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놓쳤던 책이었는데.

아, 정말 너무나 재미있게 읽어서 또한번 반하고 말았다.

릴레리로 하루키의 책을 읽기로 한 것, 잘한 일 같다.

차례대로 읽어 온 전편들과는 다르게 상징적 비유가 극히 적어서 초반엔 좀 생경하더니 뒤로 갈수록 흡인력이 장난 아니었다.

하루키가 이런 행태의 구성도 했구나 싶을 만큼 사실적인 전개였는데, 역시나 특유의 화법인 드러내듯 감추며 주제의식을 선보이는 기량만은 다름이 없었다.

추리 소설이 아니었는데도 초조했고 섬뜩한 긴장감은 침대에서 읽다가 밤 열두시가 지날 무렵 일부러 책을 덮게 했다.

예상했던 바와 다르게 초현실적인 공포의 범위가 크지 않아 아쉬웠지만 결론은 마음에 들었다.

주인공 '하지메'가 일상 안에서 과거를 망각하고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

그러한 결말이 하루키가 여러 번 심사숙고하고 다양한 변수 가운데 택한 종착지였다는 사실에 크, 감탄사가 나왔다.

 

이 책은 <상실의 시대>의 후속작 혹은 완결편이라 불린다.

그도 그럴 것이 전작의 '와타나베'나 이 책의 '하지메'는 다른 인물이지만

과거에 집착하고, 상실되는 것들의 끈을 놓지 못해 오늘을 살면서도 갈증을 해소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상실의 시대> '와타나베'가 현실의 '미도리'를 택하면서도 어디에 서있는지 모르게 길을 잃었다면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에서의 '하지메'는 같은 의미로 청춘의 상실을 경험한 아내 '유키코'의 도움으로 길을 안내 받게 된다.

그런 점에서, 책의 주요인물은 '하지메'와 그를 둘러싼 묘령의 과거 여자들, '이즈미'와 '시마모토'지만

나는 아내 '유키코'가 가장 눈에 들어왔고 아마 하루키도 그렇게 염두해두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유키코'가 남편 '하지메'에게 한 얘기가 이 책이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한 메세지 같았고 나는 그것에 크게 공감했다.

지나간 것에서 완벽히 탈출하지 못해 메멘토 되어버리고 마는 이들에게 하는 충고.

어떤 의미에서 그건 나에게 하는 위로이자 격려 같았기에.

 

 

내게도 옛날에는 꿈 같은 것이 있었고, 환상 같은 것도 있었어요.

하지만 언젠가, 어딘가에서, 그런 것들은 사라져 버렸어요. 당신을 만나기 전의 일이에요.

나는 그런 걸 죽여버렸어요. 아마 내 의지로 죽이고 버려버린 걸 거예요.

이제 쓸모없어진 육체의 기관처럼 말이에요. 그것이 올바른 일이었는지는 나도 몰라요.

하지만 나는 그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해요.

때때로 꿈을 꿔요. 누군가가 그것을 내게 다시 가져다주는 꿈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같은 꿈을 꿔요.

누군가가 두 손 가득 그걸 껴안고 나를 찾아와선 '저기, 이거 잊어버리신 물건이에요'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런 꿈.

난 당신과 살며 내내 행복했어요.

불만이라고 할 것도 없었고 더 이상 가지고 싶은 것도 없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가 늘 내 뒤를 쫒아오는 거예요.

한밤중에 땀으로 흠뻑 젖어 눈을 번쩍 떠요.

분명히 내가 버렸던 그것이 나를 쫓아오는 바람에 말이에요.

무엇인가에 쫓기는 건 당신만이 아니에요.

무엇인가를 버리고, 무엇인가를 잃는 건 당신만 그런 게 아니에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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