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란 아이들의 전유물이라고만 여겼다. 코흘리개 아이들이 심심풀이로 읽거나 그들에게 교훈을 주고 감화시킬 목적으로만 쓰여지는 유치한 읽을거리로만 여겼다. 하지만 '마당을 나온 암탉'은 달랐다. 초등학생이 읽은 감상, 중 고등학생이 읽은 감상, 대학생인 내가 읽은 감상이 모두 다를 정도로 참으로 다양 메시지를 전해주는 작품이었다. 주인공인 한 마리의 암탉 잎싹 드라마틱한 일대기는 그만큼 극적이고 강렬하다.잎싹은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붙인다. '향기로운 꽃을 피워내는 잎사귀'처럼 자신도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이름을 명명하는 것은 김춘수의 '꽃'에서 보여 지는 것처럼 존재의 의미부여와 일맥상통 한다. 이름을 붙임으로써 '나'는 비로소 의미있는 존재가 되고 세상의 수많은 존재와는 다른 내가 된다.스스로 이름을 지은 잎싹은 알을 품어 새끼를 키우는 일을 갈구한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이러한 행위가 여성의 성역할을 고착화시키는 일로 비쳐질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자아실현 방법은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견지에서 보자면 그리 문제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간에 잎싹은 우여곡절 끝에 얻은 알을 정성스레 품어 부화시키고 초록머리를 훌륭하게 키운다.자신과 달리 꽥꽥거릴 수밖에 없는 초록머리를 그 어떤 친어머니보다 극진한 사랑으로 감쌀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초록머리를 자유롭게 그들의 세상으로 돌려 보낸다. 그리고 자신은 아들을 위해 족제비의 빈 배를 채워준다. 남을 위한 희생, 그 관계가 어머니와 아들이든 친구 사이든 간에, 인간의 삶에서 아니 생명이 있는 존재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 아닐까?잎싹의 삶은 아들을 위한 희생으로 점철되지만 그것은 자신을 위한 삶이기도 하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 목숨 걸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인간의 삶을 가장 보람되게 하는 것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잎싹의 삶이 건네주는 감동은 결코 작지 않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로 삶을 바꾸어 '나'를 찾았기 때문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