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숙명宿命과 운명運命, 그리고 자유의지 ]

 

숙명과 운명, 이 두 가지는 근본적인 개념에 있어서 지대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통 비슷한 의미로 쓰여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현대 사회라는 구조 하에서 '운명' - 이 참으로 마음 편한 단어는 지금부터 그 차이점이 서술될 숙명과 운명 두 가지 개념 모두를 두루뭉실하게 지칭하고 있다 - 이라는 것은 일종의 '메타meta' 접두어가 붙는, 동서양의 갖가지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인 옛 개념들 중 하나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현대인에게 있어 운명이라는 개념은 현실성이 없다. 그저, 삶의 한 변연에서 가끔 듣고 머리 속에 떠올렸다가 다시 일상로 돌아가면서 사라지는 것들 중 하나일 뿐이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오늘의 운세'를 보고 나서 그 문장에 대해서 며칠 동안 머리 싸매고 궁구할 정도로 심각하게 여기는 사람이 세상에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쓰여지고 있는 이유는, 저 두 가지 비슷해 보이는 개념은 분명히 그 뿌리에서부터 다른 속성과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해서 약간이라도 생각해보거나 그 차이점에 대해서 들어본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 "숙명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경우에도 인력으로 바꿀 수 없는 생의 행로이며, 운명은 그것 자체로서는 인간의 삶을 이끌고 지배하지만 인간의 의지가 개입될 여지를 남겨두고 있어 그 과정에서 변화될 가능성이 있는 숙명의 연장선이자 실제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체이다."

정확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일단 이상의 두 가지 명제는 앞으로 서술할 숙명과 운명의 개념의 전제로 쓰여질 것이다. (그 근거는, 단순히 저 두 가지에 대해 관심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언어와 개념은 언중의 도구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덧붙이자면, 한 개인의 출생시를 근거로 하여 그 사람이 타고난 속성과 영위하게 될 삶의 양상을 파악하는, 보통 命理學이나 推命術이라 불리는 방법 - 대표적으로 자평명리, 기문둔갑, 자미두수, 혹은 서양의 Astrology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 을 이용하는 이들은 위에서 언급한 다소 뜬구름 잡는 듯한 정의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 그들에게 있어 어떤 사람의 '숙명'이란, 그 당사자가 태어나는 순간 그 사람의 개체성을 형성하는 시간적, 공간적 요소들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집약, 정리한 일정한 도식적 결과물로서 표현된다. 자평명리에서의 本命四柱, 자미두수에서의 先天明盤, Astrology에서의 Natal Chart/Nativity라고 칭하는 개념들이 바로 그 '숙명'의 해석이자 표현인 것이다. 그에 비하여 그 사람의 '운명', 시간축 중의 특정한 한 순간으로 대표되는 '숙명'을 기점으로 하여 일정한 규칙 하에 운행되는 '時空의 흐름'과 그 흐름이 그 개체에게 끼치는 다채로운 영향력의 향방을 일컫는다. 위와 같이, 그것은 자평명리에서의 大運과 身數, 자미두수에서의 大限, 流年, 流月, Astrology에서의 Providence(Progression & Transit)의 개념으로 도식화될 수 있다.

물론, 지금 소개한 개념들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큰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다만 처음에 서술한 숙명과 운명의 기본적인 개념에 대한 기존의 접근 방식을 제시한 것은 어느 정도의 의미는 가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지금 이야기되고 있는 숙명과 운명을 정의하는 태도가 그 기존의 접근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명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개념은 개념일 뿐이다. 인간들의 불완전한 언어논리라는 샬렛에서 배양된 제한된 결과물이 반드시 실상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수학이라는 학문과 그 안에서 쓰여지는 수많은 개념들은 대단히 정교하고 유용하지만, 우리가 접하고 있는 이 현실 자체가 남김없이 그 학문 안에 반영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수학은 '쓸데없이 다양하다 못해 예외 투성이인' 현실의 디테일한 부분은 공리라는 도구를 통해 필요한 만큼 무시하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요컨대, 인간이 운명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서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실상' 운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운명이란 것은 당 개체(자신과 주위 환경에 대한 인식력을 가진 모든 Sentient Being을 지칭한다)의 숙명에 대한 인식력이 결여된 상태에서 色界의 虛像으로서만 - 우파니샤드에 언급된 광의의 Maya의 개념이다 -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우주의 종적인 무한성 때문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의 숙명에 대한 인식력은 언제나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결국은 언제나 운명이라는 개념은 존재하게끔 될 수밖에 없다) 숙명의 존재와 그 위상에 대해서 여실히 깨닫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운명이라는 가상의 개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숙명의 본질이 가려진 상태에서만 운명이 진짜처럼 보이게 되는 이 기전은, 당 개체의 시간에 대한 인식 양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운명이라는 가상의 범주 하에서 개체의 인식력 결여는 '미래'라는 미지의 개념에 대한 변화 가능성, 즉 개체의 선택과 행동에 따라 그 결과인 미래가 유동적으로 형성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그 믿음의 근저에는 '과거'의 선택이 지금의 '현재'를 낳고, 현재의 선택이 그에 따른 특정한 미래를 낳게 된다는, '실체로서의 시간'이 존재한다는 대전제가 깔려있다.

그러나 숙명이라는 필연적인 범주 하에서는, 모든 것이 우연적인 변화가 허용되지 않은 채 인과율의 예외 없는 주시 하에 흘러가고 있다는 인식이 충족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인식이 유지되는 한 그 개체에게 '가능성'이란 개념은 단순한 허상에 불과하고, 그러한 파악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시간은 그 실체로서의 의미를 잃는다.

실체로서의 의미라 함은, 그것에 관련된 개체가 그것을 '정말로 존재하고 또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라고 굳게 믿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개체에 대해서 시간이 실체로서의 의미를 잃었다고 해서 - 애초부터 허상이었던 무언가를 실제로 존재한다고 망령되이 믿어버리고 마는 일이 어리석음을 깨닫고 즉시 그만두었다고 해도 - 시간의 흐름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 色의 형성 이전에 위치하는 空의 이치를 깨달았다 해도 눈앞에 분명히 놓여져 있던 色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시간은 여전히 그 개체에 대해서 존재하고 있으나, 숙명이라는 것의 속성 상 특정한 과거는 오직 특정한 한 가지의 현재를, 그 현재는 반드시 특정한 한 가지의 미래로 이어지게 된다. 이 기가 막힐 정도로 매끈하고 일관적인 흐름은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축의 양극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며, 그 무한한 길이의 선분 - 물론 중간에 끊어지는 경우는 없지만 이 선분의 양태는 직선이 아닌 곡선이며 또한 그렇기 때문에 가끔씩 꼬이기도 한다 - 이 지닌 털끝만큼의 흐트러짐조차 허용하지 않는 일관성은 '예외'에 대한 가능성을 완벽하게 삭제한다. 그로 인하여 시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세계는 그 어떠한 변동의 여지도 없이 '스스로 그러한' - '自然'스럽게 - 방식으로 흘러갈 뿐이고, 그러한 인식 하에서 시간은 그 숙명의 일정한 흐름 안에서 매우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자동차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마땅히 그 바퀴가 굴러가야 한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바퀴가 굴러서 이동하는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바퀴 자체가 아닌 운전석의 핸들이다. 바퀴는 생각 없이 그저 굴러가고 있지만 자동차의 방향은 이쪽저쪽으로 계속 변한다. 거꾸로, 자동차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와 전혀 무관하게 바퀴는 변함 없이 굴러가고 있다. 단지 그것뿐이다. 게다가 임의의 누군가가 자동차를 운전할 때 '바퀴가 굴러가고 있다'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정작 그가 운전 중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며 신경을 쓰게 되는 건 그 바퀴의 회전 여부가 아닌, 당장 두 손으로 잡고 있는 눈앞의 운전대를 어느 쪽으로 돌리는가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서 속도의 조절에 대한 부분은 인간이라 분류되는 종의 일반적인 한계 너머의 일이므로 언급하지 않겠다)

시간의 흐름은 공간의 차이를 낳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은 그러한 시간의 흐름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 천체의 자연스럽고도 정밀한 주기적 이동에서, 흔히 인간들이 일컫는 '운이 좋다' 내지는 '운이 나쁘다'라는 느낌을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그 일정한 시기와 일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선택을 해서 앞으로 자신의 행로를 정하고, 그에 따라 그들의 미래가 변동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과연 그들은 자신의 '자유의지' - 지금까지 언급한 '숙명과 대비되는' 운명에 대한 인간의 믿음은 자유의지가 정말로 존재한다고 믿고 싶어하는 실로 애처로운 맹신과도 직결된다 - 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인가?

당연히도 그렇지 않다. 태양과 지구와 달을 비롯한 수많은 천체들이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서로와 관계하며 운행하는 현상은, 그저 숙명의 일환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그들에게는, 의지에 의해 변동이 가능한 운명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假像뿐인 운명의 不在는, 자신의 개체성을 과신하는 우리와 같은 인간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예외 없이 적용된다. 그저 인간은 자신을 얽어매고 있는 시간과 공간이 가지는 나름대로의 특이성이, 각각 독자적인 의미를 우리에게 부여하고 있다고 믿고 싶을 뿐인 것이다. 인간은, 우리는, 나는, 당신은, 어째서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어야 하는가? 반드시 그래야 할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처음에 언급했던 명리학에서의 숙명과 운명의 개념으로 돌아가보겠다. 명리학적인 관점에서 운명은 大運이라는 형태로 도식화되지만, 그 大運의 방향과 자세한 양상이 결정되는 기준점이 되는 것은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출생시의 도식으로 대표되는 숙명이다. 출생한 시각(숙명을 상징하는)을 기준점으로 삼아 흘러가게 된 大運(운명을 상징하는)이며 또한 그 흐름은 도식을 해석하는 이의 판단을 분화시키면 분화시킬수록 실로 두려울 정도로 다채롭게 펼쳐지지만, 일정한 법칙 하에서 그 복잡다단한 흐름의 구조는 결국 정확한 출생시라는 깃발이 언제 어디에 꽂히는가에 따라 100% 내정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단 1%의 예외도 있을 수 없다. 만약 있다면, 그 때까지 '숙명'이라고 믿어지던 것은 사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숙명이 아니라, 기존에 인식되던 범위보다 약간 더 넓은 축을 가진 운명의 한 톱니바퀴에 불과할 뿐이다. (그것 역시 假像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위에서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임의의 개체가 지니게 되는 '무한한' 숙명에 대한 인식력은 언제나 그 완전함을 기할 수가 없기 때문에, 空과 色을 동시에 접하고 있는 이 諸行無常의 세계에서는 항시 운명이라는 개념이 마치 실체로서의 영향력을 지닌 것처럼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虛像에 대한 것이든 實像에 대한 것이든, 개체의 믿음은 그 자체로서 현실을 형성하고, 또한 존재를 창조한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되고 창조된 모든 것들이 바로 色界를 구성하게 된다. 인간에게 있어서도 운명이란 것이 존재하는 한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 역시 존재하게 되고, 근본적으로 허상에 불과한 자유의지지만 그러한 믿음 하에서라면 인간들에게 실체로서의 주재력을 발휘할 수 있게끔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운명은 존재하는가? 그리고 자유의지 역시 존재하는가?

존재한다.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들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던 이가 숙명의 절대성에 대한 여실한 인식을 하기 이전에까지만 국한된다. 그 이후에는, 그것들의 존재는 유지되지만 그 개체에 대한 의미와 영향력은 사라지고, 결과적으로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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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신화다]를 반박한다. | - 역사적 예수 2004/12/20 17:29
http://blog.naver.com/holyhillch/60008590410
                  [예수는 신화다]를 반박한다.  
 
                                               허호익 [국민일보], 2002.10.12일자 19일자.


국민일보에 2회에 걸처 게재된 이 글을 한국언론위원회에서 동아일보 출판사에 보내었고 [예수는 신화다]는 책의 문제성을 인정하고 동아일보출판사에서는 출판중지하기로 결정하였다.


디모시 프리크(Timothy Freke)와 피터 갠디(Peter Gandy)의 공저이며 1999년 영국에서 출판된 [예수는 신화다](The Jesus Mysteries)라는 논쟁적인 책을 공신력이 있는 동아일보사가 번역하여 대대적인 광고를 통해 판매에 열을 올리는 것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이 문제인 것은 역사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허위에 찬 내용이 가득차 있다는 점이다. 4세기의 반기독교(Anti-christ)적인 신앙을 퍼트린 영지주의자들의 저작들을 일방적으로 해석하여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신화적인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은 기독교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현저하게 왜곡하고 기독교 신앙을 호도하는 것으로 그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1. 예수의 역사적 생애는 오시리스 신화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예수의 생애와 고대 이집트의 신화적인 인물 오시리스(Osiris)의 생애가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는 이유(26, 115-118 쪽)로 예수를 오시리스와 같은 신화적인 인물이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형태적 유사성만 부각하여 본질적인 상이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궤변이다. 물과 기름이 액체로서 유사하다하여 둘이 같다고 하는 논리를 펴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의 극치는 예수의 역사적 생애를 왜곡하려는 의도와 오시리스 신화의 본질에 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풀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 의하면 오시리스는 땅의 신 게브(Geb)와 하늘의 신 누트(Nut)의 아들로 누이동생 이시스(Isis)와 결혼하였는데, 후에 형의 지위를 노린 아우 세트(Seth)에게 살해되고 그의 시신은 14조각으로 토막 내어 온 나라에 흩어져 버린다. 이시스는 그 시체 조각을 모두 다시 찾아 맞추어 최초의 미이라를 만들고 그의 성기(性器)를 살려 내어 관계하여 아들 호루소(Horuso)를 낳았다. 그리고 오시리스의 소생을 위한 의식을 거행한 결과 그가 소생하여 죽은 자들의 사후 세계의 왕이 되고, 호루소는 산 자들을 통치하는 이집트 최초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죽은 신을 애도하고 그 재생을 기원하는 오시리스 신앙은 농경문화와 결합되어 해마다 춘분이 되면 겨울에 죽었던 식물들이 되살아나는 것과 관련시키는 재생의식으로 지켜졌으며, 이러한 자연종교의 재생신앙이 영적 각성이라는 의미에서 영적 재생 신앙으로 밀교(미스테리아)와 영지주의에 의해 재해석되어 널리 유포되었다.

그러나 종교학자 내쉬(R. Nash)는 오시리스 재생 신화와 예수의 부활 신앙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은 분명한 차이점이 드러난다고 하였다. ①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죽는다는 점, ②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을 위해 죽는다는 점, ③ 단 한번의 죽음이지 반복된 죽음이 아니라는 점, ④ 역사적 실제사건으로 처형당해 죽는다는 점, ⑤ 자발적인 죽음이었다는 점, ⑥ 그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였다는 점이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1세기의 유대 땅 나사렛 사람 예수와 기원전 4500년경의 이집트의 신화적 인물 오시리스를 동일한 신화적인 인물로 여기는 것은 복음서와 고대 역사가들의 예수에 대한 기록과 오시리스의 신화를 이중 왜곡하는 것이므로 현혹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 기독교가 신화적 예수를 역사적 예수로 각색한 것이 아니라, 영지주의가 역사적 예수를 신화적 인물로 각색한 것이다.

바울마저도 예수를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라 신화적인 인물로 보았는데,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지배자의 종교로 공인 되자 3세기의 유세비우스([교회사], 성요셉출판사, 1985)라는 역사가를 시켜 오시리스 신앙의 신화적인 인물인 예수를 역사적 인물로 각색한 것은 ‘거대한 음모의 결과’였다고 주장한다(35 쪽).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야 말로 바울의 생애와 유세비우스 시대의 역사를 저자들이 마음대로 각색한 ‘웃기는 음모의 결과’이다.

바울은 로마서 서론에서 예수를 가르켜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신(generatio) 분이며,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resurectio) 분”(로마서 1장 3절-4절)이라고 하였다. 예수는 오시리스 신화처럼 ‘인간의 탈’을 쓴 가현적인(doceo) 인간이 아니라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다. 그리고 오시리스처럼 해마다 반복하여 재생하는 존재가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단 한번 부활하신 분임을 분명히 하였다.

더군다나 4세기의 기독교 역사가 유세비우스가 신화적 인물 예수를 역사적 인물로 각색했다는 주장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유세비우스보다 200년전에 이미 예수는 역사적 인물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상식이기 때문이다.

주후 70년을 전후하여 예수의 역사적 생애를 기록한 4복음서 외에도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가 주후 76-79년 사이에 쓴 [유대고대사]와 [유대전쟁사]나,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P. Cornelius Thakitus 주후. 55/56-120년경)가 쓴 [연대기](15/14. 3.)에서도 유대 총독 빌라도에 의해 나사렛 사람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주후 170년경 헬라의 풍자 작가인 루시안(Lucian)도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현자(賢者)”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을 부정하고 예수를 신화적 인물로 주장하는 만용에 통탄할 일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기독교가 신화적 예수를 역사적 예수로 각색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영지주의가 역사적 예수를 신화적 인물로 각색한 것이라는 사실은 종교학자들에게는 상식으로 통하는 견해이다. 이 책은 이러한 종교학적 상식조차 결여한 것으로 비판받아 마땅하다.


3. 예수의 부활은 죽은 자의 부활이며, 산 자의 영적 부활(해탈)이 아니다.

이 책은 1945년 이집트의 나그 함마디에서 발굴된 4세기의 사본으로 확인된 영지주의자들의 문서 총 52권 중 일부를 인용하면서 예수는 고통을 겪지도, 피를 흘리지도, 죽지도 않았으며, 따라서 “죽음으로부터 부활 한 것”이 아니라고 적고 있다. 특히 영지주의 문서인 [빌립 복음서]에 기록된 “먼저 죽고 난 다음에 다시 살아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틀렸다.… 죽고 나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부활해야만 한다.”는 영적 부활론을 기독교의 본래적인 가르침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영적 각성을 통한 영적 재생은 미스테리아 신앙의 핵심이며, 득도나 해탈과 같은 선불교적 특징과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동서양의 가장 보편적인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교회 내에도 이러한 영적 부활론자들이 존재하여 부활신앙에 대한 혼란을 가중시킨 것을 질책하였다. “어찌하여 여러분 가운데 더러는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고 합니까?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살아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장 12절-13절)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포도 헛되고 우리의 믿음도 헛될 것”이라고 하였다. 바울은 영적부활이나 영혼불멸설을 주장하지 않고, 죽은 자의 몸의 부활을 가르쳤다. 바울이 영지주의자였다는 저자들의 주장이 틀렸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저명한 신학자인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한국신학연구소, 1979)이라는 책에서 희랍의 미스테리아 신앙과 영지주의의 신관과 성서의 하나님 신관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을 명쾌하게 제시하였다.

고대 희랍신화에 나타나는 신은 고난과 죽음을 겪지 않는 '무감정의 신'(God of Apathos)이다. 고난을 당하거나 죽는 신은 육체의 굴레에 얽매여 있는 가멸적(可滅的) 존재이므로 더 이상 신일 수 없다.

그러나 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이 육체를 지닌 인간으로 태어나서 많은 고난을 당하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고 가르친다. 이는 희랍인들에게 너무나도 낯선 신앙이다. 히브리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을 하감하시고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고난당하는 백성과 함께 하시는 ‘인정이 많으신 하나님’(God of Pathos)이다.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시므로 그 고난과 죽음을 극복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은 바로 고난받으심으로 고난을 극복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결정적인 계시이다. 우리를 위하여 고난받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현실적인 고난에 항거하시고 고난을 극복하시고 승리하신 것이다. 그래서 몰트만은 “부활신앙이 아닌 기독교 신앙은 기독교적인 것도 아니고 신앙이라고 일컬을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20세기 대표적인 신학자 칼 바르트도 [죽은 자의 부활](한국신학대학출판부, 1989)이라는 책에서 기독교의 부활신앙은 산자의 영적 부활이나 영혼불멸이 아니라 ,‘죽은 자의 부활’인 것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은 고난당하는 신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의 육체적인 죽음과 죽은 자의 부활을 거부함으로서 기독교 신앙을 크게 왜곡한 것이다. 그래서 하르낙은 2세기에 기독교가 영지주의적 왜곡을 극복하지 못하였다면 세계적인 종교가 되지 못하였을 것으로 단언하였다.


4. 영지주의가 본래적 기독교가 아니라, 역사적 기독교를 영적 기독교로 왜곡한 적(敵) 그리스도(Anti-christ)이다.

이 책은 ‘미스테리아’ 신앙을 받아들인 영지주의 기독교가 본래적인 기독교라고 거듭 주장한다. ‘미스테리아(密敎) 신앙’이 고대 유럽의 민중들 사이에 널리 퍼진 것은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신앙이 기독교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어 역사적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독교신앙을 미스테리아 신앙과 혼합하여 영지주의 기독교가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영지주의가 역사적 기독교를 영적 기독교로 왜곡한 것이지, 기독교(저자들의 용어로는 문자주의자들)가 영지주의를 문자주의로 왜곡한 것이 아니다. 영지주의의 주장을 조금만 살펴보면 저자들의 가설이 전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145년경 영지주의자 말시온(Marcion)은 구약의 천지(물질)와 인간(육체)을 창조한 여호와는 열등한 신이며, 신약의 영혼의 아버지 하나님과 다른 신이라고 주장하고 예수가 육신으로 태어나 고난 받고 죽은 것을 부정하였다.

2세기 기록으로 보이는 영지주의 문서인 [도마복음서] 25절에는 예수가 “형제를 여러분의 영혼처럼 사랑하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영지주의에 의하면 육체로 말미암아 고통과 죽음이 유래된 것이기 때문에 육체를 사랑해서는 않된다. 그래서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19장 19절 병행)는 예수의 가르침을 이웃이 아니라 “네 형제를 네 영혼 같이 사랑하라”고 제멋대로 왜곡한 것이다.

심지어 일부 영지주의자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서 외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구절을 영지주의적으로 해석한다. 아람어 엘(El)은 보통명사로서 신(神)이라는 뜻일 뿐만 아니라 영(靈)을 뜻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예수의 영(神)이 인간의 육체를 빌려 마치 유령처럼 이 땅에 나타났다가,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인간의 육체적 가면을 벗어버리고 다시금 영적 존재로 되돌아가려고 하자, 예수의 가현적인 육신이 “나의 영이시여, 나의 영이시여 어찌하여 나(육체)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로마교회에서는 사도신경을 통해 영지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과 같은 한나님이시며,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빌라도의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으로 고백한 것이다.

그리고 신약성서 요한2서 1장 7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들” 즉, 영지주의자들을 가르켜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anti-Christ)”라고 하였다. 이처럼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는 육체로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에 고난도 죽음과 함께 당하지 않는다고 왜곡한 것을 바울은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교훈”(고린도후서 11장 4절)을 가르치는 것으로 분명히 거부하였다.

그래서 예수의 생애를 역사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예수 세미나’의 대표적인 신학자 펑크(R. Funk, [예수에게 솔직히], 1999, 120-130쪽)조차도 나그 함마디 문서 중 [도마복음서]만이 예수의 말씀이 40%의 정도로 병행하여 나타나지만, [구세주와의 대화]에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대화와 병행을 이루고 있지만 예수의 말씀은 실제로 단지 한 구절(11:4)뿐이라고 한다. 그 외에 [야고보의 비밀복음], [진리복음], [빌립보 복음], [이집트인들의 복음]에는 예수가 한 말씀과 유사한 것은 있지만 예수의 말씀으로 역사적 진정성이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단언하였다. 영지주의자들이 이처럼 예수의 역사적 가르침과 본래적 신앙을 완전히 왜곡한 것이다.


5. 기독교신앙은 영지주의자들의 은밀한 미스테리아가 아니라, 공개적인 복음으로 선포된 사도전승이다.

영지주의자들의 신앙의 핵심은 영육 이원론이다.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온갖 고난을 당하고 마침내 죽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육신의 감옥 속에 갇힌 영혼을 해방시킴으로서 구원에 이른다고 하였다. 구원의 구체적인 방식이 비밀스러운 영적 지식(gnosis)를 깨닫는 것이며, 이 영적 지혜는 소수의 선택된 영지자들에 의해 비밀스럽게 전승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미스테리아 신앙은 밀교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종교학자들은 종교를 밀교(密敎)와 현교(顯敎)로 나눈다. 밀교는 교리와 제도와 의식이 이중적이다. 공개되는 부분과 비공개적인 부분이 있다. 통일교가 이러한 밀교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핵심적인 교리와 제도와 의식은 핵심 내부인들에게만 은밀히 알려져 있다. 외부의 직접적인 비난이나 공격을 피하기 위한 수단일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처음부터 예루살렘 성전과 회당에서 공개적으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못박아 죽인 이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려서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었다”(사도행전 2장 23절-24절, 36절)고 선포하였다. 바울도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지내시고 부활하시고 다시 살아나셨다”(고린도전서 15장 3절-4절)고 하였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신앙에 대한 최초의 기록에 해당하는 이 내용은 “내가 전해 받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는 것”(고린도전서 15장 1절)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초대교회 이레네우스는 [이단반박]이라는 방대한 저술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공개적인 사도전승’이지만, 영지주의의 영지(gnosis)는 ‘은밀한 비밀전승’이라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밀교는 그 은밀한 비공개성 때문에 황당무계한 신앙을 저마다 제멋대로 전수하였고, 이러한 모순된 신앙에 대한 객관적 이성적 비판과 검증의 과정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적대적인 정부와 종교가 지배하는 체제에서도 자신들의 신앙의 진리성을 공개적으로 선포하였기 때문에 엄청난 비판과 도전과 박해를 당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신앙의 진리성 때문에 역사적인 종교로 세계화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은밀한 밀교는 불교처럼 엘리트적인 소수만의 득도와 수행을 통해 영적 각성에 이르는 것을 우월한 것으로 여겼다는 점도, 예수가 가난하고 무지하고 병들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의 구원을 위한 대중적인 신앙을 표방한 것과 결정적으로 다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6. 저자들의 주장은 명확성과 일관성이 부족하고 상호모순 투성이다.

저자들의 주장을 자세히 읽어 보면 논리적 일관성이나 명확성이 부족하며, 자체 모순이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구체적인 사례 하나만을 들어보자.
주후 3세기의 한 부적의 그림을 근거로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예수로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이교도 신인인 오시리스-디오니수스였다”(102쪽)고 했다가, 그 다음 페이지에서는 “최초의 십자가상에 나타난 예수는 곧 오르페우스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영지주의 문서인 [옹호자 도마의 책]을 인용하면서 예수와 모든 점에서 닮은 도마라는 “예수의 쌍둥이 형제가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211 쪽)고 주장한다. 그리고 몇 페이지 뒤에는 영지주의 문서인 [위대한 세트 신의 두 번째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것은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구레뇨 사람 시몬이다”(215 쪽)고 하였다. 그렇다면 진짜로 십자가에 죽은 자는 누구인가?

이 책의 핵심적인 내용이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문자 그대로 죽은 자가 부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장하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에 대해 이처럼 오락가락하는 주장을 내세우는 것을 보면 저자들의 지적 수준이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정도의 한심한 책을 읽노라면 왜 이런 책을 민족정론을 표방하는 ‘동아일보사’가 분별없이 출판하였는지 그 자질과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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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베네딕트씨의 임사체험(펌) | 낙서장 2004/11/28 10:52
http://blog.naver.com/sandlbalam/100008076443
베네딕트씨의 임사체험 (1) - 인간의 영혼은 본디 선하다!
베네딕트씨의 임사체험 (2) - 빈 공간에 들어가다!
베네딕트씨의 임사체험 (3) - 환생, 천당과 지옥, 미래...  



* 멜렌 토마스 베네딕트씨의 임사체험

멜렌-토마스 베네딕트는 1982년에 죽었다 살아난 체험을 했던 예술가입니다. 그는 암으로 1시간 반 가량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죽는 순간에 그는 자신의 몸에서 나와 빛 속으로 들어가는 체험을 했습니다. 우주에 대해 너무나도 궁금했기 때문에 그는 존재의 머나먼 깊은 곳까지 가게 되었는데, 그곳은 '빅뱅' 이전의 아무 것도 없는 에너지 상태, 빈 공간(空, void)이었습니다. 이런 체험을 하는 동안 그는 환생에 관한 엄청난 정보를 배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임사체험 덕분에 그는 과학적 발견을 되짚어 볼 수 있었습니다. 베네딕트씨는 세포적 의사소통의 작동원리와 연구에 깊이 관여해왔는데, 그것은 빛과 생명과의 관계를 다루는 양자 생물학이라고 합니다. 이 연구는 생물학적 체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관해 극적이고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줍니다. 베네딕트씨는 살아있는 세포가 아주 빠른 속도의 치유를 낳는 빛 자극에 신속히 반응할 수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6개의 특허권을 갖고 있는 연구원이면서 발명가이고 강사입니다.

그의 임사체험담은 저술가인 리 워쓰 베일리 박사와 제니 예츠의 허락하에 다시 인쇄되었습니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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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네딕트씨의 임사체험 (1) - 인간의 영혼은 본디 선하다!


1982년에 나는 말기 암으로 죽었습니다. 제 몸은 수술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어떤 화학요법을 썼더라도 전 단지 식물인간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6개월에서 8개월 동안만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1970년대에 정보에 미친 사람이었으며, 핵전쟁과 환경 등의 위기가 고조되자 점차 낙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바탕을 쌓기 전까지, 저는 자연이 실수를 저질렀으며 우리는 이 행성에서 암적인 존재라고 믿었습니다. 또 우리가 저지른 모든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없다고 보았습니다. 저는 모든 인간을 암으로 간주했고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그런 생각이 절 죽인 거였죠. 여러분의 세계관이 무언지 잘 살펴보세요. 그런 생각이 여러분에게 되돌아 올 수 있으니까요. 특히 부정적인 세계관이라면 더 조심하세요. 전 심히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대안적인 치유요법들을 모두 써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게 정말로 신과 저 사이의 일이라 결론지었습니다. 저는 전에 신을 대면해 본 적도 신을 다루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전혀 영적인 생각을 해보지 않았지만 영성과 대안 치유법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구할 수 있는 모든 책을 읽고 관련 주제를 섭렵해나가기 시작했죠. 제가 저승에 가면 놀라지 않기를 바래서였습니다. 그래서 종교와 철학에 관한 다양한 책을 읽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매우 흥미로웠고 저승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한편, 저는 당시에 스테인드 글라스 조각가였기 때문에 의료보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저축해 놓은 돈도 하룻밤만 지나면 없어질 판이었죠. 그 때 전 보험 없이 전문의와 상담 중이었습니다. 제 가족이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제 병을 혼자 처리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고통이 항상 심한 것은 아니었는데, 의식을 잃어버릴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병원까지 운전도 감히 할 수 없었고, 결국 간병인을 두는 걸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제가 둔 간병인은 제 곁에서 마지막 임종을 지켜본 천사였는데, 그건 축복이었습니다. 가능한 의식적으로 깨어있는 상태를 원했기 때문에 많은 약을 복용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약 18개월을 버텨냈습니다. 그 때 전 정말이지 너무나 고통이 심해서 제 의식 속에는 고통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그런 날은 몇 일뿐이었지만 말이죠.

새벽 4시 반에 집에서 깨어난 날이 기억납니다. 전 그 날이 마지막이란 걸 알았습니다. 제가 죽을 날이었죠. 그래서 전 친구에게 전화해서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제 간병인을 깨워서 말했습니다. 제가 죽고 나서 6시간 동안 제 곁을 떠나지 말아달라는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겪게 되면 온갖 종류의 흥미로운 일들이 일어난다고 책에서 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그 이후 제가 기억하는 건 전형적인 임사체험(죽었다 깨어난 경험)의 시작이었습니다. 갑자기 완전히 각성된 상태에서 깨어났습니다. 하지만 제 몸은 침대 위에 있습니다. 제 주위에는 암흑이 있었습니다. 몸에서 나오는 경험은 일상적인 경험보다 훨씬 더 생생한 것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생생한 나머지 집안에 있는 방들을 모두 볼 수 있었습니다. 지붕도 보였고 집 주위와 그 아래도 보였습니다.

눈부신 빛이 있었습니다. 전 그 빛을 향했고 그건 마치 다른 사람들의 임사체험담에서 묘사된 것과 아주 비슷했습니다. 그 빛은 굉장히 웅장했습니다. 또한 만질 수도 있었고 촉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건 매혹적인 느낌을 주고 있기에, 마치 이상적인 어머니 혹은 아버지의 품으로 가고 싶은 것처럼 여러분도 그 빛을 향해 가고 싶어질 것입니다.

저는 그 빛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는데, 그 때 직감적으로 그 빛에게 가면 이대로 죽을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빛을 향해 가면서 말했습니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몇 초면 되요. 제가 가기 전에 당신에게 말하고 싶어지네요."

놀랍게도 그 모든 경험이 순간 정지했습니다. 실제로 여러분은 임사체험을 통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체험 속에 이끌려 다니는 게 아니죠. 제 요청은 받아들여졌고 전 그 빛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빛은 계속 다른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는데, 예수님, 부처님, 크리슈나, 원형의 형상과 표식으로 된 만다라 등으로 나타났습니다.

전 빛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죠? 빛이여, 당신이 누군지 밝혀주세요.
전 정말로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고 싶습니다."

빛이 말한 것을 정확한 단어로 말씀드릴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대화방식이 텔레파시 같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빛은 대답했습니다. 제가 얻은 정보는 우리의 신념에 따라 그와 같은 종류의 피드백이 빛으로부터 우리에게 전달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종교에 따라 그에 맞는 피드백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도 그걸 확인해볼 기회가 있을 테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빛이 내게 모습을 드러냈을 때, 전 제가 보고 있는 것이 우리의 상위자아 매트릭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인간 영혼의 만다라, 즉 매트릭스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본 바에 의하면,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상위자아라고 불리는 것이 우리의 매트릭스(모체)라는 겁니다. 또한 그것은 근원Source에 이르는 도관(導管)입니다. 우리 모두는 근원으로부터 직접 오고 있으며, 직접 경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의 상위 자아가 있거나 우리 존재의 대령oversoul의 일부인 것이 있습니다. 그 빛은 가장 진실된 에너지 형체로 내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제가 그걸 실제로 묘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상위자아의 존재가 도관 이상의 그 무엇이라는 겁니다. 전혀 도관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근원에 직접 접속되는 연결선입니다. 우리는 근원에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빛은 나에게 상위자아 매트릭스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내게 더욱 선명해졌고 모든 상위자아들이 하나의 존재로 연결되고 있었습니다. 모든 인간들이 하나의 존재로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는 같은 존재의 다른 측면들을 가지고 있어서 실제로는 똑같은 존재입니다. 그것은 어떤 특정 종교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내게 피드백되고 있던 정보는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을 인간 영혼의 만다라로 보았습니다. 그건 제가 본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전 그 속으로 빨려들어갔고 저는 압도당했습니다. 마치 우리 모두가 원하던 사랑과 같았는데, 일종의 상처를 낫게 해주고 치유해주고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사랑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전 그 빛에게 계속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전 그 상위자아 매트릭스가 무언지 이해했습니다. 우리 행성 주위에는 격자망이 있는데 거기에 모든 상위자아들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마치 거대한 군집체이면서 미묘한 수준, 영적 수준의 에너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몇 분이 흘러가고 나서 저는 더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우주란 무엇인지 정말로 알고 싶었고 그 당시에 전 갈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전 준비되어 있어요, 절 데려가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빛은 지금까지 제가 본 것 중에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변했는데, 그것은 이 행성에 존재하는 인간 영혼들의 만다라였습니다.

이 빛을 만나기까지 저는 지구상에서 일어난 일들을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빛에게 설명을 계속 부탁했는데, 이 웅장한 만다라를 통해서 우리 모두가 그 정수(중심)에 있어서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창조물입니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내고 있는 인간의 영혼(매트릭스)은 무척이나 환상적이고 고상하고 이국적인 그 무엇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관한 기존의 제 의견은 순식간에 바뀌어 버렸는데, 그게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충분히 설명 드릴 수가 없습니다.

"오, 이런, 우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미처 몰랐었네."

우리의 레벨이 높던 낮던, 어떤 형태로 존재하던,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그 어느 누구의 영혼에도 악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 전 놀랐습니다.

전 물어봤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요?"

그 대답은 어떤 영혼도 본래부터 사악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무시무시한 일들 때문에 사람들은 사악한 짓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사악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 그들을 지탱시켜주는 것은 바로 사랑이라고 그 빛이 말했습니다. 사람들을 왜곡시키는 것은 사랑의 결핍입니다.

이 빛으로부터 나오는 사실들은 끝없이 계속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전 물었습니다.
"그 말뜻은 인류가 구원될 거라는 겁니까?"

그러자 마치 트럼펫 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하면서 나선형으로 움직이는 빛다발들, 즉 커다란 빛이 말했습니다.

"이 말을 명심하시고 절대 잊지 마세요.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구원하고 구조하고 치유합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그래왔습니다. 여러분은 항상 그럴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렇게 할 권능을 갖고 창조되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더욱 더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우리가 이미 구원받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신이 만든 우주 전체가 그러하듯이 우리가 스스로를 수정하게끔 고안되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구원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의미가 두 번째로 제게 왔습니다.

저는 그 신의 빛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제가 떠올릴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은 정말로 감사하다는 단순한 단어들뿐이었습니다.

"오, 신이여, 우주여, 위대한 자아여, 나는 내 삶을 사랑합니다."

그 빛은 점점 더 깊이 저를 들이마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건 마치 빛이 저를 완전히 흡수하고 있는 것과도 비슷했습니다. 그 사랑의 빛을 지금 묘사하기란 어렵습니다. 저는 또 다른 영역으로 들어갔는데, 바로 전 영역보다 더 심오했습니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무언가에 대해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엄청나게 거대한 빛의 '흐름'이었고, 생명의 가슴속 깊이, 그리고 넓고 광대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전 이게 무어냐고 물었습니다.

빛이 대답하길, "이것은 '생명의 강'입니다. 당신의 가슴속 내용물인 이 마나manna의 물을 마셔보세요."

전 한 바가지를 마시고 또 한 모금을 더 마셨습니다. 생명 그 자체를 마시다니! 저는 극도의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러자 빛이 말하길, "당신에게 한 가지 바램이 있군요."

빛은 저에 관해 모든 걸 알고 있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 모두를 말이죠.

"예!"라고 작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우리의 태양계 넘어 우주 전체를 볼 수 있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인간의 모든 환상을 넘어선 우주를 말이죠. 그러자 빛은 제가 '흐름'을 따라 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응했고 터널 끝에 있는 빛을 통과해 어디론가 흘러갔습니다. 아주 부드러운 초음속 충격파음을 몇 번 느끼면서 들을 수 있었는데, 그건 굉장히 빨랐습니다!

별안간 이 생명의 흐름을 따라 지구로부터 멀리 떨어진 어디론가를 향해 로켓처럼 날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지구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태양계가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윙윙거리며 사라져 버렸습니다. 광속보다 더 빠르게 날아서 저는 은하계 중심을 통과했습니다. 그러면서 더 많은 지식을 흡수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은하계와 우주 전체가 다양한 종류의 수많은 "생명"으로 충만해 있음을 배웠습니다. 많은 세계들을 보았는데, 희소식은 이 우주에 우리만 홀로 있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 베네딕트씨의 임사체험 (2) - 빈 공간에 들어가다!  

.........

제가 이 의식의 흐름을 타고 가면서 은하계의 중심을 통과했을 때, 그 흐름이 팽창하면서 장엄한 프랙탈 에너지 파동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여러 은하계의 성단들이 먼 옛날의 지혜를 모두 간직한 채 제 옆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처음에 전 어디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구경을 하고 있는 것이었죠. 하지만 그 때 알게 된 사실이 있었습니다. 의식의 흐름이 확장하면서 제 의식도 확장을 했고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을 흡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창조계가 저를 지나쳐 갔습니다. 그건 상상할 수도 없으리만큼 경이로웠습니다! 전 완전히 놀란 눈으로 사물을 쳐다보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말이죠!

마치 우주의 모든 창조물들이 제 옆으로 스쳐 올라왔다가 작은 빛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순간, 두 번째 빛이 나타났습니다. 천지사방에서 나타난 이 빛은 무척 다르게 보였습니다. 우주의 모든 파동을 합친 것 이상의 그 무언가로 만들어진 빛이었습니다.

다시금 벨벳처럼 부드럽게 들리는 초음속 파열음을 몇 차례 느꼈습니다. 제 의식, 혹은 존재being가 홀로그램 우주 전체와 교감하기 위해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빛으로 통과해 들어갔을 때 제게 다가온 앎이 있었는데, 그것은 제가 방금 진실을 초월했다는 것이었습니다(transcended the truth). 이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지만, 아무튼 노력해 보겠습니다. 두 번째 빛을 통과해 들어가면서 저는 첫 번째 빛을 넘어서 팽창했습니다. 아주 굉장히 고요한 상태, 그 어떤 정적보다도 더 잠잠한 상태에 제 자신이 있는 걸 알았습니다. 무한대를 지나 "영원"을 보거나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텅 빈 공간(空, void) 속에 있었습니다. 창조 이전의, 빅뱅이전의 상태였습니다. 시간이 시작되려는 첫 번째 진동(이것이 떠올릴 수 있는 첫 마디입니다)으로 넘어갔습니다. 전 창조주의 눈 속에 있었습니다. 마치 신의 얼굴을 만지고 있는 듯했죠. 여기에는 종교적인 느낌이 나지 않았습니다. 단지 저는 절대적인 생명/의식과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영원을 보거나 인식할 수 있다고 말씀드린 것은, 저절로 일어나고 있는 창조의 모든 것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거기에는 시작도 끝도 없었습니다. 머리가 커지는 느낌이죠? 과학자들은 빅뱅을 하나의 사건으로 간주해서 그것이 우주를 탄생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 빅뱅이란 단지 무한히 많은 빅뱅들 중 하나일 뿐이며, 그건 수많은 우주를 끝없이 동시다발적으로 창조하는 사건들입니다. 이걸 우리들에게 익숙한 용어로 표현하자면, 슈퍼컴퓨터를 이용해서 만들어내는 프랙탈 기하학 방정식이 아마도 가장 비슷한 이미지일 것입니다.

먼 옛날 고대인들은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느님은 주기적으로 숨을 내쉬면서 새로운 우주를 여럿 창조하셨고 또 숨을 들이마시면서 다른 우주들을 거두어들인다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주기를 '유가yuga'라고 불렀습니다. 현대 과학은 이것을 빅뱅이라 불렀습니다. 저는 완전히 순수한 의식 속에 있었습니다. 그 모든 빅뱅 혹은 '유가'들이 스스로 창조되고 역창조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순간 저는 그 모든 빅뱅들 속에 동시에 들어갔고, 모든 창조계의 조그마한 것들조차도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는 권능을 갖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걸 설명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전 여전히 이에 대해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제가 빈 공간(空, void)을 체험하고 돌아온 이후, 그걸 어떤 단어에 비유하기까지는 몇 년이 걸렸습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네요. 그 빈 공간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보다도 못했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는 장소였습니다! 그곳은 완전히 제로상태이며 모든 가능성들을 만들어내는 혼돈상태입니다. 그것은 절대 의식이며 거기에는 우주적 지성보다도 훨씬 더 많은 무엇이 있습니다.

빈 공간이 어디 있을까요? 제가 알기로 그것은 모든 것의 안팎에 있습니다. 바로 지금 여러분이 살고 있는 동안에도 여러분은 언제나 이 빈 공간의 안쪽과 바깥쪽에 동시에 있습니다. 그곳에 가기 위해 다른 어딘가를 갈 필요도 죽을 필요도 없습니다. 빈 공간은 모든 물질적 구현물 사이에 있는 진공vacuum 혹은 아무 것도 아닌 상태nothingness입니다. 원자와 그 구성요소들 사이에 있는 "공간space"입니다. 현대 과학은 모든 물체 사이에 있는 이 공간을 연구해왔습니다. 이는 '제로 포인트'라고 불립니다. 과학자들이 이 공간을 측정하려고 할 때마다, 그 측정치는 눈금에서 벗어나 버립니다. 말하자면, 무한대로 가버리는 것이지요. 과학자들은 무한대를 정확하게 측정할 방도를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신체와 우주에 있는 제로 공간에는 다른 그 어떤 것보다 더 많은 공간이 있습니다!

신비주의가들이 공(空)이라고 말하는 것은 빈 공간이 아닙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에너지가 넘쳐나는 곳이며, 그건 우리 존재의 모든 것을 창조했던 다른 종류의 에너지입니다. 빅뱅 이후 모든 것들은 진동을 하는데, 첫 번째 진동인 첫 번째 단어로부터 나왔습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말하는 "아이엠I am"이란 말 뒤에는 물음표가 붙습니다.

"I am? What am I? (내가 존재한다? 나는 무엇인가?)"

그러므로 창조계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통해 '신적 자아God's Self'를 탐구하는 신God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통해 끊임없이 무한한 탐험을 하는 것이죠. 여러분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모든 나무의 나뭇잎 하나라도, 한 개의 원자일지라도, 신은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신적 자아인 위대한 "아이엠"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여러분이나 저와 같은 '자아'임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위대한 자아입니다. 그런 이유로 신은 나뭇잎이 언제 떨어지는 지도 아는 것이죠. 여러분이 어디에 있더라도 여러분이 우주의 중심이기 때문에 신은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원자가 있다면 그 원자가 있는 곳이 우주의 중심입니다. 그 속에 신이 있습니다. 그 빈 공간 속에 신이 있죠.

이 빈 공간과 '유가' 혹은 창조계들을 탐험하는 동안, 아시다시피, 저는 완전히 시간과 공간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이 확장된 상태에 있는 동안, 창조란 절대적으로 순수한 의식, 혹은 신이 삶의 체험을 하고 있는 것임을 발견했습니다. 빈 공간 자체는 경험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것은 처음으로 진동이 있기 전, 삶을 체험하기 전의 상태입니다. 하느님은 삶과 죽음을 넘어서 있습니다. 그래서 우주에는 삶과 죽음을 체험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있습니다!

빈 공간에 머물면서 지금껏 창조되어왔던 모든 것에 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제가 신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신이 되었던 거죠. 느닷없이 저는 더 이상 제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제가 신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별안간 왜 모든 원자가 존재하는지 알았고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던 겁니다.

흥미로운 점은 제가 빈 공간 속에 들어가서 신이 '거기'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돌아왔다는 거죠. 신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게 제가 말씀드린 것의 핵심입니다. 인류가 꾸준히 신을 밖에서 찾아왔지만... 신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었고 그것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신은 그 모든 것 속에 있죠. 또한 지금 우리 내면에서 우리를 통해 신이 탐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신이 되고자 하는 일에 너무 바쁩니다. 그들은 '우리가 이미 신이고 신이 우리로 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실 이게 전부입니다.

제가 이걸 깨달았을 때 빈 공간 체험을 끝마친 셈이 되었고, 전 이 창조계 혹은 '유가'로 되돌아가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런 바램이 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러자 저는 갑자기 두 번째 빛(혹은 빅뱅)을 통해 되돌아 왔는데, 그러면서 부드러운 통과음을 몇 차례 들었습니다. 의식의 흐름을 타고 모든 창조계를 거쳐 돌아오는 길은 정말이지 대단했습니다! 여러 은하계의 거대한 성단들이 저를 통과해 올 때는 훨씬 더 많은 통찰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전 우리 은하의 중심인 블랙홀을 지나쳤는데, 블랙홀은 우주의 거대한 처리장치 혹은 재활용장치입니다. 블랙홀의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있습니다. 또 다른 우주로부터 재처리된 우리의 은하계가 있습니다.

우주의 전체 에너지가 어떻게 배열되어 있는지를 보면, 은하계는 마치 환상적인 빛의 도시처럼 보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바라보면 빅뱅의 모든 에너지는 빛입니다. 모든 아원자, 원자, 항성, 행성, 의식조차도 빛으로 만들어졌고, 파동과 입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빛은 살아있는 물질입니다. 돌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빛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살아 있습니다. 모든 것이 신의 빛으로부터 만들어집니다. 모든 것이 지성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그 흐름을 계속 타고 오면서 엄청난 빛 하나가 다가오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전 그게 첫 번째 빛임을 알았습니다. 바로 우리 태양계의 상위자아 빛 매트릭스죠. 그러자 태양계 전체가 그 빛 속에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부드러운 소리가 한 번 더 들렸습니다.

우리가 사는 태양계가 우리의 더 큰 몸이자 공간임을 알았습니다. 태양계가 우리의 몸이므로 우리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큽니다. 저는 태양계가 우리의 몸이라고 보았습니다. 저는 태양계의 일부이고, 바로 우리자신이기도 한 지구는 위대한 창조적 존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구의 일부임을 알고 있는 지구도 우리의 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구의 일부일 뿐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렇다고 알고 있는 만큼의 모든 것의 일부입니다.

저는 이 태양계가 발생시키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굉장한 빛의 쇼입니다! 모든 구체들이 내는 음악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모든 천체가 그러하듯이, 우리의 태양계도 빛과 소리와 진동 에너지로 이루어진 독특한 매트릭스를 낳습니다. 다른 항성계의 진보된 문명들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우주에 있는 생명을 진동적 혹은 에너지 매트릭스 지문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애 장난이죠. 호기심에 찬 지구의 아이들(인류)은 우주의 뒷동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처럼 바로 지금이라는 풍요를 만들어 냅니다.

저는 그 흐름을 타고서 빛의 중심으로 들어갔습니다. 빛이 절 감싸고 있음을 느꼈는데, 또 한번의 부드러운 충격파음이 들리면서 그 빛은 나를 들이쉬었습니다.

저를 통과해 흐르는 생명의 흐름과 함께 전 위대한 사랑의 빛 속에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건 가장 사랑스럽고 어떤 판단도 없는 빛입니다. 호기심에 찬 아이의 이상적인 부모님이었습니다.

"이제 뭐지?" 전 궁금했습니다.

그 빛이 설명하길 죽음이란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불사의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미 영원토록 살아왔습니다! 우리가 무한히 재생산되는 천연의 생명 시스템의 일부임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듣지는 못했습니다만, 그렇게 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건 제가 본 것 중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 베네딕트씨의 임사체험 (3) - 환생, 천당과 지옥, 미래...  

.....

지구 시간으로 얼마나 오래 그 빛과 함께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 순간에 모든 의문이 풀렸고 되돌아갈 시간이 가까워져 왔다는 걸 알았습니다. 저승에서 모든 의문이 풀렸다고 말씀드렸는데, 달리 말씀드릴 길이 없습니다. 정말로 모든 의문들에 대해 답을 들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고 여러 가지 의문들을 탐구합니다. 그런 의문 중에서 어떤 것은 우주적인 질문이기도 한데, 우리는 인생이라는 것을 각자 독특한 방식으로 탐구하고 있습니다. 산이나 나뭇잎 같은 다른 모든 생명체들도 그렇습니다.

바로 이 점이 이 우주에 있는 다른 모든 이들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모든 것들이 생명으로 가득 차있는 '큰 그림'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문자그대로 생명의 무한한 춤사위 속에서 신적인 자아를 탐구하고 있는 신입니다. 여러분의 독특함은 생명 전체를 고양시킵니다.

제가 다시 삶을 체험하러 돌아오려 했을 때, 같은 몸에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그런 말을 듣지도 못했습니다. 그건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그 빛과 생명의 과정에 대해서 완벽히 신뢰하게 되었으니까요. 의식의 흐름이 큰 빛과 합쳐졌을 때, 전 부탁했습니다. 저승에서 알게된 느낌과 깨달음을 절대 잊지 않게 해달라고 말이죠.

"그래요."라는 대답이 들렸는데, 제 영혼에 키스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자 저는 다시 빛을 통과해서 진동의 영역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모든 과정이 반대로 일어났고, 더 많은 정보가 제공되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되돌아와서는 환생의 과정에 대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제가 품은 몇 가지 의문에 대해서도 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어떻게 이럴 수 있지?" 환생할 것임을 알았습니다.

지구는 거대한 에너지 처리장치이고, 개별 의식은 우리가 체험하는 지구에서의 삶을 통해 진화합니다. 처음에 제가 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니 무척 기뻤습니다. 그 때 보고 경험한 것들을 돌이켜보면, 이 우주에서 한 개의 원자Atom가 되더라도 기쁠 따름입니다. 신의 인간적 역할을 맡는 것도 그렇습니다... 인간이 된다는 건 가장 멋진 축복입니다. 우리가 헤아릴 수 있는 모든 축복의 개념을 넘어설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체험하는 인간의 역할은 굉장한 것이고 장엄한 일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인생을 망치든 성공하든, 이 행성에 살고있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제가 환생의 과정을 겪게 되면 어떤 곳에서 아기의 몸으로 태어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정체성과 의식이 어떻게 진화하는지 교훈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같은 몸에 환생을 한 것입니다.

눈을 떴을 때 굉장히 놀랐습니다. 왜 그랬지는 모르지만, 상황은 이해되었습니다. 같은 몸에 다시 돌아왔다는 건 지금도 놀라운 일입니다. 방으로 왔을 때 누군가 저를 쳐다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간병인 아주머니였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제가 죽은 걸 발견하고 한 시간 반 동안 자포자기로 있었습니다. 분명히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임종했을 때의 증후군이 보였는데, 몸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죽은 상태였는지는 몰라도, 사망 후부터 의식을 되찾기까지 1시간 30분이 지났다는 것만은 알겠습니다. 아주머니는 제가 죽으면 될 수 있는 대로 몇 시간 동안 곁에 있어달라는 부탁을 들어준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청진기를 대고 중요한 생체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여러 번 확인해 보았습니다. 아주머니는 제가 정말로 죽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죽을 뻔했던 경험이 아니라, 적어도 한 시간 반 동안 죽음을 체험했던 것이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죽은 걸로 알았고 청진기로 진찰을 해보았습니다. 한시간 반 동안 혈압과 심장박동을 확인했습니다. 그 후, 전 깨어났고 빛이 밖에 있는 걸 봤습니다. 그 빛에게 가기 위해 일어나려 했지만, 침대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아주머니는 "쿵"하는 소리를 듣고 달려와서 제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걸 목격했습니다.

몸이 회복되자 저승에서 겪었던 일이 기억났는데, 그러면서 굉장한 놀라움과 경외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걸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현실감이 없어지면서 자꾸만 "내가 살아 있는 건가?"라고 묻게 되었죠. 이 세상이 마치 꿈꾸는 것보다도 더 이상한 현실 같았습니다.

사흘이 지나자 다시 정상적인 감각을 되찾기 시작했고, 제 평생 그 어떤 때보다 색다르고 분명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우주를 여행했던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제가 만났던 그 어떤 사람에게도 잘못된 점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에는 굉장히 판단을 많이 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인생에 정말로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저 말고 모든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그 모든 관점이 분명해 졌습니다.

석 달 정도가 지났습니다. 제 친구 한 명이 저보고 검진을 받아야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서 이런 저런 검사를 받았습니다. 정말로 멀쩡하다는 기분이 들었는데, 안 좋은 소식을 들을 까봐 두려웠습니다.

검진을 받기 전후에 어떤 의사가 이렇게 말한 게 기억납니다. "글쎄요, 현재 아무런 이상이 없군요."

"정말 이게 기적 맞죠?"라고 물었습니다.

그 의사는, "아니에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일시적인 완화증상이에요."

그는 별 감흥이 없는 듯이 행동했지만, 이걸 기적이라고 느낀 저는 그 누구보다 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인생의 신비로움이란 지성과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우주는 전혀 지적인 과정을 밟지 않습니다. 지성은 이로운 것이며 멋진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지금 우리의 가슴과 우리 자신의 더욱 현명한 일부분 대신에 우리 모두가 거치는 과정일 뿐입니다.

지구의 중심은 거대한 에너지 변환기입니다. 지구의 자기장 그림과 비슷합니다. 우리 삶의 순환주기란, 환생한 영혼들이 그 중심에 끌려서 들어오고 다시 통과해 나가는 식입니다. 여러분이 인간적인 수준에 도달하고 있다는 신호란, 개별 의식을 진화시키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동물들은 집단 영혼을 갖고 있어서 집단 영혼으로 환생합니다. 사슴은 줄곧 사슴이 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방금 한 인간이 태어났다는 것은, 그 사람이 기형아이든 천재이든, 여러분이 개별 의식을 개발하는 중에 있음을 나타냅니다. 개별 의식은 인류라고 불리는 집단의식의 일부입니다.

인종이라고 하는 것도 개성을 가진 군집임을 알았습니다. 프랑스, 독일, 중국과 같은 민족은 모두 각자만의 개성을 갖고 있습니다. 도시들도 개성을 갖고 있는데, 각 지역의 집단 영혼들이 특정인을 끌어당깁니다. 가족들도 집단 영혼을 갖고 있습니다. 개인의 정체성은 프랙탈 도형의 가지처럼 진화합니다. 집단 영혼은 개별성 속에서 탐험을 합니다. 우리가 품고 있는 다른 여러 종류의 의문들이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느님은 신적 자아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을 통해서 말이죠. 그러니, 의문 나는 것들을 질문하면서 스스로 탐구하세요. 그러면 여러분의 자아를 발견하고 그 자아 속에서 신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자아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우리 모두가 영혼의 짝(쏘울 메이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같은 영혼의 일부분인데, 같은 영혼이 수없이 많은 창조적인 방향으로 분열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의 저는 이제껏 만난 모든 사람들을 그토록 찾아왔던 제 영혼의 짝으로 봅니다. 또한 그 이상으로, 여러분이 만나게 될 가장 위대한 영혼의 짝이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우리 모두는 남성이면서 동시에 여성입니다. 우리는 이런 성격을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경험하고 환생할 때도 경험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외부에서 궁극적인 영혼의 짝을 찾고 있다면, 절대 찾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영혼의 짝은 밖에 없습니다. 마치 신이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신을 보려면 "저기 밖"을 보지 마세요. "여기 안쪽"을 들여다보세요. 여러분의 자아를 통해 바라보세요. 지금껏 해보았던 가장 훌륭한 연애를... 여러분의 '자아'와 해보세요. 그러면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될 겁니다.

지옥이라고 불리는 곳에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굉장히 놀라웠습니다. 사탄이나 악마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 보다는, 모든 사람이 독자적으로 체험한 인간적인 불운, 무지, 알지 못함의 어둠 속에 떨어졌던 것입니다. 지옥이란 마치 불행한 영원의 세계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제 주위에 있던 수백만의 영혼들 모두가 작은 별빛 하나를 이용할 수 있었는데도, 아무도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만의 슬픔과 고통과 불행으로 마음이 몹시도 손상된 것이었죠. 그러나 영원한 세계처럼 보였던 그곳에서, 저는 엄마 아빠의 도움을 외치는 아이처럼 그 작은 빛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그 빛이 활짝 열리면서 바로 앞에 터널을 만들었습니다. 모든 두려움과 고통으로부터 멀어지게 해주었습니다. 지옥이란 바로 이런 곳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일은 함께 손을 잡고 모이는 법을 배우는 겁니다. 지옥의 문은 지금도 열려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다함께 손을 잡고 지옥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그 빛이 제게 와서 거대한 황금빛의 천사로 바뀌었습니다.

"당신은 죽음의 천사인가요?"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빛이 설명하길, 자신은 저의 대령(大靈)이자 상위자아 매트릭스라고 했습니다. 영겁의 머나먼 때부터 있었던 우리 자아의 일부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전 그 빛에 이끌려 들었습니다.

곧 우리의 과학은 영을 측정할 것입니다. 굉장한 일이 되겠지요? 우리는 정묘한 에너지 혹은 영의 에너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장치를 고안해 내고 있습니다. 물리학자들은 이 원자 충돌기를 이용해서 원자가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지 확인합니다. 쿼크quark와 참charm같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까지 알아냈습니다. 음, 언젠가 과학자들은 이 모든 요소들을 하나로 엮는 작은 것까지 알아낼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도 알아낼 겁니다. 원자 충돌기를 가지고서, 과학자들은 여기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낼 뿐만 아니라 어떤 입자를 만들어 내고 있기도 합니다. 그 입자 대부분이 1백만 분의 일초와 1억 분의 일초 동안만 지속되는 것들이니 참으로 신에게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살면서 창조도 행하고 있음을 이제 막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영원forever을 보았을 때 어떤 영역에 들어섰는데, 그곳에는 모든 지식을 얻으면서 다음 프랙탈(레벨)을 창조하기 시작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탐험을 할 때 창조할 권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은 우리를 통해 스스로 확장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돌아온 이 후에도 자연히 그 빛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명상 중에 언제라도 그 공간에 들어서는 법을 배웠습니다. 여러분 모두 이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 빛을 체험하기 위해 꼭 죽을 필요는 없는 거죠. 여러분은 이미 그 빛과 연결되어 있고 빛은 여러분의 도구(육체) 안에 있습니다.

육체는 존재하는 가장 장엄한 빛의 몸입니다. 몸은 굉장한 빛의 우주입니다. 영은 우리에게 몸을 벗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신이 되려 노력하지 마세요. 신이 여러분으로 되고 있으니까요. 바로 여기에서.

지성(마음)은 마치 우주를 뛰어 다니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지성이란 그렇게 뛰어다니길 원하고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 지성에게 묻습니다.

"너의 어머니(역주: 상징적인 의미임)가 이 일과 무슨 관련이 있었지?"

그건 다음 단계의 영적 각성입니다. 오! 나의 어머니여! 느닷없이 여러분은 에고를 버리게 되는데, 여러분만이 이 우주에 있는 유일한 영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빛에게 또 한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천국이란 뭐죠?"

그러자 지금까지 창조되었던 모든 천국을 보여주었습니다. 천국이란 열반Nirvana의 경지, '행복한 사냥터'(역주: 인디언 전사나 사냥꾼들이 죽게 되면 마음껏 사냥과 연회를 즐길 수 있다고 믿는 곳) 등을 가리킵니다. 그런 곳들을 가보니 우리가 창조한 사념체의 창조물들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재처리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얼 창조했든 우리 자신의 일부를 그곳에 남기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지만 그게 영혼의 전부는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당도 구경했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모습의 천당을 그리면서 하나님을 영원히 숭배하며 그분 앞에 서있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저도 그런 상상을 했지만 정말 따분하더군요! 우리가 전부 이런 곳에 가게 되는 걸까요? 그런 상상은 유치합니다. 누군가를 기분 나쁘게 만들고자 함이 아닙니다. 어떤 천당은 매우 흥미롭고 또 어떤 천당은 매우 따분합니다. 고대인들의 천국이 더 흥미로웠습니다. 미국 원주민들의 '행복한 사냥터'같은 곳이 그렇습니다. 이집트인들도 환상적인 천국관을 갖고 있습니다. 천국의 종류는 상당히 많습니다. 모든 천국에는 여러분만의 해석이 담긴 프랙탈이 있습니다. 특정 종교의 신만을 믿는 집단 영혼에 속해 있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 때 여러분은 한 야구장에 같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각자의 천국은 다소 다릅니다. 천국은 이승을 떠날 때의 여러분 자신의 일부입니다. 죽음은 삶을 뜻하지 천국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저는 신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좋은 종교가 무엇입니까? 어느 종교가 옳습니까?"

그러자 하느님이 사랑을 듬뿍 주시며 말했습니다. "전 상관하지 않아요."

참으로 놀라운 은총이었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이곳에서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뜻이었습니다.

궁극의 하느님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어떤 종교를 믿는가는 중요하지 않아요."

종교는 왔다가 사라지고 변화합니다. 불교도 기독교도 영원히 머물지 못했습니다. 그 모든 종교는 더 많은 계몽을 위한 것입니다. 지금 모든 시스템 속에 더 많은 빛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개신교 개혁운동처럼 영성계에서도 극적인 개혁이 일어날 것입니다. 자신의 종교가 유일하다고 믿으며 다른 종교와 대립하며 싸우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 종교, 철학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종교를 소유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종교적인 철학을 바탕으로 커다란 조직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전 상관하지 않아요."라고 말했을 때, 즉시 이해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게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돌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우리의 관심사이며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하느님이 특정 종교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의 관심사는 영성의 에너지 방정식입니다. 궁극의 하느님은 여러분이 기독교인인지 불교도인지 등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 모든 종교는 전체 중에서 개화하는 하나의 단면입니다. 제 바램은 모든 종교가 이 점을 깨닫고 서로를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건 모든 종교를 끝장 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똑같은 신을 두고 말합니다. 삶을 사세요. 사람들은 각기 다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또 그 모든 조각들이 큰 그림을 만듭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저승에 갔었을 때 저는 독성 폐기물, 핵미사일, 인구과잉, 열대우림 훼손 등의 두려움을 상당히 많이 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되돌아 와서는 모든 문제 하나 하나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핵폐기물을 사랑합니다. 원폭 구름을 사랑합니다. 그건 오늘날 우리가 만들어낸 것 중 가장 신성한 만다라이고 하나의 원형(元型)입니다. 지구상의 모든 종교나 철학보다도 더욱 짧은 시간에, 우리 모두를 새로운 수준의 의식으로 끌어 올렸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행성을 50번이나 500번 정도는 핵무기로 날려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 결국에 우리 모두가 지금 여기에 다같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한동안 사람들은 계속해서 더 많은 폭탄을 쏘아 올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 후에 우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그런 짓을 할 필요가 없지."

이제 우린 지금껏 그 어떤 때보다 더 안전한 세계에서 실로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안전해 질 것입니다. 그래서 독성 폐기물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가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피터 러셀(역주: '초월명상'의 저자)이라면 이런 문제들이 지금은 "영혼이 다룰 문제"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해답이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열대 우림 훼손속도가 늦춰질 테고, 50년 후면 이 행성에는 전보다 더 많은 나무가 자라게 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환경에 관심이 있다면, 계속 환경에 관심을 쏟으세요. 여러분은 깨어나고 있는 시스템의 일부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실력을 거기에 쏟아 부으세요. 하지만 의기소침하지는 마세요. 그건 더 큰 그림의 일부입니다.

지구는 그 자신을 길들이는 과정에 들어서 있습니다. 다시는 과거처럼 거친 상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거대한 야생지와 보호구역 안에서 자연은 번성하게 될 것입니다. 원예와 보호구역이 미래에 큰 명소가 될 것입니다. 인구증가는 의식의 전환을 일으킬 적정한 에너지 수준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의식 전환이 일어나면 정치, 돈, 에너지에 변화가 생길 것입니다.

꿈을 꿀 때 무슨 일이 생기는 걸까요? 우리는 다차원적 존재입니다. 생생한 꿈을 꾸면서 다차원에 접속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우주는 신의 꿈입니다. 제가 본 바에 의하면, 인간이 아주 작은 알맹이 같은 은하계의 알맹이의 또 알맹이 같다는 것이 있습니다. 우주에는 굉장히 거대한 시스템이 있는데 우리는 평균적인 시스템의 일부에 속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미 의식의 우주를 통틀어 전설적인 존재입니다. 가이아/지구에 있는 보잘 것 없는 인간 한 명이 우주에서는 전설적인 존재라는 겁니다. 우리가 전설적인 존재로 된 이유 중 한 가지가 꿈입니다. 우리는 전설적인 몽상가입니다. 실제로, 우주 전체가 삶의 의미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의미에 대한 최고의 해답을 찾아낸 존재는 작디작은 몽상가였습니다. 우리는 꿈을 통해 그 답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꿈이 중요한 것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체험을 한 후에 전 정말로 삶과 죽음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DNA 실험이 엄청난 비밀의 문을 열었던 것 같습니다. 곧 우리는 한 육체에서 원하는 만큼 살 수 있을 것입니다. 150년 즈음 후면 여러분은 채널을 변경하고 싶어질 정도로 직관적인 영적 감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같은 몸으로 영원히 산다는 것은 환생만큼 창조적인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속해 있는 이 환상적인 에너지 볼텍스의 기운을 바꾸는 것만큼 창조적인 일도 아닙니다. 실로 삶과 죽음이라는 지혜를 알게 되고서 그것을 즐길 날이 올 것입니다.

지금처럼 우린 이미 영겁을 살아왔습니다. 입고 있는 몸은 영원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끝없는 생명의 흐름으로부터 오고 빅뱅과 그 너머로 되돌아갑니다. 육신은 농도 짙은 정교한 에너지로 다음 삶에 생명을 줍니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다함께 손을 잡고서 지옥에서 벗어날 겁니다."


< 멜렌-토마스 베네딕트 >

원문 출처 http://www.near-death.com/experiences/reincarnation0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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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새롭게 하소서 - [기적을 만드는 믿음] 늘푸른교회 후쿠시게 다까시  
조회수 371 날짜 2004-12-20
후쿠시게 다까시
(인천 늘푸른교회)

뇌의 반을 쓰지 못하는 뇌경색의 아픔 속에서 뜨겁게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의 은혜를 전하기 위해 세상에 나온 후쿠시게 다까시.

미신적 풍습이 넘치는 일본에서 나고 자란 다까시는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좌절치 않고 성공을 꿈꾸며 치열하게 살아왔다. 그 결과 전자과학기술 분야의 권위자로 자리잡게 되고...

그러나 10개월 전 갑작스런 뇌경색으로 의식이 잃은 다까시는 무려 21일간 혼수상태에 빠져 사경을 헤매게 된다. 그 때 다까시를 찾아온 '나사렛 예수!'. 무의식 중에 만난 하나님을 영접하고 함께 성경말씀을 나누었다는 다까시는 특별한 성령 체험을 고백하기 위해 '새롭게하소서'를 찾았다.



 무료함. TV는 인간이 발명한 기계 중 무료함을 달래줄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면서 끊임없는 시청각 자극으로 인간의 생각을 도둑질해가는 최악의 발명품이다. 무료함을 달래려고 채널 쇼핑을 시작했다. 잘 보지않는 CBS였는데 왠지 내 눈길을 끌게된 한 일본 사람 다까시. 이 사람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면이 있다. 일단은 다까시란 사람이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다는 사실. 또한 21일간 코마상태에 있으면서 임사체험(사후 세계를 방문하고 돌아온 사람들의 경험담을 말한다)을 했다는 사실. 코마상태에서도 자기 주변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방문하고 돌아온 사후세계에서 만난 사람은 다름아닌 2000년전 십자가 처형당한 예수다. 다까시는 누구인지 몰랐지만 그가 나사렛 예수라고 본인을 소개했다. 그는 21일만에 깨어난다. 그리고 그가 겪었던 놀라운 일을 아내에게 소개한다. 아내는 한국인이고 이전에 기독교인이었었다. 아내는 믿지 않았다. 뇌를 다치다보니 정신이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가졌다. 그러나 다까시가 중환자실에서 아내가 입었던 옷색깔이며 들어온 병실 입구의 모양등을 이야기하고 알지도 못하던 성경이야기를 정확히 하는 것을 보고 사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임사체험은 어찌보면 흔한 일이다.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것, 우리에겐 모두 거짓말같아 보이지만 세상에는 많은 임사체험자들이 있다. 과연 그는 2000년전에 죽은 예수를 만난 것일까? 예수는 아직도 건재하고 있고 인간의 생사에 관여하고 있단 말인가? 상당히 흥미로운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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