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박민규의 소설은 확실히 문제적이다. '문제적'이라 함은 김영하가 지적하듯이 그의 독특한 문체가 거느리고 있는 새로운 소설적 미학과 그의 소설 속에 내장되어 있는 예리한 시대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그의 소설은 '웃기다'라는 말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의 소설은 '절박하다'거나 '슬프다'와 같은 감정의 농도가 짙은 언어들 사이를 종횡으로 운동한다. 感動, 이라는 말, 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내 안에 있는 어떠한 것이 움직인다(動).

  이러한 움직임은, 처음에는 우주(박민규는 유독 우주라는 말을 많이 쓴다)로 탈주하고 싶은 선을 그리다가 그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지구' 즉, 우리가 발 디디고 살아가는 이 땅의 비루한 현실과의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그러한 긴장의 힘이 냉장고에 들어갔던 12억 중국인들을 카스테라로 만들고(「카스테라」) 부박한 이 시대의 가장을 '기린'의 모습으로 변모시킨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이 지루하고 지루한 '문학소음'의 시대에 박민규의 소설을 읽는 일은 그 소음들을 그 자체로 인정하면서 그 소음들 너머에서 마치 '무엇이든 빨아들이는 냉장고'(「카스테라」)처럼 우리의 뒷통수를 스스로 치는 일이다. 펑, 이거나 퐁, 이거나 그것이 어떠한 소음이든간에 박민규의 소설을 거치고 나면 그것은 하나의 소리가 된다. 음악이 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을 읽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 음악에 리듬을 탈 몸, 이면 충분하다. ‹š때로 터지는 폭소나 저릿저릿한 설움 같은 것은 소설을 접하는 당사자에게 박민규가 선사하는 환한 빛일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농업박물관 소식

                            - 우리 밀 어린싹



만일 지금 예수가 오신다면
십자가가 아니라 똥짐을 지실 것이라는
권정생 선생의 글을 읽었다


점심 먹으러 갈 때마다 지나다니는 농업박물관
앞뜰에는 원두막에 물레방아까지 돌아간다
원두막 아래 채 다섯 평도 안 되는 밭에
무언가 심어져 있어서 파랬다
우리 밀, 원산지 : 소아시아 이란 파키스탄이라고 쓴
푯말이 세워져 있었다


농업박물관 앞뜰  
나는 쪼그리고 앉아 우리 밀 어린싹을
하염없이 바라다보았다
농업박물관에 전시된 우리 밀
우리 밀, 내가 지나온 시절
똥짐 지던 그 시절이
미래가 되고 말았다
우리 밀, 아 오래 된 미래


나는 울었다


- 시집 『마음의 오지』/문학동네




  *농업박문관이라니. 몇 편의 연작시를 읽고 나서 나는 무슨 서글픔으로 대평리 너른 들판에서 허수아비보다 너 느린 동작으로 벼를 베던 할아버지의 등을 본다. 과거는, 지나간 미래, 현실의 논리가 배제하면, 그저, 배제당해야만 하는 것인가. 제 스스로 광합성을 하고 제 스스로 빛깔을 내지 못하고, 박물관 진열등 아래 있어야만 하는 것인가, 그런건가. 흙을 밟은 지가 너무 오래 되었다. 나도 그 '배제'의 대열에 동참한 것이다. 죄 짓지 않아도 죄스러운 일이 너무 많다. 문제의 시작은, '환기' 아니겠는가. 아, 시 속을 우려내고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우리 밀 어린 싹'의 발그레한 눈동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목숨 시작시인선 47
박진성 지음 / 천년의시작 / 2005년 2월
구판절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 입이 없는 것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275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라’ 혹은 사랑의 변증법

                             - 이성복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서평


                                                                              

   10년간의 긴 침묵 끝에 시인 이성복이 새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성복을 처음 접한 스무 살, 1997년 이후로 이성복은 내게 추억이었고 기억이었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부터 네 권의 시집과 한 권의 아포리즘, 그리고 문학앨범, 산문집, 시선집…… 나는 그 넓은 행간 속에서 꿈틀대고 있는 한 시인의 알 수 없는 열망 같은 것을 헤집으면서 사랑을 하고 시를 쓰고 밥을 먹었다. 서점 귀퉁이에서, 시퍼런 심장 같은 이성복 시집을 집어들었을 때, 10년이라는 물리적 시간의 아득함보다 더욱 나를 압박해오던 것은 그 추억과 기억이 현재라는 시간과 만날 때의 끔찍함이었다. 내팽개쳐버리고 싶은 충동과 아예 통째로 삼켜버리고 싶은 충동이 육박전처럼 뒹굴면서 어떤 강박으로 짓눌러왔다. 추억이, 역사로 이행되는 시간. 시인은 중년의 나이로, ‘십만 원이면 사슴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는’(117), ‘피 냄새가 입안에 그득한’ 곳에 다녀왔다. 사슴피, 어째서 또 피인가……


   이성복의 새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을 존재하게 하는 힘은 우선, ‘마라’라는 금지형 언술의 자기 모순적인 매력에서 온다. ‘~하지 마라’에서 독립한 ‘마라’는 자신만의 특유한 운동성으로 시집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그러한 운동성은 우선 ‘어디로도 갈 수 없고 어디로 가지 않을 수도 없을 때’(「사랑일기」『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의 인간 존재 방식에 대한 오랜 탐구의 결과물로 보인다. ‘마라’의 존재 조건은 욕망이다. 욕망이 강렬할수록 결핍의 밀도는 짙어지고 욕망/결핍의 강한 자성(磁性)은 ’고‘와 ’통‘사이(44) 깊은 공간을 생성한다. ’마라, 생각해보라‘(26)와 같은 모순 어법 속에서 탄생한 ’마라‘는 이후, 자체의 운동 신경과 방향 감각으로 ’다른 어떤 것들‘과의 관계 맺음으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마라‘라는 언술을 통해 시인이 노리고 있는 것은 ’나‘라는 고립된 개별자가 ’왜 여기에, 어떻게‘(27)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들이 궁극적으로 관계 맺고 있는 것들의 고통과 치욕에 대한 ’훑어냄‘의 효과이다. 여전히 지속되는 고통과 치욕의 여러 양상들은 ’마라‘의 몸을 통과해서 다른 것들로 다시 태어나기도 하지만 그것은 차라리 어떤 ’장치‘라기 보다 ’입이 없는 것들‘처럼 그 자체가 온몸으로 고통의 세계를 뚫고 나가려는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어머니‘ ’누이‘ ’아들‘, 궁극적으로는 ’당신‘이라 말할 수 있는 것들과의 소통을 위해 시인 스스로 ’몸 버리려 몸부림‘(30)하며 뛰어 들어간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마라’의 모습은 ‘제 몸 일부가 아니라 제 몸 통째로/쑤셔 넣어야 직성 풀릴 환장할 것들’(103)처럼 온 몸으로 진행되며 ‘비는 길바닥에 윤활유 들이부은 듯/아스팔트 검은빛을 더욱 검게’(106)하는 자기확인의 모습에 다다른다. ‘벽은 제/상처를 보여주지만 제가 가린 것은 완강히/ 보여주지 않는’(100)것처럼 ‘마라’는 ‘입’을 봉쇄하고 철저히 자기 몸의 운동으로 고통의 한 복판을 뚫고 나가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마라, 어떻게

      네 붉은 댕기가 처음 나타났는지

      그냥 침 한번 삼키듯이,

      헛기침 한번 하듯이 네겐

      쉬운 일이었던가 마라,

      내게 어렵지 않은 시절은 없었다

      배반 아닌 사랑은 없었다

      솟구치는 것은 토하는 것이었다

      마라, 나를 사랑하지 마라

 

                              - 「26 어떻게 꽃은 잎과 섞여」부분


   이 시에서 보이듯 ‘마라’는 우선 독립된 형태로 나타난다. 자유분방한 운동성이라고 할만큼, 시 곳곳에서 출몰하여 ‘마라’ 특유의 경쾌함으로 시를 이끌어 가는 동시에 ‘마라, 나를 사랑하지 마라’에서처럼 강조의 효과를 누리고 있다. ‘배반 아닌 사랑은 없었다’의 진술 뒤에 따라오는 ‘나를 사랑하지 마라’라는 언술은 그것의 지시적 맥락과는 전혀 반대로 ‘사랑해라’와 같은 강한 긍정의 의미를 내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마라’는 ‘욕망’과 ‘결핍’의 이항대립적 구도를 허물어뜨리는 동시에 그 경계지점을 ‘사랑’이라는 시인의 오랜 시적 탐구대상으로 보듬어주는 역할을 한다. ‘아, 내게 남은 사랑이 있다면/ 한밤에 네게로 몰려드는 갈치떼,/ 갈치떼 은빛 지느러미,/ 마라, 네가 왜, 어떻게 여기에’에서의 ‘내게 남은 사랑’에 닿아 있는 것이 ‘마라’의 몸이다. 이러한 ‘마라’의 몸은 ‘마라, 네 눈 속에 내가 뛴다’(28)에서처럼 ‘타자’와의 소통을 욕망한다. 이러한 사랑의 모습은 ‘양가성’을 그 특징으로 하는데 ‘내 부리가 네 눈 마구 파먹어도/ 난 그러고 싶지 않아, 마라’의 파괴에 대한 욕망과 ‘꽃들, 마라, 눈을 떠라, 지금 네가 내/ 얼굴을 보지 않으면 난 시들고 말 거야’(30)의 소통에 대한 욕망을 동시에 품고 있다. 이러한 사랑의 양가성은 ‘마라’의 양가성이기도 한데 ‘마라’는 ‘동곡’이라는 지명을 통해 완성된다. 시인은 직설적 어법으로 ‘동곡엔 가지 마라’라고 한다. ‘가지 마라, 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가지 마라, 다시는 당신 못 돌아온다’는 것이 시인의 전언이다. 시인 강정의 지적에 따르면 ‘마라’는 ‘금지’이면서 동시에 ‘유혹’을 환기시키는 데, 이 ‘동곡’이라는 공간에 닿아서 ‘마라’는 유혹의 영역을 넘어서, 그 유혹 속에서 발견한 ‘사랑의 세계’를 보여준다. 금지/유혹의 대립적 구도를 뭉개 버리는 것이 ‘마라’의 궁극적 존재 이유이고 이 대립적 구도의 와해 이후에 찾아오는 것이 바로 변증법으로서의 ‘사랑의 세계’이다. 이러한 ‘사랑의 세계’의 깊이는 이성복 시가 획득하고 있는 서정의 깊이라 할 수 있겠다.  

         

     석쇠 엎어놓은 듯 갈라터진 촌로들의

     손등이여 상하고 껍데기 까져도 의연한

     국숫집 상다리여 상다리 사이사이

     꼬부라진 陰毛 몇 개가 만드는 상징적

     지도여 온몸이 슬퍼서 아플 데가 없는

     무척추 동물의 한가로움이여 기억의

     패총이여 패총에서 솟아오른 대숲이여

     늘어진 돼지 불알의 힘없는 주름처럼

     잔잔하고 그윽한 동곡의 저녁이여,

    

                                      - 「112 석쇠 엎어놓은 듯」 부분


   이성복이 보여주는 ‘동곡’이라는 곳의 풍경이다. 시인의 눈길은 ‘석쇠 엎어놓은 듯 갈라터진 촌로들의/ 손등’ 같은 것에 닿아있는데, 이러한 이미지는 이성복의 시가 추구해온 ‘사랑의 세계’와의 강력한 친연성을 드러낸다. 그것은 이성복이 초기 시부터 지속적으로 추구해 온 ‘고통 혹은 아픔’을 통한 사랑의 발견, 이라는 작업이라 명명할 수 있겠다. 네 권의 시집에서 발췌한 다음과 같은 부분들은 ‘동곡’으로 상징되는, 사랑의 세계에 닿기 위한 시인의 고투의 흔적을 보여주는데, 궁극적으로 ‘타자’에 대한 응시의 모습이 이러한 사랑의 세계를 작동하는 근본적인 힘이다.   


   아들아 詩를 쓰면서 나는 사랑을 배웠다 폭력이 없는 나라,/ 그곳에 조금씩 다가갔다 폭력이 없는 나라, 머리카락에/ 머리카락 눕듯 사람들 어울리는 곳, 아들아 네 마음 속이었다/(…중략…)/찔리고 나서도 피를 부르지 마라 아들아 길게 찔리고 피 안 흘리는 순간,/ 고요한 詩, 고요한 사랑을 네게 준다 받아라


               -「아들에게」부분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오래 고통 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토록 피해다녔던 치욕이 뻑뻑한,/ 뻑뻑한 사랑이었음을//소리없이 돌아온 부끄러운 이들의 손을 잡고/ 맞대인 이마에서 이는 따스한 불,// 오래 고통받는 이여/ 내 가슴의 얼마간을/ 나는 덥힐 수 있으리라


              -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부분 (『남해 금산』)


    내 사랑하는 것이 때로는 역겨워/ 얼어붙은 거리로 나서면/ 엿판 앞에 서 있는 엄마의 등에/ 버짐꽃 핀 아이가 곤히 잠들어 있었어요


            - 「거리」부분 (『그 여름의 끝』)


    팔순이 넘은 고모님 팔을 다쳐 오래 고생하신다기에 경로당에 찾아갔더니 고모님은 그 옛날 원생댄지 시생댄지 그런 까마득한 시절 괴상한 이름의 공룡의 다리 같은 팔을 보이시며 그냥 앉으라고 했다 그 어떤 슬픔도 연민도 앉을 자리가 없는 고모의 둥둥 퉁퉁 부어오른 팔은 오래 된 비닐 껍질처럼 허물이 벗겨지고 귀지 같은 딱지가 더덕더덕 붙어 있어 내 어릴 때 친정 왔던 원골 김실이의 팔이 아니라, 어느 날 느닷없이 쳐들어와 고모의 어깨 위에 들러붙은 괴물의 뒷다리 그래도 그것이 아직은 주인의 말을 알아들어 화투장을 제끼고 십원짜리 동전으로 잔금을 치르기도 하였다 과자나 사드시라고 만원짜리 한 장을 쥐어드리면 잠긴 밥알처럼 희미한 웃음을 고모의 눈곱 낀 눈은 웃었다

         - 「고모」전문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몇 편의 시로 한 시인의 시 세계를 갈무리하는 것만큼 부질없는 일도 없겠지만, 위의 시편에서 드러나듯 이성복이 20년 넘게 탐구해온 대상들은 어딘가 아픈 것들, ‘고’와 ‘통’ 사이에서 ‘입이 없이’ 신음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고통들에 대응하는 파괴적 자기 부정에서 출발한 이성복의 시적 관심사는 ‘어머니’로 상징되는 ‘치욕’의 세계를 통과하여 ‘동곡’이라는 ‘대자적 사랑’의 세계에 도달한다. 개별적 운동성을 획득한 ‘마라’가 ‘가지 마라, 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가지 마라, 다시는 당신 못 돌아온다’와 같은 직접적인 대(對)타자적 발언과 함께 온전히 자신의 모습을 획득한다. 이러한 사랑의 세계는 ‘하늘색 작업복이 피로 물들 때까지/ 죽도록 얻어맞’으면서도 ‘더 때려달라고, 아예/ 패 죽여달라고 매달렸’던(123) 시인이 혹독한 자기 부정과 갱신을 통해 획득한 공간이다. ‘찌르기 전에 한 번 더 깊이 찔’리고 ‘찔리고 나서도 피를 부르지’ 않는 세계, ‘고요한 詩, 고요한 사랑’(「아들에게」(『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의 세계가 확장된 형태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한 사랑의 세계는 관념에 의해 인식되는 공간이 아니라 시인 스스로 ‘마라’의 몸이 되어 돌파해온, ‘오줌 눈 뒤처럼 몸 부르르’(84) 떨며 통과해 나온 세계이다.

   이러한 사랑의 세계는 ‘대자적 고통을 통한 시적 실천’을 통해서 가능하다. 이러한 시적 실천은 ‘아버지의 뺨에,/ 거기까지 따라온 파리’(88)에 대한 응시를 통해 아버지와의 화해를 모색하는 동시에 ‘회음부로 앉아’ ‘어두워’지는, ‘살아가는 징역의 슬픔으로 가득한’(51) 식물성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잔치 끝나면 한 보름/호되게 앓아 눕는 여인네’(53)에 대한 응시는 ‘저 꽃들에게도 잔치를 열어주어야겠다는’ 사랑의 확인을 가능하게 하고 ‘오직 스스로를 항복받지 못했기에, 세세 영원토록 제 괴로움 홀로 누리는 산’의 지난(至難)한 자기 사랑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라’는 배제와 억압이라는 자신의 사슬을 해체하고, 이성복에 의해 사랑의 세계로 안착하게 되는 것이다. ‘피를 부르는’ ‘마라’가 어떻게 자신의 몸을 바꿨는가, 보아라, 벚꽃 잎의 지독한 사랑의 세계를……



    그렇게 작은 벚꽃 잎 때문에 시멘트

    보도블록이 아플 줄 알게 되었다

    저 빗물 따라 흘러가봤으면,

    비 그치고 햇빛 날 때까지 작은

    벚꽃 잎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고운 상처를 알게 된 보도블록에서

    낮은 신음 소리 새어나올 때까지


                                  - 「59 그렇게 속삭이다가」부분 (굵은 부분; 인용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름 오르다 - 이성복 사진에세이
이성복 글, 고남수 사진 / 현대문학 / 200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편안한 흥분감, 오름 오르다
 
  오랫동안 읽어온 시인의 산문을 더듬어 보는 일은 시라는 장르 자체가 지니고 있는 애매성을 조금은 밀어낸 채로 시인의 내밀한 세계를 훔쳐볼 수 있다는데서 그 매력을 찾을 수 있겠다. 이성복의 사진에세이 『오름 오르다』는 사진작가 고남수의 제주 ‘오름’에 대한 시인 자신의 감상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그 안에는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 2003),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열림원, 2004) 등 최근의 시집에서 보여준 그의 시적 세계의 연속무늬가 새겨져 있다.
  시인은 ‘오름’이라는 대상물을 언어로 어루만지면서 그가 오랫동안 변주해온 것들, 가령 고통이라든가 치욕과 같은 남루한 삶을 예리한 시선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평화가 있는 곳 어딘가에는 희생이 숨어 있다. 비유컨대 앞으로 떨어지는 공을 몸을 밀어넣어 잡아내는 야구선수처럼, 높은 데서 떨어지는 아이를 온몸으로 받아안아 뼈가 으스러지는 엄마처럼, 희생은 넘어지는 것과 함께 넘어지는 것이며 무너지는 것과 함께 무너지는 것이다. 만약 화면 오른편으로 뒤의 오름이 쏠려내려오는 순간, 평탄한 앞의 오름이 함께 무너지지 않는다면 이 화면은 얼마나 단조롭고 쓸쓸할 것인가. 사실 앞의 오름은 뒤의 오름이 쏠려내려오기 전부터, 즉 솟구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이미 받아안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p.74)
 
  고통과 아름다움은 환상의 배를 찢고 나온 일란성 쌍둥이라 할 만하다. 환상에게서 태어난 그것들은 다시 제 배로 환상을 낳기도 해서, 고통이 낳은 환상과 아름다움이 낳은 환상이 결합하여 또 다른 고통과 아름다움을 낳는 것이다. 그러니 지상의 짧은 삶에서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자는 결코 고통과 헤어질 수 없다. (p.117)
 
  산문집에 실린 사진들은 모두 흑백사진이어서 그 형체가 뚜렷하지 않다. 시인이 바라보는 것은 ‘사물의 표면을 편애함으로써 심층을 은폐하는 빛’(p.73)을 배제한 상태의  사물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사물성’과 그 사물성이 인간의 여럿 감정의 국면들과 길항하고 조우하는 순간에 대한 인식들이다. 이를테면 흑백의 사진들 속에서 고통의 ‘원액’ 같은 것을 추출해서 그것을 언어로 세심하게 다듬는 것이 이번 산문집의 주된 작업이라 할 수 있겠다. 이성복이 주목하고 있는 삶의 국면은, 가령,
  
  저 물컹거리는 화면 속의 오름들은 퍼질러누워 봉긋한 배와 처진 가슴을 드러내놓고 잠자는 중년여인을 생각나게 한다. (……) 차라리 슬픔은 늘어진 귓바퀴의 방만하고 대책 없는 곡선에서 오는 것이며, 그러한 곡선으로 돋아난 귀는 지금 화면의 퍼져 누운 오름처럼 결코 빳빳하게 세워질 수가 없다. (pp.52~54)
 
  와 같은, 저간의 세속인의 삶에 묻은 고통들인데, 이러한 낮은 목소리의 슬픔들은 이성복의 세심한 언어를 통해서 새로운 풍경으로 태어난다. 그것은 언어를 통한 세공이나 가공이 아니라, 차라리 사물의 속내까지 비집고 들어가 그 사물의 몸체가 되어서 겪는 아픔이랄 수 있겠다. 이성복이 초기 시부터 주목해 온, 삶의 경보장치로서의  ‘아픔’이 제주 오름의 자연을 통해서 전경화되는 양상은, 어떤 경지에 다다른 樂士의 모나지 않은 손가락처럼 섬세하고 유연한 몸놀림으로 고통의 세세한 결을 어루만져준다. ‘참으로 고운 것들은/ 고운데 미친 것들이다’(「너는 잘 잔다」, 『아, 입이 없는 것들』)라는 시인의 진술처럼, 오름을 통해서 인간을 들여다보는 그 눈길은 고통-치욕을 통과해낸 한 인간으로서의 이성복의, 자연 그대로의 굴곡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듯 하다.
 
  ‘그러므로 두 개의 오름이 소리 없이 어깨를 맞댄 흑백의 화면처럼 생은 가난하다. 도대체 아랫도리를 가릴 수 없을 만큼 가난하다’(p.174)와 같은 통찰은 이성복 문학이 지니고 있는 맹독성이 어느덧 그 자신이 말하듯 ‘가난의 범 친족적 연대’의 따스함까지 거느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따스함이라는 것은 시인 자신이 인용한 에밀리 디킨슨의 ‘허나 사랑은 피곤해지면 잠자야 하는 것/ 또 굶주리면 먹어야 하는 것’(『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의 언술처럼 生의 양가성을 놓치지 않는 긴장감을유지한 촉감으로 다가온다. 책을 읽는 내내, 동공이 글자를 훑는 것이 아니라 글자가 동공을 어루만져준다는 느낌이 전해져 온 것은, 이러한 ‘어쩔 수 없는 따스함’의 ‘편안한 흥분감’이 산문집 전체에 산재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