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푸트니크의 연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정환 옮김 / 자유문학사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전 마누엘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를 읽은 후, 이 책이 생각나서 책장에서 꺼내 다시 읽어보았다. 그리고 하루키 특유의 분위기에 빠져 단숨에 읽어버렸다. 그저 동성애를 다루었다는 점만으로 두 소설이 연관지어졌던 것이다. 한쪽은 남성간의, 다른 쪽은 여성간의 사랑이지만 말이다. 다 읽고 난 후에 이 소설의 인물들이 하루키의 다른 작품에서 나왔음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실의 시대'의 미도리를 떠올리게 하는 스미레, '상실의 시대'의 레이코와 '국경의 남쪽,태양의 서쪽'의 시마모토를 합쳐놓은 듯한 뮤, 그리고 하루키 소설에 늘 등장하는 평범하면서도

매력적이고 고독한 남자주인공. 그리고 '상실의 시대'의 와타나베가 나오코를 위해 요양원을 찾아가듯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스미레를 위해 그리스의 한 섬으로 향한다.
우물 얘기,피아노 얘기, 예고없이 없어지는 여주인공등 '상실의 시대'와 이 소설이 갖는 유사점은 많아 보인다. 잘 읽히던 이 소설은 뮤가 관람차안에서 겪은 자아의 분열 대목에서부터 혼란을 가져왔다. 그리고 스미레는 왜 없어졌는가? 그녀가 이야기한 고양이 이야기와 같이 자신을 갑작스럽게 끌어들였던 그 세계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오기가 겁났던 것일까? 아니면 '론섬 트라베라'의 산불감시원과 같이 고독과 절망을 경험하기 위해 황야로 들어간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주술을 위한 개의 피를 가지러 간 것일까? 아직도 스미레의 행방에 대해서는 혼란스럽다. 소설 마지막에 아무일도 없었단듯이 돌아온 스미레는 진짜 스미레일까? 주인공이 도쿄의 거리에서 본 백발의 뮤와 같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돌아온 건 아닐까? 수많은 궁금증만이 내겐 남는다.

이 소설은 하루키의 소설답게 등장인물들의 일상을 매력적으로 묘사하며 독자를 끌어당긴다. 다소 왜설적인 묘사들과 함께 말이다. 하루키의 소설이 상실감을 다루면서도 우리에게 재생의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는 이유도 그런 문체의 힘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스미레가 과연 저쪽의 뮤를 만났을까라는 의문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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