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구한 인연
김원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95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은 뒤에 남은 여운은 세월이 많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어떤 소설에도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장엄한 감격이었고 실제역사의 회고록이기에 사실감이 그대로 와닿았다. 김원 무순전범 관리소장의 회고를 따라 중국 현대사의 한 부분을 여행하면서 '이토록 거룩하고 기가 막히는 역사 이야기가 있을까?' 그런 느낌 그대로 받았고 중국현대사의 매력에 빠졌다. 책을 읽는 동안 보석을 발견한 듯한 황홀감이 들었다.

전범이 교화되는 과정은 완전에 가까운 인간혁명’이다.

일제 침략자들이 저지른 만행은 인류역사상 가장 극악무도했다. 무고한 백성들의 손바닥을 사슬로 꿰어 세어놓고 신병들의 창격훈련을 시키는가 하면 살아있는 사람의 뇌수를 파먹고 생체실험을 한 살인자들이다. 죽여서 없애야 마땅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180도로 교화되는 과정에서 얻은 감흥은 조금은 익숙하지만 한차원 높은 감흥이었다. 변증법의 체험속에서 낳은 희열을 어슴푸레 느껴본 적이 있기 때문일까? 하지만 내가 느낀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전범들의 변화는 변증법의 모범에 가까웠다. 전범들은 스스로 무순전범관리소를 감옥이 아닌 참된 인생을 배우는 학교로 여겼다. 관리소 직원 또한 진정한 스승 노릇에 아낌없는 정성을 쏟았다. 관리소원들은 처음에는 어려웠으나 차차 전범들을 너그롭게 대했고 전범들도 직원들의 대우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며 때때로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했다. 관리소원들의 노고가 큰 것은 사실이나 전범들이 자기 죄상을 탄백하고 스스로를 부수며 개조하는 모습은 그 무엇보다 아름답고 감격스러운 인간본연의 참모습이였고 그 장면을 넘기며 종종 눈시울이 붉어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모택동 주석으로 있던 당시 중국공산당의 인도주의 정책은 일본전범들을 단 한명도 사형에 처하지 않고 교화 개조시켜 석방시켜 고국으로 보내는데 성공했다. 참으로 위대하고 놀라운 역사의 진실이다. 그리고 중국의 격변기를 따라 관리소장과 전범들 사이의 인연은 기구하게 이어진다.

1988년에 상영한 김원 소장과 만주국의 마지막 황제 부의(그도 전범관리소의 수감자였다.)의 관계를 다룬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시나리오를 쓴 베어감독은 진실을 다르게 표현한다.

'간수와 죄수를 한 집안 식구처럼 묘사하면 다른 나라 사람들이 믿지 않을거고, 따라서 이 영화의 진실성까지도 인정해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막대한 경비를 들인 이 영화를 팔 수 없습니다.' 사실 그대로 그렸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여전히 내 마음 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영화매체에 담긴 상업성을 배제하지 못한 베어감독의 처지를 힘겹게 이해해야 하는 현실이 못내 원망스럽기도 하다.

일제가 패망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일본전범들은 자기자신의 죄상을 고백하고 뉘우치는 책을 쓰며 군국주의와 싸우는 평화운동가로 활동한다. 또 귀환자 연락회를 세우고, 그들 인생 황혼기에는 전범관리소가 있던 곳에 사죄비까지 세우는 갸륵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책장을 덮고 내내 벅찬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김원 소장을 직접 만나고 싶어져서 생사를 알아봤지만 몇 년전 별세했다는 소식에 마음이 아팠다. 기회가 된다면 사죄비를 직접 보러가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내가 사죄비 앞에 선다면 어떤 기분일까? 너무나 벅찬 나머지 사죄비를 껴안고서 통곡까지 하진 않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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