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풍경
신경림 지음 / 문이당 / 200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가랑비가 조금씩 내리는 저녁, 거리에 네온사인이 하나둘 켜질 즈음, 서점 한 귀퉁이에서 신경림의 산문집 <바람의 풍경>을 만났다. 이 책의 첫 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까마득히 먼 고개 위 하늘에 노을이 발갛고 그 노을 속으로 새까맣게 날아 들어가는 길가마귀떼들, 내 기억의 영사막에 찍혀 있는 가장 오랜 그림의 하나로, 나는 지금도 노을을 보면 이 그림부터 떠오른다.”

‘농무’의 시인, 신경림은 예순다섯 해의 삶을 더듬으며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조심스레 이야기한다. 시인은 기억의 영사막에 찍힌 오래된 그림들을 하나씩 꺼내놓는다. 그 그림 속에 찍힌 이들을 하나씩 회상하며 시인도 그림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던 이들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그 오래된 그림은 항상 길과 함께 있었다.

책을 구하기 위해 새우젓장수를 따라 나섰다가 바라본 해돋이, 당숙의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서 봤던 유년시절의 노을, 육이오때 양담배 장사를 하다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오던 배고픔과 피로에 지쳐 걷던 고통스러웠던 길, 무기력과 절망감에 휩싸였던 20대의 실의와 좌절을 벗어나게 해주었던 길, 부끄러움과 고난했던 길이 시인의 기억 속에 놓여 있다.

“생각해 보면 내게는 길만이 길이 아니고 내가 만난 모든 사람이 길이었다. 나는 그 길을 통해 바깥세상을 내다볼 수 있었고 또 바깥세상으로도 나왔다. 그 길은 때로 아름답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했다.”

이 산문집은 시인이 시간날 때 조금씩 써내려간 그런 글이 아니다. 모질었던 지난 세월에 대한 진지한 자기 성찰을 위해 쓰인 글이다. 사랑하는 세 사람을 떠나보내야만 했던 안양 비산동 산비탈의 집, 먼저 간 친구들 - 김관식, 천상병, 방황 속에 헤맸던 20대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야만 했다.

“아내는 이 집에서 겨우 일년을 살았을 뿐이다. 시름시름 앓았으나 위궤양이라해서 별것 아니려니 했던 것이 막판에 위암으로 판정을 받고 한 달 만에 세상을 떴다. 아내의 장례가 치러지던 날까지도 집에서는 아내가 벽과 마루에 칠한 페인트와 니스 냄새가 가시지 않고 있었다.”

삶에 대한 진지한 자기 성찰을 볼 수 있는 시인의 글자 하나하나를 따라가다 보면 지난 역사의 한쪽을 마주할 수 있다. 그 속에는 웃지 못 할 코미디 같은 얘기도 있다.

「 북부 경찰서 끌려갔을 때다. 중요한 사안이니까, 라면서 정보계장이 직접 조사를 맡았는데, 어디서 태어나서 어떻게 자랐으며, 부모는 어떠한 사람이며 친척에는 누가 있고, 무슨 학교를 다니고 누구와 사귀었으며… 조사라는 것이 종일 이렇게 자서전을 쓰는 일이었는데 글씨 하나 틀려도 계장은 신경질을 내며 박박 찢어버리고 다시 쓰게 했다. 아침 일찍 끌려가 종일 이 짓을 하여 지칠 대로 지쳤을 때였다. 나는 나 자신이 불쌍해서 혼잣소리를 했다. “원고료 없는 글 많이도 쓰는구나!“」

시인은 노년이 되어 책읽기의 재미에 대해 다음처럼 이야기한다.

“책을 덮을 나이가 되어 새삼스럽게 붙인 책읽기의 재미는 이십대 때, 또는 삼사십대 때와는 아주 다르다. 세상을 그만큼은 살았으니 젊어서는 보지 못했던 시나 소설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는 꾀도 생기게 마련이다.”

시인의 필력을 새삼 접하다보니 오랜 만에 농무가 읽고 싶어진다.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시집을 꺼내 펼쳐든다. 그의 노래 소리가,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거나/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시인의 거친 숨결이 귓전에 생생하게 맴도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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