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지켜라! 일반판 - 아웃케이스 없음
장준환 감독, 신하균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여기 한 인물이 있습니다. 이름은 이병구,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몇년째 식물인간 상태입니다. 학교에서 교사에게, 교도소에서 교도관에게 구타를 당하고 공장에서는 동원된 깡패들의 손에 여자친구를 잃습니다. 그가 겪은 폭력은 80년대가 우리에게 주었던 폭력입니다. 그는 그 폭력을 고스란히 받은 세대입니다. 그는 가장 보편적인 80년대를 살아왔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미쳤습니다.

여기서 영화는 한발 더 나아가 그 모든 억압자들을 '더러운 외계인새끼"로 만드는 병구를 보여줍니다. 병구의 생각은 강만식 사장이 "모두 미쳤어, 정상이 아냐" 라고 말하는 대목과 관련이 있습니다. 서로 죽이고 파괴하는 인간의 파괴본능은 80년대의 시대적인 문제, 사회적 대립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났고, 병구는 그런 사회적 폭력에 노출되었습니다. 그런 폭력은 그가 견딜 수 없었고, 그에게 폭력을 행사한 모든 사람들이 '더러운 외계인새끼'가 아닌 이상, 그러한 무자비한 폭력은 인간으로써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고, 스스로를 설득하였던 것이죠.

이 영화에서는 그러한 자기합리화를 진지하게 말하는 병구를 코믹스럽게, 또 굉장히 처절하고 쓰게 그려냅니다. 병구의 마지막 말인 '지구는 누가 지키지'는 웃긴 대사지만 차마 웃을 수 없습니다.
형사가 찾아와 하루를 묵게 되었을 때의 병구는 자신이 그저 '미친 사람'일 뿐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평화로운 외계인을 믿는 라엘리안적 광신교도를 연기합니다. 그는 정상적인 사람처럼 자신을 꾸밀 수도 있을 정도로 자의식을 가진 사람이에요. 그리고 '내가 미쳐가고 있을 때 뭘 했어"라고 울부짖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그가 가진 '신념'을 깨뜨려서 '진실'을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 그 진실이 단순한 세상의 참혹함을 말하는 진실이 아니라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그런 달콤한 진실을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달콤한 진실은 세상에 없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은 알고 있었으니까요. 병구는 달콤한 거짓말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의 '거짓말'은 쓰디쓴 거짓말입니다.

드라마의 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순이와의 멜로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지요. 우스꽝스러운 순이의 캐릭터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래서 더 소박한 느낌이 듭니다. 요약된 줄거리만 보자면 정통 멜로지만 주변의 상황과 캐릭터가 너무나 비틀려 있습니다. 만약 순이역을 전지현이 (엽기적인 그녀 식으로)했다면 어땠을까요? 뭐, 어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과장된 순정만화가 지구를 지켜라!식은 아니겠지요. 지구를 지켜라!는 슬랩스틱보다는 언밸런스한 진지함(개그)과 우스꽝스러운 슬픔이 있어야 하니까요. 그녀의 죽음은 병구의 옛사랑과도 같은 결말이었지만, 단순한 슬픔은 아니었습니다. 병구의 마지막 말이 '순이야 사랑한다'가 아니라 '지구는 누가 지키지'인 것은 그만큼 멜로의 비중이 작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그 상황과 인물의 표정만으로 모든 감정이 와닿을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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