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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평점 :
난 농담을 시작 했어요 세상이 모두 울기 시작했을 때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사람 앞에서만큼 나를 잊어버리는 일이 또 있을까. 이번에 또 어떤 이야기를 지어내겠지 생각하면서도 점차 얘기에 빠져들고 나서는 눈이 풀리고 입이 벌어진다. 듣는 나를 의식하지 못하고 페이지를 넘기는 손의 감각도 망각한다. 어디서 나온 근거인지 모르지만 왠지 책을 읽을 때에는 진중하고 어려운 태도로 임해야 할 것 같아 허리를 펴고 자세를 고친 뒤 펴기 시작했으나 얼마를 넘기지 못하고 피식 웃음이 샌 나간다. 이어 주먹으로 배를 기습당한 듯 푸하 하며 고개를 쳐들고 웃다가 나중엔 포기하고 맘 놓고 웃어 버렸다. 엄숙하게 바로잡았던 자세는 풀어지고 자연스레 어깨에 힘도 빠져나가고 점점 이야기의 속도가 급물살을 탈수록 조바심이 나서 결국엔 침을 발라가면서까지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즐거웠던 나날을 다시 돌려주소서
한적하고 고요한 강마을에 몇 안 돼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 그러던 어느 날 그곳에 조폭들이 등장한다. 명품 옷을 입은 그들은 마을과 마을사람들을 접수하려 한다. 그러나 웬걸 만만치 않다. 도시의 유흥업소나 사채를 관리하는 일보다 어줍 짢게 생각했던 마을 사람들에게 어처구니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다. 도대체 강마을엔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사건은 무더운 여름날 행동대장인 세동이 ‘자연산 미인’인 새미를 보고 다가가면서부터 시작된다. 결국 새미와 준호 남매의 반항으로 세동은 고꾸라지고 가시에 눈이 찔려 내동댕이쳐진다. 형님으로 통하는 정묵은 새미를 포함한 마을 사람들을 쓸어버리기 위해 부하와 함께 찾아 나선다. 그러나 강마을의 모든 걸 아는 사람들의 역습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가장 먼저 험준한 지형을 맞닥뜨린 그들이 입고 온 명품 양복은 가시에 긁혀 찢겨 나가고 구두는 바위에 부딪혀 짓이겨진다. 그리고 어디선가 날아온 고춧가루 폭탄을 맞아 어안이 벙벙할 새도 없이 눈물 콧물을 흘리다가 똥 폭탄을 맞고 맥을 못 춘다. 마무리로 말벌의 공격을 받고 정신과 넋을 따로 보내버리고 만다. 웃음이 나는 건 고춧가루 폭탄을 제조한 마을 사람들 역시 던지면서 눈물 콧물을 훔쳤다는 사실이다.
우리 모두 너무 쉽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어
그러나 아니 난 후회하지 않아요
마을 사람들은 모두 말 못할 비밀을 안고 있다. 바로 가족에 대한 상실과 깊은 상처다. 그들은 모두 과거에 가장 가까웠어야 할 가족에게서 버림받았고 상처받았으며 외면당한 뒤 세상에 등 떠밀려 떠돌다 뒤늦게 강 마을에 다다랐다.
부잣집 아들인 영필은 날 때부터 금 수저를 물고 태어나 만 미터 앞에서 태평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조부와 조부모가 사고로 떠나게 된다. 기다렸다는 듯이 친척들은 게걸스럽게 재산을 가로채가고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던 영필은 결혼해 살아가지만 뒤늦게 억압되었던 분노가 폭발하기 시작한다. 아내도 자식도 돌보지 않고 평생 친척들에게 돈을 갈구하며 떠돌던 그를 돌보던 아내가 죽어 일주일동안이나 방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을 때 영필은 세상을 향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그렇게 떠돌다 도착한 곳이 강마을이었다. 생명에 있는 곳마다 손길이 닿으면 풍성해지는 치유의 힘을 갖고 있는 소희는 남편의 죽음 이후 유언장에서 자신을 위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제 서야 자신 또한 장식용 화초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방황하다 강마을에 안착한다. 이령은 또 어떠한가. 남편의 갖은 폭력과 상습적인 강간을 견디다 못해 모든 걸 빼앗기고 또 모든 모함을 뒤집어쓴 채 도망친다. 생을 버텨냈던 그녀는 강마을에 도착해서야 삶을 살아내려 한다. 그리고 어린 남매인 새미와 준호. 그들 또한 폭력과 폭행으로부터 도망쳤다. 수시로 바뀌는 엄마의 남편에게조차 성폭행을 당한 새미는 준호의 손을 잡고 뛰쳐나간다. 그렇게 불안한 마음을 안고 강어귀에 도착했다. 그리고 힘이 세고 믿음직한 여산이 있다.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마법의 빛에 둘러싸여
강마을 사람들은 모두 과거에 제도적 가족의 끈을 놓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 곁에 남아 끝 까지 가족을 지키려 했다. 그래서 억압된 자신의 감정은 돌보지 못했다. 하지만 더 이상 참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려 했을 때 그들은 세상의 먼 곳으로 도망쳤다. 핏줄로 맺어진 가족의 탯줄을 끊고 새로운 가족을 선택했다. 먼 곳으로 떠나온 마음 사람들은 세상의 끝에서 새로운 가족을 만나 비로소 위안을 받기 시작했다. 새로운 가족이 탄생한 것이다. 이들에게 또 다른 가족이란 이름으로 뭉쳐진 조폭이 등장한다. 그들은 서로의 가족을 지키려 고군분투한다. 강마을 사람들은 오랜 시간 자신의 인생을 돌보지 않고 떠돌았지만 조폭의 등장으로 서로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 때 비로소 자신의 모습도 마주하게 된다. 더 이상 뒷걸음치지 않고 맞서려는 그들 사이로 강 같은 평화의 물살이 흘러 들어온다. 말 못하는 준호가 여산을 향해 아버지라 울부짖는 장면엔 가슴이 찌르르 하다. 방금 전 팬터마임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똥물을 뒤집어쓰고 인간에 대한 반성까지 하게 된 조폭들을 보고 깔깔 댔었는데 가족임을 깨달은 서로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는 눈물이 흘렀다.
강 같은 평화, 빛 같은 미소
마을 사람들에게도, 조폭들에게도 그들을 에워싸고 흐르는 강물처럼 그들의 마음에 강 같은 평화가 깃들길. 그래서 더 이상 떠돌지 않고 그 안에서 평온하길 바랐다. 그 간절함은 나에게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강 마을 사람들이 주고받는 물살은 처음엔 가팔랐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잔잔해지고 출렁일 때마다 빛이 났다. 최초로 가족을 선택한 그들에 깊고 넓은 강 같은 평화가 깃들길. 그래서 그걸 바라보는 내 마음의 물살도 잔잔해지길 바란다. 그러나 마지막 소설에 어둡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잊지 말아야 한다.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멸절시킬 준비가 된 죽음의 군대다. 치열하고 열렬했던 마을 사람과 조폭들간의 전투도 강마을 한번에 전복시킬 불도저와 포크레인, 덤프트럭 앞에선 무기력해진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고 우리가 사는 현실이다.
성석제가 돌아왔다
이 말은 마치 성석제란 소설가가 어디 갔다 돌아왔나 좌우를 둘러보게 하기도 하고 돌연 오빠가 돌아왔다는 제목을 연상시키며 꼭 스티브 잡스처럼 왕의 귀환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최소한 망토라도 펄럭이며 위풍 당당히 걸어 들어와야 할 것 같기도 하다. 성석제가 돌아왔다. 그가 우리를 위로하러 온 것이다. 물론 이야기로.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장해제 되고 어떤 이야기일지 덮어놓고 경청할 준비가 돼있던 찰나 큭큭 대는 웃음을 무색하게 연이어 눈물 콧물까지 흘리게 한다. 그는 이야기보따리와 함께 감정의 삼종 세트도 들고 왔다. 그것들을 찬찬히 다 풀어 보고 나서는 침묵하게 되었다. 거침없는 입담 뒤엔 돈 앞에서 무력한 인간관계와 끊어진 제도적 가족관계 개인의 소외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투영돼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