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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평점 :
이 소설은 소중한 누군가를 잃어버리고 혼란을 겪는 사람들의 만남과 또 다른 이별 속에서 그들의 심정을 섬세하면서도 자극적이게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 와타나베와 기즈키는 깊은 친구사이다. 와타나베에게 있어 기즈키는 세상과 그를 연결시키는 유일한 고리였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17살의 어느 날 와타나베는 기즈키의 갑작스런 자살하는 사건을 마주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갖는다. 세상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세상과 자신 사이의 비틀림에 혼란스러워 하고 죽음이 삶의 일부였음을 똑바로 봐야 했던 그는 사물과 자신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둠으로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몇 년에 걸쳐 점점 현실성을 잃어가던 그의 생활에 기즈키의 옛 애인이자 와타나베와 닮은꼴인 나오코가 나타난다. 그 둘은 사랑과 동질감, 비슷하고도 무질서한 감정들을 서로에게 느끼지만 얼마 못가 나오코가 요양소에 내려가게 되어 짧은 이별을 맞는다.
나오코는 요양소에서 와타나베에게 다만 자신을 다시 찾아주기를, 그녀를 기억해주기만을 당부하고 자살한다. 와타나베에게는 이미 미도리라는 세상과의 연결 고리가 생겼지만 나오코를 잃는 또 한 번의 상실은 어떤 진리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와타나베는 서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여행을 떠난다.
p.413 “어떠한 진리도 어떠한 성실함도 어떠한 강함도 어떠한 부드러움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마치 기즈키가 죽고 나서 익숙했던 거리에서 도망치듯 떠난 것처럼, 그러나 상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통째로 받아들이기 위해 그는 내부의 혼란과 슬픔을 표출한다.
p. 226 "낯선 곳에 가면 사람들은 모두 낯설게 보이는 거야"
p. 441 "그러나 그 곳이 어딘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데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계속 미도리를 부르고 있었다."
망각은 만남이 시작되면 그 끝을 위해 마취제처럼 안배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슴 떨리는 만남이 관계로 이어지고 그에게 열중하다가 문득 이별을 맞는다면 자신의 한 부분을 잃게 되는 것이다. 상실, 그 비중이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아픔이 따르고 만남처럼 그 결말도 인내해야한다. 또 다른 만남과 관계를 위해 열정적이던 사랑도 겪어야했던 아픔도 잊어야 할 필요가 생긴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망각하게 되는 것이다. 생김새부터 자신이 그에게 품은 감정들까지. 나오코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랑했던 와타나베에게 자신이 잊혀져가는 언젠가를 내다보면서 그래도 말한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더더욱 와타나베가 슬픔에 자신을 깊이 담그고 상실 속에 완전히 빠져드는 것이 아름다운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이별은 추억이기 이전에 상실이기에 사랑했다면 아파하고 슬퍼야 마땅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