 허무함이 있다). 몸이 떠있는 상태에서 물고기의 한쪽 눈은 물 밖을, 한쪽 눈은 물속을 응시한다. 수면에 물 안과 밖의 세계가 맞닿아있는 것처럼, 시야에도 정오의 세계(빛)와 자정의 세계(어둠)가 겹친다.

 이제 마지막 두 연이 지금까지 잘 끌어온 시의 서사에다가 ​시적 사유를 붙인다. 두 세계가 겹쳐진 상태에서 화자는 지금이 바람으로 물의 기억을 말리고, 물로 바람의 꿈을 씻어야 할 때라고 말한다. 비유를 좀 더 파고들어보면, 바람으로 말리는 대상이 물의 기억이고 물로 씻겨주는 대상이 바람의 꿈이다. 말리고 씻기는 행위 혹은 현상의 대상이 관념인 것이다. 이 관념은 누구의 것인가. 5연에서 살점이 있던 자리에 물과 바람이 차오른다고 했다. 물과 바람은 새로이 화자의 육신을 이루는 것이고, 그 육신에 달린 기억과 꿈은 결국 화자인 물고기의 것이다.

 마지막 연에 등장한 것처럼, 바람과 물로 이루어진 화자는 바람의 목소리와 물의 목소리로 중얼거릴 수 있다. ​처음에 등장한 입술이 고통을 전파하는 통로였다면, 이번에 등장한 입술은 실체가 없는 입술이다. 물고기의 살은 칼이 모두 발라낸 이후니까. 이것은 바람과 물이 형성한 가상의 입술이다.

 육신의 완벽한 상실 말고도​, 이 입술은 남아있던 의식의 죽음을 상징하기 위해 쓰였다. 물의 기억이 마르고 바람의 꿈이 씻겨내려가야 할 때라는 것은 정신의 표백을 의미한다. 기억과 꿈 모두 사라져야 할 때라는 것이다. 중얼거림의 내용은 시적 주체의 유언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행. 입술이 바람처럼, 물처럼 떠내려간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입술은 물고기의 외피에 있다. 그러므로 '물의 바깥'이나 '바람의 외곽'과 같은 경계에서 입술은 떠내려가고 존재는 정신적 죽음까지 맞이한다. 이제서야 정오의 세계와 자정의 세계가 딱 들어맞게 되었다는 듯이. 

​ 이 시는 시집에서도 친절하게 쓰인 편에 속하지만, 유병록 시의 특징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시집 전체에서 형식의 절제가 철저히 지켜지고 있다고 느꼈는데, 이 시에서도 그런 경향성이 잘 나타난다. 불필요한 어구를 찾기 힘들고 반복이나 미사어구를 활용한 과잉의 지점이 없다. 게다가 시「입술」은 흔히 유병록 시가 지닌 장점으로 언급되는 '물성'을 잘 살리고 있다. 시인은 입술이나 살과 같은 용어를 빌어서 물고기의 육신이라는 물성을 만들어놓았다. 그 다음 바람과 물이라는 추상적인 단어를 투과시키니 광활한 자연물로만 느껴졌던 단어들의 의미가 구체적이고 직관적으로 변했다.  서사도 선명하고 대비의 효과를 위해 사용된 상징들(눈이나 세계) 또한 삶과 죽음의 대비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있어서 해석의 폭을 넓힌다. '떠내려간다'라는 술어(Fade out 같은 효과를 연상시키는)로 시를 마무리 짓는 것 또한 깔끔한데, 외려 이러한 깔끔함이 어떤 독자들에게는 흠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 유병록 시인은 첫 시집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로 작년에 김준성문학상도 수상하였다. 개인적으로도 2014년에 출간된 시집들 중에서 아주 좋은 인상을 남겼던 시집이었다. 꾸준히 조명하고 싶은 시인이다.

 

젊은 시인들을 자주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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