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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구두
조조 모예스 지음, 이나경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2월
평점 :
#장편소설 #조조모예스 #마법같은위로 #타인의구두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완독 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타인의 구두>는 조조 모예스 작가님의 장기가 무엇인지 다시 확인하게 하는 소설이었습니다. 런던 로열홀러웨이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오랫동안 언론계에서 일한 뒤 소설가로 전향한 조조 모예스 작가님은, 늘 대중적 흡인력과 정서적 설득력을 함께 잡는 데 능하신 분이지요. 번역은 서울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나경 옮긴이께서 맡았는데, 인물의 감정선과 장면 전환의 속도를 한국어로 매끄럽게 옮겨낸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미 비포 유>가 사랑과 상실을 통해 한 인물의 각성을 밀어붙였다면, <타인의 구두>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 “자기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일상적이고도 유쾌한 방식으로 변주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소설의 출발점은 다소 희극적입니다. 런던의 스포츠센터에서 샘과 니샤의 운동 가방이 뒤바뀌고, 그 안에 들어 있던 낡은 플랫슈즈와 붉은 하이힐이 서로의 삶을 침범합니다. 그러나 조조 모예스 작가님은 이 가벼운 설정을 곧바로 여성의 경제적 취약성, 돌봄 노동의 과잉, 결혼 제도의 불균형 같은 묵직한 문제로 연결하십니다. 샘은 우울증에 빠진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짊어지고, 직장 상사의 괴롭힘과 부모의 무심한 의존, 병든 친구를 향한 책임감까지 혼자 떠안으며 닳아갑니다. 반면 니샤는 화려한 외양과 달리 남편의 자산과 권력 위에 임시로 허락된 삶을 살았을 뿐이며, 이혼 통보와 동시에 카드와 계좌가 막히자 자기 존재의 기반이 얼마나 허약했는지 절감하게 됩니다. 이후 샘, 니샤, 샘의 친구 앤드리아, 니샤를 돕는 재스민이 루부탱 구두를 찾아 나서는 과정은 로맨틱 코미디처럼 경쾌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타인의 시선과 제도 속에서만 유지되던 자아”가 무너지고 재편되는 과정이 선명하게 깔려 있습니다.

제가 특히 흥미롭게 읽은 지점은 이 작품이 ‘신발’을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사회적 역할의 은유로 끝까지 밀어붙인다는 점입니다. 영미소설 전통에는 사물 하나가 인물의 계급, 욕망, 정체성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경우가 자주 있는데, 이 작품의 구두도 그렇습니다. 하이힐은 매혹과 권력, 동시에 불편한 수행성을 뜻하고, 샘의 낡은 신발은 생존과 체념, 그러나 놀랍게도 발 딛는 현실감까지 상징합니다. 그러니 둘이 신발을 바꿔 신는 사건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각자가 익숙하게 연기해 온 삶의 배역이 흔들리는 순간이라고 보아야겠지요. 더 흥미로운 것은 작가님이 이를 지나치게 비극적으로 몰아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웃기고, 황당하고, 때로는 “이쯤 되면 인생이 너무 억까 아닌가요” 싶은 장면들이 이어지는데, 바로 그 리듬 덕분에 독자는 현실의 고단함을 정면으로 보면서도 끝내 인물들과 함께 다시 일어설 힘을 얻게 됩니다.

개인적으로도 샘이라는 인물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같은 처지는 아니더라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자기 몫 이상을 떠안다가 정작 자기 욕망은 뒤로 미루는 사람의 심리는 꽤 보편적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성실하다”는 평판이 어느새 “늘 감당할 사람”이라는 낙인으로 바뀌는 순간이 있습니다. 샘은 바로 그 지점에 서 있는 인물입니다. 반대로 니샤는 겉으로는 샘과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기 삶의 통제권을 남에게 맡겼다는 점에서 닮아 있습니다. 이 소설이 설득력 있는 이유는, 서로 다른 계층과 취향과 말투를 가진 두 여성을 단순 비교하지 않고, 상이한 방식으로 자기 상실을 겪은 존재들로 병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여성 연대의 이야기이면서도, 더 본질적으로는 자아 회복의 서사라고 읽힙니다. 잃어버린 것은 구두 한 켤레가 아니라 자기 결정권이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이 책은 특히 관계 속에서 자신이 점점 소모된다고 느끼는 분, 가족과 일과 돌봄 사이에서 자기 이름을 잊어버린 분, 혹은 무겁기만 한 소설은 부담스럽지만 너무 가벼운 위로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독자께 권하고 싶습니다. 조조 모예스 작가님은 대단히 읽기 쉬운 문장으로 꽤 복잡한 문제를 다루는 분입니다. 그래서 <타인의 구두>는 분명 대중소설인데도 읽고 나면 제법 많은 생각거리를 남깁니다. 삶이 무너질 때 사람은 맨발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지만, 바로 그때 비로소 자기 발의 감각을 배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구두 한 켤레가 이렇게까지 많은 것을 끌고 올 줄이야. 참 무서운 물건입니다. 인간보다 구두가 먼저 각성 버튼을 눌러버린 셈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