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적 보편주의 - 권력의 레토릭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김재오 옮김 / 창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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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영국을 필두로 범유럽세계 지도자들과 주류 미디어 및 기성 지식인들은 자기네 정책을 옹호하기 위한 기본적인 명분으로서 보편주의에 호소한다. 하나, '인권'을 옹호하고 '민주주의'라 불리는 어떤 것을 증진한다는 주장. 둘, '서구'문명이 보편적 가치와 진리에 기반한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문명보다 우월하다고 전제. 셋, 신자유주의적 경제법칙을 수용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다'라는 논리.

이 세 가지 모두 우리에게 자명한 관념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실로 6세기 이후로 근대세계체제의 역사 내내 강자들의 기본적인 레토릭을 구성해왔듯이, 월러스틴은 강자들의 보편주의가 편파적이고 왜곡된 보편주의, 즉 '유럽적 보편주의(european univeralism)' 임을 보여주며, 월러스틴 자신이 '보편적 보편주의(universal univeralism)'라 칭한 진짜 보편주의로 나아갈 방안에 대해 모색한다. 유럽적 보편주의와 보편적 보편주의 간의 싸움은 현재 세계의 핵심적인 이데올로기 투쟁이며, 그 결과는 앞으로의 세계체제가 어떻게 구성될지 결정하는데 주용한 요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개입할 권리?  16세기 에스파냐의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에 대한 개입을 둘러싼 소위 '세뿔베다-라스 까사스' 논쟁은 지금도 유효하다. 세뿔베다는 '문명화된' 지역이 '비문명화된' 지역에 대한 모든 '개입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네가지 주장을 든다. 하나, 타자의 야만성. 둘, 우상숭배나 인신공양 같은 악습 근절. 셋, 무고한 양민 보호. 그리고 기독교라는 보편적 가치의 전파. 이 주장들은 정복자에게 강력한 도덕적 동기부여로 작용했지만, 분명한 것은 정복의 즉각적인 물질적 이득때문에 더 크게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개입'의 근거인 보편주의적 가치란 특정한 세계체제의 조건에서 지배층이 만들어낸 사회적 산물에 불과할 뿐. 허나 여전히 세뿔베다가 더 강한 현실에서 그의 보편주의는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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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의 등장 유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4
아론 구레비치 지음, 이현주 옮김 / 새물결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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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은 파악하기 힘들다.'

저자가 책에서 서너번씩 강조한 '문구'다. 책을 읽는내내 이말에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스칸디나비아 고대문학에 나타난 영웅, 중세 수도사들.. 애매모호한 퍼스낼러티와 개인성의 경계,   

부르크하르트 이래로 , 중세를 벗어나 르네상스에 이르면 개인성이 발현되기 시작해서 인간이 개인으로서 등장하기 시작한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르네상스를 근대의 시작이라고 한다. 그러나 저자, 구레비치는 인간이 자기자신을 자각하기 시작하고, 퍼스낼러티를  어떠한 형식으로든 발현하는데 있어, 그 분기점을 르네상스로 보는 관점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그는 르네상스 이전의 개인들을 통해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 개인의 모습을 퍼스낼러티와 개인성, 그리고 그 모든것에 영향을 주는 시대의 사회문화적인 맥락을 염두에 두면서 살펴본다. 그래서 흔히 구레비치를 중세주의자라고 한다. '개인주의'의 개념을 역사에 적용시키는데 있어 그 기원과 발전과정을 중세 혹은 그 이전에서 찾고자해서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책을 읽으면서 과연 그를 중세주의자라 할 수 있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개인주의에 관련해서) 물론 구레비치가 개인의 모습을 발견하기위한 배경을 주로 중세에 두었지만, 그가 결국에 그가  밝히려 한 것은 중세에서 볼 수있는 개인의 모습을 근대의 개인과 비교하거나 근대적인 한 특징만을 들어 강조하 않는다.

사실 중세라는 시대는 지금과 같은 개념의 개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근대도 마찬가지일것이다. 그런측면에선 그들과 우리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인간이다. 그들은 지금 우리가 너무도 당연히 전제하고 있는 개성, 자기 표현방식 같은 것이 없었고 아마 아예 없었기 때문에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구레비치의 분석을 통해 그들의 다른 인식과 방식들을 현재에서 유추해볼수 있을 뿐이다. 어쨌든 구레비치는 개인의 발전이라는 것이 고대에서 중세로 또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점점더 발전했다는 단선적인 도식에 대해 비판적이다.  개인은 후퇴하기도 했고, 산발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는 것이다.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명] 2부에서 다루는 개인들, 자기중심적인 사고, 자만심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개인들을 통해 부르크하르트는 개인이 완성되기 시작한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글에서는 부르크하르트가 어떤 관점으로 개인의 발견을 근대를 특징짓는 한 요소로 정의했는지 자세히 살피기는 어렵다. 개인을 최고의 가치에 두는것, 자기주장을 할 수 있는것, 어떤 사회적인 모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것. 기준은 여러가지가 될 수 있다. 부르크하르트는  자기자신의 가치와, 명성을 좇는 것 으로 기준점을 삼았다. 그에 비해 구레비치는 어떤 한 가지 특성만을 가지고 살펴보지는 않는다. 사실 중세의 인물, 표본들을 어떤 한가지 기준으로만 평가한다는것은 나이브한 일일것이다. 그리고 쉽지 않은 일이다.

...

어쨌든, 퍼스낼러티와 개인성을 중심에 놓고,  근대에서 중세 초로 더 거슬러 올라가 한 개개인을 만날 수 있는 흥미로운 기회였다. 중세, 중세하면 우리는 암흑이라는 수사를 떠올리지 않는가? 신의 시대, 그 시대를 산 인간들의 사고방식, 인간관계, 자신인식, 한 인간이 어떻게 자기 기분과 의지를 표현했는지, 그러한 것도 모두 신의 섭리에 비춰서, 신의 이름을 빌어서 행해졌는지,  모두가 금욕주의에다가 엄격한 억압속에서 순종하며 사는 것만이 윤리라고 생각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책에서 그 의문을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어도 어느정도 비춰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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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뻐?
도리스 되리 지음, 박민수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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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뻐?'라고 물을 수 있는 생기발랄함과 자신감..

오랜만에 쌈박한 현대소설이 읽고 싶어져 문학서가쪽을 서성대다가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뭐랄까?  내가 너무 얌전한 제목들만 보아왔는지는 몰라도,

 신선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일까. 도리스 되리?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후에 

알고 보니 영화 ''파니 핑크''의 감독.

' 나 이뻐?' 라니, 내가 늘 묻고 확인하고 싶어했던 것. 

하지만 그다지 이쁘지도 않고, 그런 주제에는 외모에 집착하지 않는게 보기 좋다는 것도 잘안다. 

'나 어때?'는 어떨까? 여러 편의 단편들 속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입으로, 몸으로 '나 이뻐' 를 물어댄다.

물론 각각의 캐릭터에 따라 그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그네들은 하나같이  사랑받거나, 인정받거나 혹은

자신을 표현하는데 목말라하고 있으며, 그러한 일상의 무미건조함에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난 이책의 제목과 내용들이 너무나 잘 맞아 떨어져 더이상

설명할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 주인공들은 지금 이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 혹은 남성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

욕망 하지만 채울 수 없는, 허식 하지만 걷어낼 수 없는, 소외 하지만 포용될 수 없는

끝없는 욕망과, 자위적인 허식, 자기소외의 단면들을 보여준다.

곁에 책이 없어서 전부 몇 편의 글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나지만,

그중에서도 다이어트에 성공한 여자, 그리고 서독의 중산층 부르주아지 여자가 동독의 가난한

어린소녀에게 느끼는 동정. 유럽피언과 양키의 차이를 거론하면서 XXX를 사랑하는 '쉭세' 얘기..

특히 여자라면 꼭 한번쯤 읽어 볼 만한 책이다. 다소간 페미니즘적인 경향이 보여지기도 하고

역자는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적인 욕망과 허영' 같은 말로 해석을 하기도 하지만,

그런 틀로 해석을 하는 것 보다는,  그저 자신이 종종 혹은 간혹 자기안에서 발견하게되거나 시달리게 되는

 견디기 힘든 욕망과 고독,

무언가를 갈구하고, 또 그것 자체에 역겨워하고, 지치고, 또 무언가를 갈구하는 모습들을 비교해보고

이해해보는 기회만으로 책에 대한 해석은 충분하지 싶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러한 기회가 되었다.

여자라면, 필히  '경험' 해볼만한 책이다. 자기네들의, 그리고 나의 이야기로 인정하게 될 수 밖에

없으니까.

아,  '나 이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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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몰락 - 미국 체제의 해체와 세계의 재편
엠마뉘엘 토드 지음, 주경철 옮김 / 까치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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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미국의 헤게모니에 이상이 생겼으며, 이제는 그것이 무너지고 있음이 자명한 상황에서 미국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리고 나머지 세계는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논하는 책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러한 책들은 미국의 보수적인 브레인들의 전략과 애국심을 읽을 수 있는 책들과 그와 반대로 미국의 위선과 폭력을 고발하고, 비난하는 책들, 크게는 이 둘로 갈라진다. 제국의 몰락은 후자해당되는데, 그것도 유럽 중심적인 입장에서 미국을 이제는 물로 봐도 되지 않냐는 식으로까지 미국을 까내린다. 

프랑스의 인구학자이자 역사가인 앰마뉘엘 토드의 미국에 대한 평가와 전망은 신랄하다 못해, 학자의 글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유치하다고 여겨질 정도였는데, '연극적 히스테리', '방화광적인 행동', '광적인 전략' 등의 구절에서 보듯이 그의 미국에 대한 '감정'은 장난이 아니다. 그러나 토드는 인구학자인 만큼 인류사적인 접근을 통해 풍부한 자료와 통계들을 가지고 글을 이끌어 나가기 때문에 논리적이긴 하다.

토드가 이책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미국의 힘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잘못을 하고 있다며,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힘이 아니라 미국의 취약성 측면을 잘 보아야 한다고 당부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일단, 미국은 두 가지 문제를 안고있는데, 하나는 자유 민주주의의 보편화로, 그것을 이루기 위한 의무를 다하고 있는 미국은 언제간 정치적으로 무용하게 될 것이라는 역설이며, 두번째는 생산이 아닌 소비만 이루어지는 세계의 소비하는 '공무원'화 되어가는 미국 시민들, 즉 경제적으로 세계에 종속되어가는 문제이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미국은 점점 더 그들의 행동의 정당성을 잃어가는데, 그 대안으로 나오는 것이 '마이크로 군사주의', 즉 소국들만을 상대로 군사적인 행동을 취하면서 극적인 행동들을 연출하는 것이다. 토드는 이미 미국은 '제국'의 조건(조공과 보편주의)에서 많이 멀어졌으며 쇠퇴기에 접어들었음을 논하고 있다. 그는 이제 미국이 아니라 나머지 세계, 특히 서유럽과 러시아 그리고 일본 ,중국의 역할들에 대한 중요성을 언급하는데, 사실 일본이나 중국 등 아시아에 대한 논의는 거의 하지 않고, 서유럽과 러시아의 변화와 협력을 통해 지금의 제국의 판도를 어떻게 역전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매달리고 있다.

 러시아 점차적으로 민주화되어 가면서, 서유럽과 협력하고 미국에 대해서는 도발하지 않고으면서 신중히 행동하면서 현실주의로 복귀하고 있음을 논한다. 토드는 이제 아메리카가 고립되는 문제를 미국이 신중히 검토해야 하며, 단기적인 해결책으로 약자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중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제대로 행동해라는 조로 충고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를 크게 미국과 유럽으로 보면서 아시아를 완전히 배제하는 태도, 거기에 자신이 소련의 붕괴를 예상(인구학적 접근으로)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러한 근거로 자신의 예상이 맞을 것이라고 지나치게 자신하고 있다.

그는 자유 민주주의 보편화를 논하면서, 이슬람과 아프리카 등지의 인구 변화와 문자 해독률을 근거로 하고 있다. 특히 피임을 굉장히 강조하는데, 교육이 보편화되면서 문자해독도 보편화되고, 이어 피임에 대한 인식, 출산률 감소 이러한 발전을 통해 그 사회가 근대화되고, 민주주의의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은 너무나 평면적인 인식인것 같으며, 그러한 통계나 지수를 통해 그 사회 전반의 발전을 낙관하는 것 또한 도식적인 것 같다. 각 나라별로 문화와 전통, 그리고 발전 정도가 다 다른데, 그것을 일국사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이다.

 그리고 특히 인류학적 유형(가족 가설)으로 현재 그 나라를 판단하는 것 또한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물론 인류학적 변수, 문자 습득 같은 역사적인 변수를도 함께 파악해 보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되겠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이땅에 서 사는 사람들과 사회, 관습, 이데올로기가 지금의 이땅에 사는 사람들과 사회의 그것들과 얼마나 다른가? 거슬러 추적해보면 그 근원은 지금 우리가 전통적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아무 상관없는, 혹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은 것일때가 많은 것처럼 그러한 논리는 인류사적으로는 통할지 모르겠지만 역사적으로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위험하다고 한 이유는 그 민족은 원래 성격이 저래하는 고정관념과 그렇다는 정신구조를 재료로 사용할 수 있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의 형성의 위험성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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