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누의 집 이야기
이지누 지음, 류충렬 그림 / 삼인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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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어린 시절, 시골집의 추억이 떠올랐다. 방학 때만 되면 내려가곤 했던 외갓집의 풍경들이 그리움이 되어 찾아왔다. 이 책은 단순한 집 이야기가 아니라, 잊어버리고 있었던 오래된 추억에 관한 이야기다. 

여닫을 때마다 시끄러운 나무 소리가 났던 대문, 추운 날 들어가면 온 몸이 따뜻해져오던 아랫목, 창문을 열면 산과 밭이 보이던 방, 장작을 넣어 불을 지폈던 부엌 아궁이, 그리고 아궁이 위로 구수하게 피어오르던 밥 냄새, 마루에 앉아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던 기억들. 그땐 너무나 불편하다고 투덜거렸지만 지금 다시 이 책을 통해 내가 기억해낸 것은 불편함이 아니라 진한 그리움이었다. 바로 가까이에서 온몸으로 느꼈던 자연의 체취들. 개방된 마루가 아니었으면, 산 쪽으로 나 있던 창이 아니었으면 느끼지 못했을 그 자연의 느낌들을 내가 실은 그리워하고 있음을 이 책을 통해 느낀 것이다.

이지누씨는 어린 시절, 추억의 공간인 골목에서부터 대문, 울타리, 변소, 마당, 지붕, 우물, 부엌, 마루, 창문, 구들, 방에 이르기까지 옛날 시골집의 정겨운 풍경들에 대해 자신의 추억과 함께 들려준다. 그의 옛집 이야기 속엔 그리움이 있다. 그리고 옛집 속엔 사람이 있고 삶이 있다. 정겨움 물씬 풍기는 기억들 속을 한 자락씩 풀어놓는 시와 구수한 그림들과 함께 감상하는 것은 오랜만에 지나간 사진첩을 뒤적일 때의 감상 같기도 하고, 아주 오랜만에 예전에 살던 동네를 방문하는 것 같은 가슴 싸한 느낌 같기도 하다.

따뜻한 아랫목에 묻어둔 밥 한 공기의 따뜻한 추억이 있는 구들, 장난어린 낙서로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했지만 틈 사이로 보이는 자연의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시 한편이라도 쓸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변소, 두레박으로 물을 긷다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빠져버린 우물, 고추와 토마토 등을 직접 키울 수 있게 해주었던 마당의 텃밭, 바람을 이불 삼아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곤 했던 마루... 이렇게 우리의 옛집엔 공간마다 추억이 서려 있다.

공간마다 숨어 있는 추억들을 되새김질하는 맛도 좋지만, 이 책엔 곳곳에 숨어있는 우리 옛집의 과학성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밥을 하면서도 난방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었던 구들, 통풍이 잘 되도록 문에 바른 창호지, 사람이 앉아서 편안하게 보는 눈높이만큼 설계된 천장까지의 높이는 불편하다고만 생각했던 옛집의 지혜를 깨닫게 한다.  

아파트라는 공간에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나는 베란다에서 밖을 내다볼 여유조차 없을 때가 많다. 나만의 안락함이 있다고 생각한 방은 사실은 가족간의 벽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안락하고 편안한 쉼터라고 생각했던 집이라는 공간이 실은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파트, 공동주택이라는 공간으로 획일화되어가는 집이라는 공간에서 우리의 삶도 점차 규격화되어 가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집의 양식이 변하면서 마당과 담을 잃은 것이 아니라 어쩌면 삶을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중간 중간에서 만날 수 있는 옛 시(詩)들은 집이 단순히 한 몸을 누일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삶이 들어있는 공간임을 말해주고 있다. 대문은 때로 세상을 향한 마음을 닫아버리는 기호가 되기도 하고, 창은 창작의 단상을 떠올리거나 그리움을 푸는 기억의 통로이기도 했던 것이다. 시를 감상하고 오래된 추억들을 읽으면서 집은 그 자체로 삶에의 은유임을 느낄 수 있었다.  

삶의 깊이보다 욕망의 넓이로 환산되어가는 집... 얼마나 넓은 집을 갖느냐, 얼마나 좋은 것들로 집 안을 치장하느냐가 중요해져버린 요즘, 이 책은 삶으로서의 공간인 집에 대해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었던 기억들을 되살려줌으로써 삶이 숨쉬고 있는 집에 관해 깊이 있는 생각들을 하도록 도와준다. 욕망의 쉼터가 아니라 삶을 깊이 있게 해주고 사람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집에 관해서. 방 한 칸이라도 생각만은 넓게 담을 수 있는 집, 나를 가두는 집이 아니라 나를 열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바로 그런 집에 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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