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1
테네시 윌리암스 지음, 김소임 옮김 / 민음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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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왕년에는 좀 잘나갔었거든.”


 

“내가 왕년에는 말이지~~” 라는 말을 달고 사는 사람들을 참 가엾게 여겼었다. “저런 사람들은 필시 지금의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한다는 뜻일테지. 아이고, 안됐구나.” 했다. 그러면서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했던 것. 그런데 그것이 참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지금의 나는 안다.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이 언제고 항상 전진하는 경우만 있을까? 가끔은 넘어지기도 하고, 부서지기도 하고. 그래서 목놓아 울기도 하고. 가끔은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할만큼 고통스러울 때도 있을지 모르고. 그렇기에 그리도 많은 책에서 실패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일 터였다. 실패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는 것이 중요하고, 그러는 과정을 통해 실패에서 무언가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만 성장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모든 성장은 아픔과 슬픔 속에 있는 것이니, 그러니 실패는 성장의 어머니인 것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그렇게 넘어져서 바닥을 헤맬때쯤이면, 나는 자연스레 지나간 내 시간들을 생각한다.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것은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것일테고, 그러니 나의 고민의 방향은 미래를 향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내 머릿속은 그저 자석에 끌리듯이, 즐거웠고, 때로는 감격스러웠던 나의 과거를 소환 한다. 그렇게 나도 가끔씩 ‘왕년’을 생각한다. ‘왕년에 나는 이랬는데’ 하고. 이것이 얼마나 추하고 어리숙해 보일지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마치 물이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으로써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이라 나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래도 이런 나의 감정을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만은 하지 않아야지” 하고 다짐하는 것이다.


 

이런 나의 다짐은, 아마 내가 예전에, (내가 잘나갔을때?) “내가 왕년에는 말이야~” 하면서 과거를 내세우는 사람들을 보고 아마 “저 사람들의 현재는 분명 별볼일 없을 거야” 라고 생각했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 틀림없을 터였다. 나는 만약에 누군가가, 내가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 하는 모습을 마주한다면, 그들도 과거의 내가 그랬듯이, 나를 안타깝게 바라볼 것이라 짐작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동정어린 시선을 받는 다는 것, 안타까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쩌면 상당히 불쾌한 일이 될지도 몰랐다. 그래서 타인에게만은 이런 나의 감정을 내보이지 않아야지 하고 다짐하지만, 내 안의 것들이 밖으로 삐져나오지 않도록 완벽하게 통제하는 일이란 또 얼마나 어려운 것이던가. 나는 아마도 몇번은 그것에 실패하고 그런 나의 생각들을 표출해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안타깝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는 지도 몰랐다.


 

그러면서 나는 깨달았다. “아, 나는 이제 그들을 비웃지 말아야 겠구나” 라고. 자신의 빛나던 과거를 잊지 못해 자꾸 그 과거를 추억하는 사람들을 나는 이제는 우습게 여기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러기보다는 “왕년에~” 라는 문장을 습관처럼 내 뱉는 그의 가까운 과거와 현재에 어떤 아픔이 있었던 것인지, 나는 이제 그것을 더 가슴 깊이 생각하리라고 다짐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주인공인 블랑시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잊지 못한다. 그녀는 지금 돈도 없고, 남자도 없지만, 남부의 대 저택에서 살던 모습, 그대로의 형상으로 동생과 제부 앞에 나타난다. 블랑시의 동생 스텔라는 자신들의 어린 시절과는 너무도 다른, 그래서 블랑시가 짐승같다고 표현하는 남자 스탠리를 만나서 현실에서 적응해서 살아간던 중이었다. 물론 동생 스텔라도 그들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현재 모습에서 그녀의 부유하고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모습을 유추하기가 힘들다는 것 까지도. 다만 스텔라는 그렇지 않은 현재 자신의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때론 지독하게 받아들인다. 방이 두개 밖에 없는 좁은 집에서, 임신한 몸으로 남편에게 맞아가면서까지 그 현실에 순응한다. 현실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 없이 그저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단지 순간 순간을 살아내는 데에는 더 도움이 되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실에 대한 어떤 가치 판단보다도, 내 현재 삶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그저 이 생활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모욕도 참아내는 것. (물론 여자의 권리란 예전으로 갈수록 형편없었으니, 남편의 폭력이 지금과 같은 의미를 갖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블랑시가 제부의 행동을 보고 ‘짐승같다’고 폄하했던 것으로 보아, 이 이야기가 씌여졌던 시대에도 폭력적인 남편은 ‘무식’의 상징이었던 면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스텔라가 스탠리를 만나서 현실에 적응하고 사는 동안, 블랑시는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끔찍한 사건들을 많이 겪게 되고, 그 후 자신의 탈출구로 욕망을 선택하지만, 그 욕망의 시간들은 그녀가 새로운 시작을 하고자 할때 걸림돌이 된다. (만약 그가 남자였다면 어쩌면 다른 결말을 낳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이 드는 것은 한명의 여자 독자로서 느끼는 당연한 질문일 테지만.) 평판의 불량으로 일을 잃어버리고, 남자마저 잃어버린 블랑시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모파상이 자신의 소설 ‘여자의 일생’을 통해, 어릴 땐 아버지에게, 자라서는 남편에게, 늙어서는 아들에게 기대어 살 수 밖에 없는 여자의 인생을 그렸던 것처럼 자신이 홀로 설 능력도 곁에서 자신을 보호해줄 남자도 없는 블랑시는 결국 정신병원에 끌려가게 된다.


 

스탠리가 자신에게 폭력적으로 대하는 남자일뿐만 아니라, 자신의 언니를 겁탈한 사람임을 알면서도, 그리고 그가 언니를 정신 병원에 보내는 것을 옆에서 지켜 보면서도, 스텔라는 그를 남편으로 변함없이 받아들이고, 거기서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도 의지도 없다. 어쩌면 자신의 생을 자기 힘으로 일으킬 능력이 없는 사람, 여자의 인생이란, 스텔라처럼 참혹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조적으로 살든지, 아니면 블랑시처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에서 벗어나지 못한채로 뭔가 울분의 배출구를 찾다가 다시 참혹한 현실로 들어가든지, 하는 것 아닐까? 참혹한 현실을 받아들이며 사는 스텔라도, 그러한 현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블랑시도, 결국 그 인생의 모습은 참혹하다.  



 

멈춰서 생각하는 것



 

p.174  꿈을 잃고 가문의 몰락과 친척의 죽음을 목격하고, 사랑했던 어린 남편의 자살까지도 경험한 블랑시의 도피처는 욕망이었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테네시 윌리엄스는 블랑시를 통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많은 얘기들을 전달하려고 했던 것 같다. 블랑시의 대사들은 특히 주옥같다.


 

p.39 (블랑시)여자의 매력이란 결국, 절반은 신기루 같은 것 아닌가요?


 

p.55 (블랑시) 슬픔이 진실을 가져오나 봐요. 얼마 안되는 진실이니마 슬픔을 경험한 사람이 갖고 있죠 슬픔을 겪지 못한 사람을 데려와 봐요. 그가 피상적이라는 걸 보여줄테니.


 

p.67 (스텔라) 난 벗어나고 싶은 상황에 있지 않아.


 

p.69 (블랑시)난 여행을 투자라고 생각했거든. 백만장자를 만나기 바라면서 말이지


 

p.75 (블랑시)예술같은 것들, 시나 음악 같은, 그런 새로운 광채가 그 이후로 이 세상에 들어왔거든! 어떤 사람들 안에서는 부드러운 광채가 싹트기 시작했다고! 그걸 우리는 키워야 해. 그리고 매달려서 우리의 깃발로 삼고 지켜야해. 짐승들과 함께 뒤쳐져선 안돼.


 

p.89 (블랑시)당신보고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젊은 왕자같이 생겼다고 말해준 사람은 없던가요?


 

p.164 (블랑시)당신이 누구든 난 항상 낯선 사람의 친절에 의지해 왔어요.




 

이 글은 제 네이버 블로그 #김경옥 의 #옥님살롱 에도 게재한 글입니다.

http://expert4you.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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