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ㅣ 창비시선 211
이면우 지음 / 창비 / 2001년 10월
평점 :
'몸'의 역사 - 이면우 시집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에 부쳐
詩는, 거칠게 말하자면, 대상이나 사물에 기대어서 세상을 읽는 일이다. 여기에서 세상을 '읽는다' 함은 텍스트 자체로서의 의미도 중요하겠지만, 시속에서 시인이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법과 그 관계맺음의 지난(至難)한 흔적들의 기록이다. 이면우의 시들은 대체로 이 관계가 '몸'에 의해 맺어진다. 몸의 기억, 몸의 역사, 곧 추억으로서의 몸 그 자체가 이면우 시 전반을 아우르는 중심항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한 몸의 기억은 삶에 있어서의 중요한 국면들과 '직접적으로' 조우한다. 시인은 '왕벚나무 아래 젊은 남녀 공부하러 오가는 길/ 나는 손공구 쥐고 일 다녔다'(「쓸쓸한 길」)라고 추억한다. 이 '쓸쓸한 길'에는 '보일러 스위치 넣고' 펼쳐보는 '책 겉장 갈아댄' '박용래시전집'이 있다. 이면우의 시편들이 이러한 '몸'에 의한 기록이라는 것은 시의 관념성과 추상성을 자연스럽게 제거해내는 그만의 독특한 시작법을 만들어낸다. '거미'에 대한 관찰 속에서 그는 '채 해결 안된 사람의 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거미」) 중년 남자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며, '남자가 일할 수 없다면 목련꽃 펴도 봄은 온 게 아니라는 거다'「목련 유감」)과 같은 독특한 세계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그것은 거의 生來的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일'에 대한 건강하고 살아있는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앞에서 '몸'을 얘기했지만, 그 '몸' 속에는 바로 '일'이 그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시인은 '일'을 통해서 세계를 인식하고 그 세계 속에서의 자신을 인식한다. '일'에 의한 세계 인식은, 바로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이 땅이, '부정되어야 할 어떤 것' 혹은 '수긍하며 살아야하는 불가항력'의 단순한 이항대립을 넘어서 존재한다. 이러한 인식은 몸과 세계가 한치의 틈도 없이 하나의 '전체'로서 진행하는 동력으로 이면우의 시를 추진해나간다. '보일러 새벽 가동중 화염투시구로 연소실을 보'며 시인은 '고맙다 저 불길, 참 오래 날 먹여 살렸다 밥, 돼지고기, 공납금이/ 다 저기서 나왔다'라고 회상한다. 이러한 회상은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지만 '일'과 그 일을 하는 '몸'이 돌파해나가는 삶의 양상은, '불길과 여자는 함께 뜨겁고 서늘하다 나는 나지막이/ 말을 건넨다 그래, 지금처럼 나와/ 가족을 지켜다오 때가 되면// 육신을 들어 네게 바치겠다'(「화엄 경배」)와 같은 결연한 삶의 의지로 그 추억을 끌어올린다. 몸에 의한 기록이, 몸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몸 밖으로, '몸'이 존재하는 세상 속으로 적극적으로 투입되는 것이다. 이 '열려 있음'의 세계인식은 '자아'와 '세계' 간의 어떠한 틈입도 허락하지 않는데, 이면우의 시 안에서 그것은 농익은 삶의 긍정으로 ['가져갈 게 없으니 우리집엔 도둑이 오지 않는다고 말해주자/ 아이 눈 둥그래지며, 엄마가 계시잖아요 한다'(「봄밤」)] 삶 혹은 시에 대한 단단한 자기 확인으로 ['나는 여기서 꼼짝없이 낡아가며 새로워지는 중이다'(「대전」)] 확장되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무수히 발표되는 많은 시들 속에서, 김수영의 산문집을 다시 꺼내 읽는다. '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것이다.' (김수영,「詩여, 침을 뱉어라」) 종국에 詩가 가 닿아야 할 곳은 어떤 '절실함'일 것이다. 난해시가 되었든 리얼리즘의 시가 되었든 무의미시가 되었든, 그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그 '절실함'이 끌어안는 삶의 뜨거운 모습을 우리는 이면우의 시에서 볼 수 있다. 어쩌면 그는, 그 자신이 보일러가 되어서 이 세상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