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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 Travel Notes, 개정판
이병률 지음 / 달 / 2010년 7월
평점 :
[Review]
떠나고 싶은 마음에 끌림
Ara
- 떠남과 머무름
떠난다는 것과 떠나고 싶은 것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이것에 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제 주변엔 언젠가 딴 나라로 떠날 거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가족들과 이민 갈 계획을 세웠었지만 뜻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책장엔 여행서적들과 스크랩한 파일들이 가득합니다. 저는 선뜻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잡지에 실린 사진만 보더라도 보물을 발견한 듯 열심히 가위질을 해대고, 시간이 날 때마다 인터넷 서핑을 하며 정보를 찾아 헤매는 눈빛을 말이죠. 무엇보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머지 않아 떠나게 된다는 계획을 사실처럼 말하는 그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득 딴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 사람 그 동안 떠날 생각만으로 버텨온 게 아닐까 라는 생각 말이지요. 이민 갈 계획이 좌절되고 가족들와 의견이 자꾸만 엇갈릴 때 그 사람은 가만히 돌아와 책상을 마주하고 여행 서적을 펼쳤을 지도 모르겠다는 상상도 들었습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상하게도 그를 바라봤던 내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이제는 연락이 닿지 않지만 이 깨달음은 분명 한 가지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그간 다른 사람들의 비난 어린 걱정에 동조하진 않았어도 속으로 선을 긋고 담을 쌓았던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의 벽이 허물어졌던 순간입니다.
- 지구를 마을처럼 걷는 사람
끌림은 이병률 시인이 쓴 여행 산문집입니다. 이 책에선 바람 소리가 납니다. 그 속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사람은 시인 그 자신입니다. 밤색 외투를 입고 느슨해진 카메라 끈과 편한 운동화를 한 몸처럼 끌리는 쪽을 찾아 걸어가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 여정 속에서 순간순간 마다 멈춰선 곳들은 글로, 사진으로 남았습니다. 멕시코이발사, 칸쿤의 구슬점을 치는 여자, 티베트 버스에서 만난 군인, 영국인 택시드라이버, 페루로 가는 기차에서 만난 옥수수청년, 중국 난징의 귀뚜라미할아버지까지 정말 다양합니다. 그들이 사는 삶의 풍경속으로 성큼 들어가 함께 대화를 하고 음식을 먹고 색다른 경험을 하는 시인이 친화성과 융화력이 부러웠습니다. 그는 마치 지구를 마을 어디쯤으로 여기고 여행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 나는 무엇에 끌렸던가
사실 지난 여름엔 영어를 배운 답시고 학원을 다녔습니다. 수업이 끝나면 만날 사람이라도 있는 듯 자주 이 커피숍에 왔습니다. 늘 앉던 의자에 앉아 편한 자세로 바꿔 가며 이 책을 두 번이나 봤습니다. 내일이라도 당차게 가방을 둘러 메고 떠나지 못할 것임을 잘 알면서도 페이지를 넘기면 베니스 어느 호텔에 가득 짐을 풀고 있는 나, 인도 갠지스 강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기는 나, 산토리니 섬에서 푸른 바다를 내려보며 꿈꾸는 내 모습이 상상되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목이 끌림 인가 보다.'
책을 덮고 나니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처럼 망설이기만 하는 사람과 그래도 떠나는 사람 혹은 이미 집을 벗어난 사람들까지도 넌지시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끌림'이라는 제목이 궁금하고 작은 인형처럼 보이는 다양한 여행객들이 모여 있는 겉표지가 맘에 들고 휘리릭 넘기다 보니 느낌 좋은 사진들로 가득하니까요.
그렇담 나는 어떤 것들에 끌린 걸까요. 아마도 저자의 따뜻한 분위기와 세상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책 속 짤막한 시인 소개에 이런 말이 있죠.
'사람 속에 있는 것, 그 사람의 냄새를 참지 못하여 자주 먼 길을 떠나며
오래지 않아 돌아와 사람 속에 있다.'
사람 냄새를 좋아한다는 그도 분명 향기로운 사람일 겁니다. 세상 누구와도 금세 친구가 되고 대화를 나누며 여행 중 물건을 도둑 맞거나 사기를 당하더라도 인간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이 만약 거대한 세계지도가 필쳐지고 먼 나라의 유명한 성지와 음식 사진으로 가득한 뒤 지금 당장 당신도 떠날 수 있다라거나 이 곳에서 이 것을 해보지 않고는 여행이라고 말할 수 없다라고 단정적 글이 있었더라면 얼마 읽지 못하고 덮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마치 길가다 우연히 같은 벤치에 앉아 듣게 된 이야기 같습니다. 이름도 생소한 나라와 도시가 궁금해지고 그 속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경험을 들으며 푹 빠지게 되는 것이죠. 그리곤 무릎을 털며 슬며시 일어나 사람들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은 뒷모습의 여운이 이 책이 느낌인 것 같습니다.
그 느낌이 좋아 이 책을 읽고 또 읽게 된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곤 이제는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 없는 그 사람이 떠오릅니다. 잘 지내고 있는지 아직도 이민 갈 계획을 꾸리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무엇보다 그가 떠나든 떠나지 않든 그 사람은 그대로 임을 또 내 즐거운 이웃이였다는 사실과 함께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