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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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누렇게 변한 책을 읽는 건 오랜만이었다.

조부모에서 아이까지 삼대에 걸쳐 책을 읽는다는 어느 독자의 이야기가 굉장히 반가웠다는 하루키의 말마따나

딸이 비로소 어른이 되는 시점의 나이에 놓인다면 나도 이 책을 건네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만큼 만인의 청춘 소설이듯, 내게도 <상실의 시대>는 특별한 책이고 사랑하는 책이다.

 

 

빛바랜 종이를 들여다보자니 그 옛날 이 책을 처음 읽던 스무살 남짓의 내가 떠올랐다.

그 때 읽은 그간의 소설 가운데 <상실의 시대>만큼 읽는 내내 부끄럽고 읽고 나서의 충격이 컸던 책은 없었던 것 같다.

작가의 후기엔, 성에 관해 사실적이지만 아름답게 묘사해서 거부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젊은 여성 독자의 편지가 많았다고 했는데

내가 굉장히 순진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런 장면이 노출될 때마다 너무나 놀랐고 행여 누가 볼까 두려웠다.

(지금 다시 읽어 보니 확실히 하루키가 그 부분에 공을 들였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반면, 주인공인 와타나베가 열아홉에서 스무살로 넘어가는 과정 속에 가지고 있는 신념이나 말투가 굉장히 어른스러운 것이라서

상대적으로 나의 무지함과 틀에 박힌 일상에 괴리감을 느끼기도 했다.

또, 자세히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첫사랑의 상처를 이 책으로 회유하고자 했고

재주는 없었는데 반드시 작가가 되고 말겠다는 맹목적인 꿈을 지지해주는 동력자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다시 책을 읽자니, 책 속의 사람들과 함께 청춘이었던 내가 되살아나 그 때의 너라며 많은 것을 기억하게 해주었다.

추억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아름답다는 수식어에 희석되고 마는 것인지

그러고 있으니 행복했다.

 

 

하루키의 주의대로, 나는 이 책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의미로만 받아들였다.

그 안에 시대를 부여한 내가 있어 누군가는 투쟁하고 누군가는 비켜선다는 것도 말하고 있지만 

확실한 건 모두에게 던져지는 동음이의어 같은, 상실이다.

이 책이 스테디셀러로 읽히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의미로서의 동질감 때문일 것이다.

와타나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인물들이 유난한 것은 맞지만, 정도가 다를 뿐 상실의 시대는 모두가 겪는다.

나도 그랬고 그 과정을 거치며 나이 들었다.

까마득한 옛날 일이라 가물가물할 때도 있지만 어제 일어난 것처럼 생생하기도 한 과거의 시간들.

그 때의 나는 미도리처럼 당차고 야무지진 못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레이코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예전엔 와타나베와 미도리/와타나베와 나오코 관계에만 초점을 둔 것 같은데

다시 읽으니 레이코의 농담과 신조가 더 눈에 들어온다.

역시, 환경은 무서운 것이다.

 

추억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했던 <상실의 시대>.

책을 덮고 비틀즈의 <Norwegian Wood>를 들으니 굉장히 신선하게 느껴졌다.

딸의 스무살은 나의 스무살과 비교도 안되게 다르겠지만 노래와 책을 대하는 마음만은 같았으면 좋겠다.

이 애도 <상실의 시대>를 읽고 난 후 비틀즈의 노래를 들으며 여흥을 가다듬었으면 한다.

요즘 우리집에선 비틀즈의 명곡 100선이 플레이되고 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묘한 매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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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크애비뉴의 영장류 - 뉴욕 0.1% 최상류층의 특이 습성에 대한 인류학적 뒷담화
웬즈데이 마틴 지음, 신선해 옮김 / 사회평론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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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저자 웬즈데이 마틴은 목표한대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최상위층이 모여 살고 있는 뉴욕의 어퍼이스트사이드로 이사했다.

인류학자이자 작가이고 두 아이의 엄마인 저자는 단번에 그들만의 리그임을 파악했고 철저히 따돌림 당한다.

그리고 어떻게든 발 붙이고 살기 위해, 그 곳의 그녀들 습성을 연구해 가기 시작했다.

정확히 이 책은 그런 그녀들의 머리 위에 엄마라는 타이틀을 쥐어준 뒤

영장류의 하나인 인간으로 맥을 잡아 본, 생태 보고서라 하겠다.

관찰자인 그녀는 제3의 시선으로 그들을 비판하고 그러다가 적의를 품던 삶에 자연스레 동화된다.

그렇게 일정 부분 받아들이거나 무시하며 어퍼이스트사이드 엄마로 살아가던 중 뱃속에 품은 셋째를 잃게 되었고

그러고 나니 적대시했던 모두가 친절을 베풀며 다가왔고 속에 담아 둔 상처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책의 결론은, 그녀들의 습성은 그렇다쳐도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는 모성애는 인정해줘야 한다는 것.

그렇게 까더니 우리는 범인류적 모성애로 하나가 될 수 있는 엄마니까 다 이해할 수 있어요, 라는 식.

결론이 갑자기 우회해서 뭐지 싶긴 했으나 대체적으로 재치있는 글빨의 에세이다.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아니 때로는 대체 왜?? 라는 의문이 대롱대롱 매달려 진도를 방해했으나

뭐 가진 것이 죄도 아니고 책의 핀트도 그게 아님은 알겠어서

그리고 나 역시 저자가 힘주어 강요하는 그녀들과 같은 엄마이기에

이런 삶도 있구나, 그럴 수도 있겠네, 생각하며 호의적인 시선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며 읽었다.

어린이집 다니는 아들이 반친구 엄마에게 너희집에 전용기가 없다니 딱하구나 했다는 말이 왜 괴로운 것인지

버킨백을 구입하기까지의 지난한 역사와 퀄리티 분석에 왜 그토록 열의를 다해 종이 몇 장을 빼곡히 채운건지

도무지 납득 가지 않았지만 그 또한 그들의 당연한 권리이자 생활이니, 사족은 달지 말지어다.

또, 쌩뚱 맞은 결론이 위아더월드 같아서 식상도 했으나 역시 나도 엄마라서 그런가

저자가 셋째를 잃고 기록한 감정의 선에선 심하게 동요되었다.

 

신선한 내용과 솔직한 표현에 의의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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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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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방점을 찍지 않을까 생각한다.

초기의 쥐3부작도 좋긴 하지만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좀 더 확장된 고뇌가 담겨 있어 깊이가 더 하다.

SF 공상 과학 영화 같은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인간 근원에 대한 자아 성찰 다큐 같은 '세계의 끝'.

소설은 이 두 개의 이야기를 한 챕터씩 번갈아 가며 전하고 있는데 둘은 분명 서로 다르지만

일각수나 도서관의 그녀 같은 요소가 중복되면서 하나의 이야기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특히, '세계의 끝'은 내가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가운데 가장 암울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아 있다.

감정이 없는 '나'와 감정을 소유하고 있는 나의 '그림자' 구도.

'그녀'를 향한 사랑으로 마음을 완전히 소묘하지 못한 '나'가 '그림자'의 탈출을 돕고 숲에 남기로 한 것.

결국, 그곳에서 도망치려는 '그림자'나 남아 있길 택한 '나'의 처지도 모두 자아에 의한 의식에서 비롯 되었다는 자각.

환타지 같지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 안에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번뇌와 무관하지 않기에 더욱 허무하고 한편 정이 간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시발점이 미완성작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재편성한 것이라는 사실과

'세계의 끝'과 대칭을 이루는 각으로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고안했다는 것을 참작한다면

무라카미 하루키에게도 '세계의 끝'이라는 소설이 갖는 애착은 상당해 보인다.

챕터를 건너 띄고 '세계의 끝' 편만 읽기도 했는데 그렇게 하니 여운이 더 길었다.

 

이 책은 재미의 유무를 따지기 앞서 성찰의 안내서 같은 책이라 읽는데 긴 호흡이 필요했다.

가끔은 생활의 잔재미처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즐거운 요소가 가미되기도 하지만

결국 '세계의 끝'에 선 '나'를 직면한다면 ego의 고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표현하긴 쉽지 않지만 머릿속에 들어찬 공허함 안에 이런저런 생각의 꼭짓점들이 통통 찍혀가는 기분이었다.

 

 

만약 내가 다시 한 번 살 수 있다고 해도,

역시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인생을 더듬어대며 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것이-그 계속 잃어버리는 인생이-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나 자신이 되는 것 말고 또 다른 길이란 없다.

사람들이 아무리 나를 버리고, 내가 아무리 사람들을 버리고,

온갖 아름다운 감정과 뛰어난 자질과 꿈이 소멸되고 제한되어 간다 하더라도,

나는 나 자신 이외의 그 무엇도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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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1916-1956 편지와 그림들 - 개정판 다빈치 art 12
이중섭 지음, 박재삼 옮김 / 다빈치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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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책을 만나면

그렇게나 기분이 좋은데 이 책이 바로 그랬다.

책의 구성과 편집이 정말 깔끔하고 수록된 그림도 많아 소장가치가 있다.

더함도 덜함도 없는 짜임이 순수하게 읽혔고 오히려 관심을 가중시켜 작년에 방송됐던 다큐 드라마까지 찾아봤다.

확실히 책보다는 뭔가 전해지는 감동이 덜했지만 그리도 끔찍히 사랑했던 아내분을 본 건 좋았다.

그림을 평하는 것은 쥐뿔도 모르니 거두절미하더라도 이중섭의 그림은 편지글이 떠올라서 한없이 따뜻하고 포근하게만 느껴진다.

특히, 나는 연애시절에 보냈다는 이중섭의 그림엽서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화공으로서의 '대향'보다 아내를 향한 순애보로서의 '아고리군'이 책에 더 잘 드러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찌나 달콤하게 구구절절 구애와 애교를 보이는 지 대부분의 편지엔 귀여운 투정이 묻어난다.

멋모르고 읽을 땐 생계의 짐에 허덕일 아내와 상관없이 철없는 남편이 아닌가 의심되기도 했는데 

뒤에 수록된 아내의 편지를 읽고 나니, 아이고나 세상 둘도 없는 부부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역력히 보이는 <춤추는 가족>과 <가족에 둘러싸여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애잔하고 측은해서 인상 깊게 남는다.

편지를 읽으면 이토록 열정적이고 충만한 낭만주의자가가 또 있을까 싶은데, 비운으로 끝난 생은 참으로 아이러니할 따름이다.

친구였던 구상 시인이 화가 이중섭에 대해 쓴 글도 참 좋았다.

여느 평론가의 글보다 진솔해서 마음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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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끝내는 종이접기
주부의벗사 편집부 엮음, 김정화 옮김 / 길벗스쿨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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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랑 놀 때 좀 더 재미있게 해주려고 구매했다.
아이가 만들기엔 좀 어렵지만 엄마가 만들어서 보여주면 잘 가지고 논다.
좀 더 크면 함께 만들며 역할놀이 할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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