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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37년의 고독
노무라 아쓰시 지음, 김소운 옮김 / 큰결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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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고흐의 삶과 그의 작품들 그리고 그가 동생 테오와 주고받은 편지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러한 흔적들 곳곳에 배어있는 그의 예술혼은 내게 언제나 별자리와 같은 움직임으로 내 안에서 꿈틀거린다. 그 별자리는 안온한 동시에 소용돌이치며 잔뜩 고요를 품은 채 전율한다. 내게 고흐라는 텍스트를 읽는 일은 삶의 무늬를 어루만지는 일이다. 마음이 유난히 진창이었던 지난 여름과 가을, 나는 병동에서, 나무 벤치에서, 호숫가에서, 한 일본인 영문학자가 쓴 고흐 관련 서적을 몇 번이고 되새김질 했다. ‘고흐가 되어 고흐의 길을 가다’라는 부제가 붙은 『고흐, 37년의 고독』(큰결, 2004)을 읽는 맛은 무엇보다도 저자 노무라 아쓰시의, 고흐에 대한 집요한 추적을 엿보는 맛에 있다. 일종의 기행수필이랄수도 있는 이 책은 고흐가 그의 37년의 삶 동안 머물렀던 공간을 추적하며 그 공간들에 고흐가 살았던 당대의 시간을 아로새김으로써 인간 고흐를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고흐 자신이 원해서 입원했던 정신병원은 동북 방향으로 25킬로미터쯤 떨어진 생레미 드 프로방스에 있다. 나는 아를을 방문한 이튿날 생레미로 차를 몰았다. (p.248)
이러한 식으로 필자는, 꽤 오랫동안의 시간으로 여겨지는 ‘고흐 추적’을 통해, 여러 가지 낭설이 있는 사건들, 가령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른 일이라든가 오베르에서의 권총 자살과 같은 일들을 상당히 객관적으로 규명해낸다.
아무리 발작이 일어난다고 해도 평정을 되찾으면 제작할 수 있으리란 희망이 있기에 고흐는 간신히 이승에서 목숨을 부지해 왔던 것이다. 테오의 집에서 그는 냉정히 판단했다. ‘이쯤이 한계야. 병을 앓으며 붓을 들어올릴 수 있는 정도로 만족해야 할 바엔 차라리 내가 먼저 붓을 꺾어 버리겠어’라고. 복잡하게 얽힌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을 그렇게 파리에서 명쾌하게 간파한 그는 순간적으로 권총을 구입하기로 결심하고……(p.299)(굵은 부분 : 인용자)
객관적이고 면밀한 추적이 뭉클한 가슴으로 전해져 오는 것은 화가 고흐를 사랑했던 노무라 아쓰시의 극진하고 집요한 추적이 파문처럼 일어나는, 곳곳의 고흐의 예술혼에 대한 진단들이다. 고흐에 관련된 많은 텍스트 중에 이토록 깊은 애정이 묻어나는 글이 또 있을까. 책 곳곳에 산재해있는, 고흐가 그림으로 그렸던(가령, 오베르의 교회와 같은) 공간을 현재의 사진으로 되새김질 하는 여유를 필자는 더불어 제공한다. 필자의 붓끝이나 렌즈 망막에 매달려있는 깊은 예술혼이 오랫동안 가슴에 남는 책이다.
오후에 발작, 지금은 비가 내리고 있다 간호사들은 대체로 친절하지만 캔버스를 자꾸만 치운다 팔레트와 물감도 훔쳐간다 도대체 그림 그리는 일 말고 내게 무엇을 바라는 건지 튜브를 먹으면서 빨간색 물감만 집요하게 빨았다 입술에 묻은 물감은 피처럼 내장으로 번지고 내 영혼이 측백나무처럼 통째로 하늘로 올라갈 것만 같았다 저 나무의 뿌리라든가 보이지 않는 물관을 팽팽하게 부풀려주는 일 그림을 그리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다 떠오르고 싶은 자 떠오르게 하라 죽음으로도 별에 닿을 수 없다면 내 영혼에 구멍을 내어주마 구멍 틈새로 별빛이 빛날 테고 너는 놀라서 이곳으로 달려오겠지만, 침대 밑에서 자고 싶은 자 침대 밑에서 자게 하라 어느 날 내가 이곳에서 벌레처럼 침대 밑을 기어다니더라도 그것은, 테오야 낮은 곳을 그리기 위해 내 영혼을 대어보는 거란다 누군가 나를 죽이려 하고 있어 새벽에 몰래 그림 그리는 데 빗방울 사이 권총이 쇠창살로 들어오고 있었어 창문 틈으로 소용돌이치는 측백나무의 흔들림이 들린다 저 나무도 나처럼 발작, 하고 싶은 거겠지만 나도 안다 이 비 그치고 난 후에 맺혀 있을 이파리마다 맑은 물방울들. 캔버스 안에서, 낯선 사내가 나를 보고 있다 측백나무 속이란다, 테오야…
- 졸시, 「발작 이후, 테오에게 - 생레미 요양원에서」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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