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린 1
김지하 지음 / 솔출판사 / 1995년 1월
평점 :
절판


 김지하 그는 누구인가? 시인에 대해서 우리는 수없이 판단하고 평가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떤이들은 분노한다.

 시인은 70년대 한국 민중문학의 하나의 지침이었다.  '오적'은 70년대 한국의 그 처절한 역사적 질곡 속에서 손에서 손으로 이어져 읽혀지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아픔을 승화시키는 하나의 공간으로서 작용했다.

 그러나 시인의 변모는 그를 지침으로 삼고 있던 많은 이들을 당혹하게 한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대상을 평가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일은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고 시인은 왜 친다. 아 한편으로는 그 처절한 죽음을 어떻게 단순히 걷어치우라고 외칠수 있는냐고 우리는 반문한다.

 시인의 변모를 우리는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함부로 변절자로서 매도할 수 있는가? 진정 죽임의 삶속에서 그가 외치는 '살림'의 사상들을 함부로 평가해버릴 수 있는가?

 현재의 우리삶은 진정 '죽임'의 연속의 장이다. 이런 공간속에서 우리가 그 죽임을 다른 죽임의 방법으로 대항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단순한 단정을 내리기는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현대의 삶의 모습들을 직시할때 우리는 다시 한번 그의 사상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어떤 기준과 목표가 사라진 이 시대 속에서, 특히 자본의 논리속에 매몰되어 가는 우리들에게 있어 그이 '살림'과 '생명'의 사상은 또 하나의 지침이 될수 있지 않을까?

 시집 '애린'은 다음과 같이 정의 한다. '모든 죽어가는 곳에서 다시 태어나는 그 애린' 그렇다. 현재의 모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 그 죽임속에서 다시 생성되는 '애린' 그것은 현실의 도피가 아닐 것이다.

 현실에 대한 처절한 긍정속에서 순간순간 다시 태어나는 '애린'의 모습은 이 처절한 죽임, 특히 그 '죽임'이 우리가 모르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순간에서 다시한번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생각의 장을 열어주는 것은 아닌가?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외치던 공간을 넘어서서, 그 모든것이 무의미해저가는 이 순간에 삶의 구석구석, 아니 개인의 구석구석에 알게 모르게 퍼져있는 '죽임'의 상황을 우리는 어쩌면 '애린'의 그 아름다운 모습, 어쩌면 더욱 더 처절할지 모르는 '애린'의 삶의 모습을 직시해야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모든 것의 죽음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모습은 더욱 힘들지 모른다. 그래서 시인은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우라'고 외쳤는지도 모르겠다.

 

 '김지하'  이 역사속에서 우리는 아직까지 그를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단지 그의 삶의 모습들을 지켜보고 있다는것, 그리고 여전히 그는 한 '시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의 모습에 대한 평가는 조금은 조금은...시간을 두고..행해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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