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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1 - 정조 시대를 읽는 18가지 시선
이덕일 지음 / 고즈윈 / 2008년 2월
평점 :
우연히 드라마 이산을 보면서 정조 임금과 그 시대적 배경이 궁금해졌고 몰입의 즐거움이 커지면서 정조의 매니아가 되고 싶은 갈증이 높아져 가던 터, 정조에 관한 두터운 책을 만났다.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1,2>가 그것이다. 더욱이 <사도세자의 고백>, <조선왕 독살사건>을 이미 읽었던 터라, 저자 이덕일 선생의 예리한 역사의 진실에 관한 대화의 장에 스스럼없이 끼고 싶은 심정이었다.
역사는 내게 있어 마치 공룡 화석을 발굴해서 뼈대를 만들어가는 상상력에 달린 문제라고 본다. 역사를 처음 접한 건 암기과목에 치중된 한심한 학교 교육이었지만, 역사에 관한 여러 책을 읽어가면서 마치 잊어버렸던 퍼즐을 하나 둘씩 맞추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은 더욱 그런 느낌이 강했고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단편적인 지식들을 하나의 완성된 퍼즐로 끼어 맞추는 지적 호기심의 충족에 있어서 배가 불렀으며 만약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하는 역사적 가정이 더욱 절실히 아쉽고 쓰라린 아픔이 되었다.
몇 일을 굶주린채 밥을 대하는 걸인의 심정으로 이 책은 내게 묘한 흡입력을 선사했다.
또한, 드라마 이산을 보지 못했다면 머리속으로 상상하는 요란한 맛도 조금은 시들해 졌을지도 모르겠다. 만일 드라마 이산의 매니아라면 항시 다음 편이 몹시 궁금할 것이고 따라서 이 책을 읽으면 목마른 갈증 해소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무릎을 칠 것이다.
드라마를 거론하는 이유는 정조를 둘러싼 노론과 소론, 남인의 당쟁의 배경지식을 대략 습득할수 있고 김귀주, 홍인한, 홍국영, 정후겸 등의 카리스마 넘치는 캐릭터의 실감나는 연기가 한층 이 책을 읽는 플러스 알파가 될수 있으리란 생각에서다.
책을 읽다 보면 성리학의 폐단과 실학의 사상을 중시한 정조의 카리스마 넘치는 배경에 집중하지만, 사실 조선을 세운 개혁 초기에는 불교 대신 성리학이 통치 이념으로 들어선 배경은 고려 말 시대적으로 어지러운 사회 질서를 바로 잡는데 불교를 비판할수 있었던 강력한 무기였기 때문이었다.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 것을 강조한 불교보다 사람과의 관계를 충실히 생각했던 유교였기에 성리학은 조선 초기 건국 이념을 든든히 하는데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리학적 예학사상과 명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사대주의의 기세는 날로 커져 급기야 광해군과 북인을 몰아낸 인조반정 이후, 노론이 정권을 잡으며 시작된 당쟁과 권력독재의 음모는 정조가 평생 개혁군주로서 발목을 잡히는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다.
정조가 아버지의 복수를 감행하지 못한 이유를 선왕의 유지를 받든 효심에서였다면, 차리리 태종처럼 왕권 강화의 실현을 위해 효를 버리고 정치적 입장을 강하게 내세웠어야 했던 아쉬움을 가진다. 정조가 등극한 후 소론을 버리고 노론을 등용한 조치도 안타까웠다. 사도세자의 아들이로되, 사도세자의 죽음과 정조와는 별개의 일로 치부해야 했던 정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한 전술이었을지는 몰라도, 후일 노론과 경쟁해야 할 세력을 남인에서 밖에 얻을수 없었던 일도 정조의 입장을 애꿏게 만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배운대로라면 영조와 정조는 당파간의 분열을 막기 위해 탕평책을 써서 그 폐단을 막았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탕평책은 실패한 정치적 악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고루 인재를 써서 당파간의 견제를 위한 취지는 당론이 임금이 효시한 명령보다 더 중요한 각론이 되어 버렸고 자신들의 당론을 관철시키고자 결과적으로 더한 폐단을 낳았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문예 부흥으로 개혁을 시도했던 학자 군주 정조는 문체 반정을 통해 흥미로운 미스터리를 남겼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금서로 지목하면서 당시 유행한 패관기서와 소품문을 멀리하라는 지시가 그것이었다. 정조가 박지원을 희생양으로 삼은 이유는 그 역시 노론 가문 출신으로서 천주교를 옹호하는 남인을 보호하고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시키기 위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천주교가 성행하는 이유를 들어 남인을 공격했던 노론을 압박한 정조의 전략이 돋보인다.
드라마에서는 정조의 어머니 이미지가 아들을 걱정하고 아들의 일에 헌신하는 좋은 어머니로 비춰지나, 과연 좋은 어머니인지, 냉혹한 정치꾼인지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시아버지 영조가 세손의 호적을 사도세자에서 효장세자의 아들로 옮긴 일에 대해 사도세자의 죽음만큼이나 슬퍼했다는 대목이 그것이었다. 현실적 기준으로 보면 지아비의 죽음을 슬퍼했으리란 상식을 버리긴 어려웠지만 당시 시대적 배경은 가문의 입장이 노론의 그것이었고 혜경궁 홍씨는 아주 일찍부터 남편을 버렸다는 판단이 선다. 한중록에 묘사된 홍씨의 문체는 남편을 정신병자 그 이상의 것으로 몰았고 시어머니와 함께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간 일등공신이었기 때문이다.
교과서에서 자주 보았던, 책에 실린 수원 화성의 사진을 보았다.
이 책을 보지 못했다면 수원 화성의 역사적 의미를 몰랐으리라. 단순히 정약용이 기중기를 사용했다는 토막 지식만을 갖고 있던 내게 화성은 정조에게 있어 조선을 새롭게 개조하기 위한 중심지를 꿈꿨던 비상이었다. 화성이 만들어지는 비하인드 스토리는 이 책을 읽는 내내 긴장하고 박진감 넘치는 최고의 이야기였다.
책에 삽화된 사진이 많아서 눈요기감도 가득이다. 특히 옛 고찰들의 사진에서 정조의 호흡이 느껴지는 듯 싶었다.
1800년 6월 28일 조선은 급격히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가 고심하여 쌓아 올린 찬란한 업적이 희석되는 순간이었다.
저자 서문에서 조선은 미래에서 과거로, 개방에서 폐쇄로, 소통에서 단절로, 사랑에서 증오로 돌아섰음에 공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영화가 끝나고선 자막이 올라갈때 느끼는 카타르시스처럼 이 책은 내 눈가에 뿌연 물막을 남겼다.
그가 자라고 죽기까지 남긴 찬란한 업적들. 그의 숨결이 다다른 그곳에 한번 가보고 싶다.
그가 꿈꿨던 미완의 꿈에 동참하고 싶은 강한 열망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