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2004년 2월 15일 말씀
본문 행: 27장 14절 20절 22절 24절 25절 36절 44절
제목: 모두가 NO라할때 YES하는 사람
결국 바울사도는 가이사랴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유대인의 눈치만을 보는 위정자들에 의해 또 다시 긴 여행 즉, 로마로의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편하고 누릴수 있는 여행이었으면 좋았겠지만 그의 여행은 죄수의 신분으로 여행이었습니다. 앞서 살펴보았지만 더 갖고자 하는 이들 불순한 의도가 있는 사람들 자기의 유익만을 위하여 사는 이들은 결코 큰 인물이 될 수 없음을 우리는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과감히 포기해야만 채워지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버리기를 원하시고 또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별로 버리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더 많이 갖고 싶어하고 더 많이 누리기를 원하고 더 많은 것을 성취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너저분한 모든 것들을 버리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한 아이가 소꿉장난을 합니다. 해가 뉘역 뉘역 질때까지 친구들과 함께 흙으로 밥도 만들고 풀로 반찬도 만들고 과자도 만들고 진흙으로는 아이스크림도 만들어 먹는체 합니다. 그렇게 재미있게 놀고 있는 사이 어느새 저녁이 되어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이를 불러야 합니다. 왜냐하면 집에와서 식사 할 시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아이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집으로 어머니곁으로 뛰어갑니다. 왜냐하면 아이는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음식이 진짜인줄 아는 까닭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아버지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됩니다. 오늘 피곤하고 또는 지쳤을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선 초청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나의 자녀야 내게로 오렴, 내가 너와 이야기하길 원한단다. 너의 힘든 고민들을 들어주길 원한단다. 모든 것을 놓고 달려갈줄 알아야 합니다. 손에 묻었던 진흙을 털고 일어나십시오. 소꿉장난하던 나물 반찬을 이젠 그 자리에 놓아두고 일어나십시오. 하나님은 진짜를 여러분에게 주실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앞에 어떤 가치를 두십니까? 정말 예배를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을 찬양하고 함께 기도드리면 말씀 듣는 이시간을 귀하게 생각하는 여러분!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소중한건 알아요 하지만 더 바쁜일이 있거든요, 친구를 만나야 해요 약속이 있어요. 그 친구는 정말 소중하거든요 그 공부는 정말 중요하거든요 내가 하는 일은 그 시간이 아니면 할수 없거든요- 왜 하필 예배시간과 내가 해야할 중요한 일이 마주쳐 있는지 모르겠어요....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여기에서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은 항상 결단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것도 안하고 교회에 와서 살기를 바라시는 분이 절대 아니십니다. 모든 시간을 우리에게 허락하셨고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비록 우리가 바쁠지라도 귀찮을지라도 피곤할지라도 어쩌면 손해를 보아야할 상황이 내게 닥친다 할찌라도 그 순간 하나님께 나오는 믿음과 하나님께 대한 갈망을 보고 싶으신 것입니다. 바로 그것!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토요일에 집에 가면 세살짜리 조카가 와있습니다. 과자를 사가지고 들어갑니다. 그러면 꼭 그 과자를 한번 달라고 해봅니다. 제가 사준 과자를 뺏어 먹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그 아이의 맘을 잠깐 보고픈 것입니다. 그러면 조카는 아무 욕심없이 과자를 제가 다 주어버립니다. 얼마나 그 순간 내가슴이 뿌듯한지 모릅니다. 담에 더 좋은 과자를 사다주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예배시간을 귀중하게 생각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결단의 순간이 내 앞에 놓일찌라도 그래도 하나님께 나가겠다는 결단으로 이 자리에 있어 보십시오. 손해 본 일같은 것들은 더욱 채워질것이며 못한 공부는 하나님께서 지혜로 채워주실 것이며 못만난 친구는 주안에서 더욱 사랑하는 친구를 얻게 될것입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약육 강식의 원리가 판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모두들 잘살자고 하나 모두들 기업마다 광고마다 친절한 듯 나를 향해 웃고 있는 듯 하나 기억하십시오. 그 웃음뒤에 여러분 자체보다 여러분이 가진 푼돈에 웃음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에 친절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진정이 사라진 사회입니다. 요즘 이승연이 누드를 찍어놓고는 종군 위안부가 잊혀지는 것 같아 가슴아파 기획하게 되었다고 했다는 군요. 그러면서 그런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청소년들에게 모바일 써비스를 하게 되었다고...현대 상업주의 아주 표상적인 발언이었습니다. 36살 먹은 아마도 태국정도 가면 증조할머니뻘인 이승연은 아직도 철이 부족한가 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쩌면 성도 많이 끌어 모으려고 하는 것이 큰 교회로 보이고 싶어서 아니면 재정이 풍부해지니까 하는 욕심이 들어서면 교회간에 갈등이 생기게 되고 분쟁이 생기게 되고 본질이 퇴색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품어야할 것은 진정입니다. 신령입니다. 영혼에 대한 사랑입니다. 우리 정말 예수로 기뻐하며 예수만이 생명이라고 믿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를 십자가에 주신 그 사랑만으로 감동하며 사십니까? 우리 교회는 상업주의나 자교회주의가 사라졌으면 합니다. 오직 예수만이 나타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감동하는 것은 바로 그런사람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전부가 되고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을 자랑으로 삼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안락이나 편안함보다도 자신의 위치나 권세나 자존심보다도 오직 예수께만 매여있는 사람을 대면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영원한 것을 소유한 진정한 사람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무런 댓가도 받지 못했지만 감사할줄 알았고 그는 아무런 재산도 갖지 못했지만 모든 것을 소유했고 그는 아무런 권세도 없는 죄인의 신분이었지만 하늘의 권세를 가지고 있었고 왕자의 신분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의 삶을 보면 조금 더 깊이 보려하면 눈물이 흐르는 까닭은 무엇인지요? 오늘날 우리의 신앙이 퇴색하고 정례화되고 신앙에 헌신하라고 하면 헌신짝처럼 신앙을 포기하는 이 세대 가운데 그의 삶이 더욱 빛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드디어 바울은 마지막 여행을 가게 됩니다. 로마로의 여행~ 로마는 바울이 예전부터 가고 싶어하는 도시중의 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서언에서도 얼마나 로마에 가고 싶어하는지 그의 갈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로마에 가긴 가지만 어쩌면 그가 기대했던 여행은 아니었을것입니다. 그는 쇠사슬에 묻인채 죄인의 신분으로 로마로 가게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것에 매이지 않습니다. 개의치 않습니다. 그에겐 자신의 상황이 아니라 복음이 더 중요했던 까닭입니다. 미항에서 배가 행선을 시작할때에 바울은 이번 항해가 위험하다고 알리나 백부장 율리오는 선주와 선장의 말을 더 신뢰하고 그냥 출발하기로 합니다. 배는 잠시 남풍을 만나 순항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리고 나선 잠시 남아있던 바울의 충고도 씻긴듯이 사라지고 득의하게 됩니다. 의기양양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엄청난 광풍 유라굴로가 대작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대작앞에서 돛도 방향키도 아무런 쓸모가 없어져버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앞에 불어닥치는 고난은 그 누구도 막을 힘이 없습니다. 저는 막노동일을 하면서 포크레인 앞에 선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장난 삼아 포크레인 바가지를 힘껏눌러보았습니다. 저도 힘이 세다고 믿었기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림반푼어치도 힘이 들어가지 않은 듯 번쩍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이겼다고 의기양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무언가를 해냈다고 의기양양하지 마시기 바립니다. 아무것도 아닐수 있습니다. 오늘 이들은 잠시 의기양양했지만 결국은 거스릴수 없는 광풍앞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아버립니다. 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날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않자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모두다 소망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살 소망을 잃은 것입니다. 이때에 이 흑암속에서 말을 던지는 한사람 모든 상황이 죽음이라는 결론받아 극도의 절망만이 분위기를 잡아갈때에 한사람이 일어섭니다. 그는 바로 죄수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일어나 담대히 소망을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고 증거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나는 의지한다고 믿는다고(25절) 담대히 증거합니다. 모두들 노우라고 할때 예스하는 한사람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그가 누구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가 누구 때문에 그렇게 담대할수 있었습니까? 그라고 무섭지 않았겠습니까? 배가 파선되면 바울은 묶여있기에 더 죽기 알맞은 사람이었습니다. 왜 무섭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파도보다 더 큰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였습니다. 이 세상의 보이는 것에 웃고 울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서 여러분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두들 그 바울의 말에 소망을 걸기 시작합니다. 14일동안이나 먹지도 않고 파도와 싸운 이들에게 먹을 것을 권합니다. 그러자 그들이 먹고 안심을 합니다. 이제 살수 있다는 소망이 생긴 것입니다. 배안에 있던 276인의 사람들이 먹고 힘을 얻게 됩니다. 276명의 사람중에는 별사람이 다 있었을 것입니다. 바다의 경험으로만 한평생 살아온 이들, 관광객들, 로마의 관원들, 많은 군사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고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해주신다고, 그분을 의지하라고, 담대하라고 .... 여러분 혹 어려운 일이 가정가운데 있으십니까? 이유를 알지못할 누구에게도 말못할 큰 고민이 있나요? 주님께 아뢰시기 바랍니다. 소망을 놓치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바울 곁에 서서 말씀 해주시던 하나님이 바로 내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무릎꿇고 하나님앞에 간구하십시오.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실 것입니다. 지혜로운자는 하나님앞에 무릎꿇고 어린아이처럼 매달리줄 아는 것입니다. 크신 하나님앞에서 내가 뭐라고 힘을쓰고 용을 씁니까? 무조건 엎드리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일하신다고 하시 않습니까? 바울이 파도를 잠잠케했나요? 바울이 276명의 사람들을 구원했나요? 그는 믿었을뿐입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에 무릎꿇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저지할수 없고 내가 막을수 없는 고난이나 어려움 찾아올때에 그저 하나님앞에 순종하고 그분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세상에 소망이 없다합니다. 어렵다고 합니다. 앞에 놓인 것은 어둠뿐이라고 이야기들 합니다. 세상의 소식들은 우리를 더욱 절망케 하곤 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안된다고 할때 하나님앞에 서 있는 사람은 되는 것을 봅니다. 사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이세상 우주보다 크신 분이 바로 하나님 이시기 때문입니다. 선박기술도 발달하지 않은 이 시대에 바울의 말 한마디 그의 믿음의 고백으로 말미암아 44절에 보면 276명 모두가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입에서 고난이 올때에 어려움이 올때에 어떤 고백으로 하나님앞에서 나가십니까? 이 고백이 여러분을 이끌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이 모두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주 예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