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숙명宿命과 운명運命, 그리고 자유의지 ]
숙명과 운명, 이 두 가지는 근본적인 개념에 있어서 지대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통 비슷한 의미로 쓰여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현대 사회라는 구조 하에서 '운명' - 이 참으로 마음 편한 단어는 지금부터 그 차이점이 서술될 숙명과 운명 두 가지 개념 모두를 두루뭉실하게 지칭하고 있다 - 이라는 것은 일종의 '메타meta' 접두어가 붙는, 동서양의 갖가지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인 옛 개념들 중 하나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현대인에게 있어 운명이라는 개념은 현실성이 없다. 그저, 삶의 한 변연에서 가끔 듣고 머리 속에 떠올렸다가 다시 일상로 돌아가면서 사라지는 것들 중 하나일 뿐이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오늘의 운세'를 보고 나서 그 문장에 대해서 며칠 동안 머리 싸매고 궁구할 정도로 심각하게 여기는 사람이 세상에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쓰여지고 있는 이유는, 저 두 가지 비슷해 보이는 개념은 분명히 그 뿌리에서부터 다른 속성과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해서 약간이라도 생각해보거나 그 차이점에 대해서 들어본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 "숙명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경우에도 인력으로 바꿀 수 없는 생의 행로이며, 운명은 그것 자체로서는 인간의 삶을 이끌고 지배하지만 인간의 의지가 개입될 여지를 남겨두고 있어 그 과정에서 변화될 가능성이 있는 숙명의 연장선이자 실제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체이다."
정확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일단 이상의 두 가지 명제는 앞으로 서술할 숙명과 운명의 개념의 전제로 쓰여질 것이다. (그 근거는, 단순히 저 두 가지에 대해 관심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언어와 개념은 언중의 도구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덧붙이자면, 한 개인의 출생시를 근거로 하여 그 사람이 타고난 속성과 영위하게 될 삶의 양상을 파악하는, 보통 命理學이나 推命術이라 불리는 방법 - 대표적으로 자평명리, 기문둔갑, 자미두수, 혹은 서양의 Astrology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 을 이용하는 이들은 위에서 언급한 다소 뜬구름 잡는 듯한 정의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즉, 그들에게 있어 어떤 사람의 '숙명'이란, 그 당사자가 태어나는 순간 그 사람의 개체성을 형성하는 시간적, 공간적 요소들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집약, 정리한 일정한 도식적 결과물로서 표현된다. 자평명리에서의 本命四柱, 자미두수에서의 先天明盤, Astrology에서의 Natal Chart/Nativity라고 칭하는 개념들이 바로 그 '숙명'의 해석이자 표현인 것이다. 그에 비하여 그 사람의 '운명'은, 시간축 중의 특정한 한 순간으로 대표되는 '숙명'을 기점으로 하여 일정한 규칙 하에 운행되는 '時空의 흐름'과 그 흐름이 그 개체에게 끼치는 다채로운 영향력의 향방을 일컫는다. 위와 같이, 그것은 자평명리에서의 大運과 身數, 자미두수에서의 大限, 流年, 流月, Astrology에서의 Providence(Progression & Transit)의 개념으로 도식화될 수 있다.
물론, 지금 소개한 개념들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큰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다만 처음에 서술한 숙명과 운명의 기본적인 개념에 대한 기존의 접근 방식을 제시한 것은 어느 정도의 의미는 가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지금 이야기되고 있는 숙명과 운명을 정의하는 태도가 그 기존의 접근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명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개념은 개념일 뿐이다. 인간들의 불완전한 언어논리라는 샬렛에서 배양된 제한된 결과물이 반드시 실상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수학이라는 학문과 그 안에서 쓰여지는 수많은 개념들은 대단히 정교하고 유용하지만, 우리가 접하고 있는 이 현실 자체가 남김없이 그 학문 안에 반영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수학은 '쓸데없이 다양하다 못해 예외 투성이인' 현실의 디테일한 부분은 공리라는 도구를 통해 필요한 만큼 무시하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요컨대, 인간이 운명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서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실상' 운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운명이란 것은 당 개체(자신과 주위 환경에 대한 인식력을 가진 모든 Sentient Being을 지칭한다)의 숙명에 대한 인식력이 결여된 상태에서 色界의 虛像으로서만 - 우파니샤드에 언급된 광의의 Maya의 개념이다 -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우주의 종적인 무한성 때문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의 숙명에 대한 인식력은 언제나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결국은 언제나 운명이라는 개념은 존재하게끔 될 수밖에 없다) 숙명의 존재와 그 위상에 대해서 여실히 깨닫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운명이라는 가상의 개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숙명의 본질이 가려진 상태에서만 운명이 진짜처럼 보이게 되는 이 기전은, 당 개체의 시간에 대한 인식 양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운명이라는 가상의 범주 하에서 개체의 인식력 결여는 '미래'라는 미지의 개념에 대한 변화 가능성, 즉 개체의 선택과 행동에 따라 그 결과인 미래가 유동적으로 형성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그 믿음의 근저에는 '과거'의 선택이 지금의 '현재'를 낳고, 현재의 선택이 그에 따른 특정한 미래를 낳게 된다는, '실체로서의 시간'이 존재한다는 대전제가 깔려있다.
그러나 숙명이라는 필연적인 범주 하에서는, 모든 것이 우연적인 변화가 허용되지 않은 채 인과율의 예외 없는 주시 하에 흘러가고 있다는 인식이 충족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인식이 유지되는 한 그 개체에게 '가능성'이란 개념은 단순한 허상에 불과하고, 그러한 파악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시간은 그 실체로서의 의미를 잃는다.
실체로서의 의미라 함은, 그것에 관련된 개체가 그것을 '정말로 존재하고 또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라고 굳게 믿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개체에 대해서 시간이 실체로서의 의미를 잃었다고 해서 - 애초부터 허상이었던 무언가를 실제로 존재한다고 망령되이 믿어버리고 마는 일이 어리석음을 깨닫고 즉시 그만두었다고 해도 - 시간의 흐름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즉, 色의 형성 이전에 위치하는 空의 이치를 깨달았다 해도 눈앞에 분명히 놓여져 있던 色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시간은 여전히 그 개체에 대해서 존재하고 있으나, 숙명이라는 것의 속성 상 특정한 과거는 오직 특정한 한 가지의 현재를, 그 현재는 반드시 특정한 한 가지의 미래로 이어지게 된다. 이 기가 막힐 정도로 매끈하고 일관적인 흐름은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축의 양극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며, 그 무한한 길이의 선분 - 물론 중간에 끊어지는 경우는 없지만 이 선분의 양태는 직선이 아닌 곡선이며 또한 그렇기 때문에 가끔씩 꼬이기도 한다 - 이 지닌 털끝만큼의 흐트러짐조차 허용하지 않는 일관성은 '예외'에 대한 가능성을 완벽하게 삭제한다. 그로 인하여 시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세계는 그 어떠한 변동의 여지도 없이 '스스로 그러한' - '自然'스럽게 - 방식으로 흘러갈 뿐이고, 그러한 인식 하에서 시간은 그 숙명의 일정한 흐름 안에서 매우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자동차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마땅히 그 바퀴가 굴러가야 한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바퀴가 굴러서 이동하는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바퀴 자체가 아닌 운전석의 핸들이다. 바퀴는 생각 없이 그저 굴러가고 있지만 자동차의 방향은 이쪽저쪽으로 계속 변한다. 거꾸로, 자동차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와 전혀 무관하게 바퀴는 변함 없이 굴러가고 있다. 단지 그것뿐이다. 게다가 임의의 누군가가 자동차를 운전할 때 '바퀴가 굴러가고 있다'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정작 그가 운전 중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며 신경을 쓰게 되는 건 그 바퀴의 회전 여부가 아닌, 당장 두 손으로 잡고 있는 눈앞의 운전대를 어느 쪽으로 돌리는가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서 속도의 조절에 대한 부분은 인간이라 분류되는 종의 일반적인 한계 너머의 일이므로 언급하지 않겠다)
시간의 흐름은 공간의 차이를 낳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은 그러한 시간의 흐름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 천체의 자연스럽고도 정밀한 주기적 이동에서, 흔히 인간들이 일컫는 '운이 좋다' 내지는 '운이 나쁘다'라는 느낌을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그 일정한 시기와 일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선택을 해서 앞으로 자신의 행로를 정하고, 그에 따라 그들의 미래가 변동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과연 그들은 자신의 '자유의지' - 지금까지 언급한 '숙명과 대비되는' 운명에 대한 인간의 믿음은 자유의지가 정말로 존재한다고 믿고 싶어하는 실로 애처로운 맹신과도 직결된다 - 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인가?
당연히도 그렇지 않다. 태양과 지구와 달을 비롯한 수많은 천체들이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서로와 관계하며 운행하는 현상은, 그저 숙명의 일환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그들에게는, 의지에 의해 변동이 가능한 운명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假像뿐인 운명의 不在는, 자신의 개체성을 과신하는 우리와 같은 인간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예외 없이 적용된다. 그저 인간은 자신을 얽어매고 있는 시간과 공간이 가지는 나름대로의 특이성이, 각각 독자적인 의미를 우리에게 부여하고 있다고 믿고 싶을 뿐인 것이다. 인간은, 우리는, 나는, 당신은, 어째서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어야 하는가? 반드시 그래야 할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처음에 언급했던 명리학에서의 숙명과 운명의 개념으로 돌아가보겠다. 명리학적인 관점에서 운명은 大運이라는 형태로 도식화되지만, 그 大運의 방향과 자세한 양상이 결정되는 기준점이 되는 것은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출생시의 도식으로 대표되는 숙명이다. 출생한 시각(숙명을 상징하는)을 기준점으로 삼아 흘러가게 된 大運(운명을 상징하는)이며 또한 그 흐름은 도식을 해석하는 이의 판단을 분화시키면 분화시킬수록 실로 두려울 정도로 다채롭게 펼쳐지지만, 일정한 법칙 하에서 그 복잡다단한 흐름의 구조는 결국 정확한 출생시라는 깃발이 언제 어디에 꽂히는가에 따라 100% 내정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단 1%의 예외도 있을 수 없다. 만약 있다면, 그 때까지 '숙명'이라고 믿어지던 것은 사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숙명이 아니라, 기존에 인식되던 범위보다 약간 더 넓은 축을 가진 운명의 한 톱니바퀴에 불과할 뿐이다. (그것 역시 假像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위에서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임의의 개체가 지니게 되는 '무한한' 숙명에 대한 인식력은 언제나 그 완전함을 기할 수가 없기 때문에, 空과 色을 동시에 접하고 있는 이 諸行無常의 세계에서는 항시 운명이라는 개념이 마치 실체로서의 영향력을 지닌 것처럼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虛像에 대한 것이든 實像에 대한 것이든, 개체의 믿음은 그 자체로서 현실을 형성하고, 또한 존재를 창조한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되고 창조된 모든 것들이 바로 色界를 구성하게 된다. 인간에게 있어서도 운명이란 것이 존재하는 한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 역시 존재하게 되고, 근본적으로 허상에 불과한 자유의지지만 그러한 믿음 하에서라면 인간들에게 실체로서의 주재력을 발휘할 수 있게끔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운명은 존재하는가? 그리고 자유의지 역시 존재하는가?
존재한다.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들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던 이가 숙명의 절대성에 대한 여실한 인식을 하기 이전에까지만 국한된다. 그 이후에는, 그것들의 존재는 유지되지만 그 개체에 대한 의미와 영향력은 사라지고, 결과적으로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