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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방점을 찍지 않을까 생각한다.
초기의 쥐3부작도 좋긴 하지만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좀 더 확장된
고뇌가 담겨 있어 깊이가 더 하다.
SF 공상 과학 영화 같은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인간 근원에 대한 자아 성찰 다큐 같은
'세계의 끝'.
소설은 이 두 개의 이야기를 한 챕터씩 번갈아 가며 전하고 있는데 둘은 분명 서로
다르지만
일각수나 도서관의 그녀 같은 요소가 중복되면서 하나의 이야기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특히, '세계의 끝'은 내가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가운데 가장 암울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아 있다.
감정이 없는 '나'와 감정을 소유하고 있는 나의 '그림자' 구도.
'그녀'를 향한 사랑으로 마음을 완전히 소묘하지 못한 '나'가 '그림자'의 탈출을 돕고 숲에
남기로 한 것.
결국, 그곳에서 도망치려는 '그림자'나 남아 있길 택한 '나'의 처지도 모두 자아에 의한
의식에서 비롯 되었다는 자각.
환타지 같지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 안에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번뇌와 무관하지
않기에 더욱 허무하고 한편 정이 간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시발점이 미완성작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재편성한 것이라는 사실과
'세계의 끝'과 대칭을 이루는 각으로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고안했다는 것을
참작한다면
무라카미 하루키에게도 '세계의 끝'이라는 소설이 갖는 애착은 상당해 보인다.
챕터를 건너 띄고 '세계의 끝' 편만 읽기도 했는데 그렇게 하니 여운이 더 길었다.
이 책은 재미의 유무를 따지기 앞서 성찰의 안내서 같은 책이라 읽는데 긴 호흡이
필요했다.
가끔은 생활의 잔재미처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즐거운 요소가 가미되기도 하지만
결국 '세계의 끝'에 선 '나'를 직면한다면 ego의 고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표현하긴 쉽지 않지만 머릿속에 들어찬 공허함 안에 이런저런 생각의 꼭짓점들이 통통 찍혀가는
기분이었다.
+
만약 내가 다시 한 번 살 수 있다고 해도,
역시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인생을 더듬어대며 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것이-그 계속 잃어버리는 인생이-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나 자신이 되는 것 말고 또 다른 길이란 없다.
사람들이 아무리 나를 버리고, 내가 아무리 사람들을
버리고,
온갖 아름다운 감정과 뛰어난 자질과 꿈이 소멸되고 제한되어 간다
하더라도,
나는 나 자신 이외의 그 무엇도 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