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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하는 여자, 영혜 - 과학 없이 못 사는 공대 여자의 생활 밀착형 과학 이야기
이영혜 지음, 고고핑크 그림 / 새움 / 2018년 3월
평점 :
나는 문과를 나왔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수학이었다. 못 한다기보다는 ‘싫다’는 느낌이었다. 싫다는게 원인인지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노력한다고 해서 잘 할 자신도 없었다. 지금 돌아보면 수능시험 때까지 일관되게 언어 과목은 이상하게 자신이 있었는데 점수가 안 나왔던 반면, 수학은 무섭고, 싫고, 자신이 없었는데 시험 점수는 언어 과목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대학에서는 외국어를 전공하다보니 내 학창시절은 줄곧 ‘여초’인 환경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남자는 이과, 여자는 문과라는 고정관념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때에 '소수'라는 면에서는 고등학교 시절 이과, 대학교 시절에는 공대를 다니는 여자들도 문과 남자인 나와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차이가 있다면, 문과 남자들은 대체로 수학이나 과학에서 도망쳐 온 '루저'들 취급을 받는데 반해, 이들은 극소수라 어디 가서든 튀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거기에 어려움을 정면돌파 한다는 이미지까지 있었다.
그런데 내 주위를 보면 이과 전공을 한 여자는 있어도, 그 커리어를 유지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다보니 만약 이과를 전공한 여학생들에게 ‘이과 본능’이라는게 있다면, 그게 실제 생활 속에서 어떻게 드러날까? 하는게 좀 궁금하기도 했었다. 학창시절 때도 그렇지만 사회생활을 하면 더 드러내기는 쉽지 않았을테니 이건 오로라나 유성을 보는 것만큼이나 힘든 걸 텐데, 이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먼저 이 부분을 읽어본다.
1999년 5월 <사이언스>지에 실린 ‘인간 비만 유전자에 대한 연구’ 논문에 따르면 유전적 요인이 체중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는 적게는 40%, 많게는 70%나 된다. 유전적인 이유로 신진대사 속도가 느려 살이 찌거나, 운동을 한 효과가 다른 사람에 비해 잘 안 나타날 수 있다는 뜻이다. (16 페이지)
어떤가? 의미는 같다고 해도 문과생이 그냥 입으로 “타고난 건 못 이겨” 나 “생겨먹은 대로 살아야 해” 라고 나불대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문과생은 오랜 시간 머리를 마구 굴려도 나오는게 좀 더 '세련된’ 혹은 '정제된' 언어표현 정도라면, 이과생에게서는 새로운 정보와 숫자가 나온다. 그래서 다소 건조한 언어로 풀더라도 세련되게 읽힌다는 점이 어떤 때에는 부럽기도 하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과학의 언어로 풀고 있는데 그렇다고 <빅뱅 이론>처럼 이해를 못해 결과적으로 웃게 되는 그런 이야기들은 아니다.
다이어트를 다루고 있는 1장의 다른 내용에도 눈이 갔는데 역시나, 실험하는 이과생 출신 저자의 ‘고급진’ 표현은 여전하다.
사람들은 각자 다른 장내세균 구성을 가지는데,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박테로이테스 속 세균이 주를 이루고 있다면, 유형1, 프테보텔라 속 미생물이 가장 많고 대장균류가 상대적으로 적으면 유형2, 루미노코쿠스 속 미생물이 가장 많으면 유형3으로 분류한다. 유형1에 속하는 사람들은 평소에 고지방 음식을 즐기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육식을 중단하다시피 크게 줄이면 다이어트 효과를 볼 가능성이 크다. (26~27 페이지)
“살을 빼는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건강을 위해서 장내세균을 관리해야 합니다.” (27 페이지)
그래서 저자는 본인을 상대로 45일간 육식을 중단하는 실험을 한다.
미생물군집분석연구소 천랩이 분석한 나의 장내세균 중 75.7%를 차지하던 피르미쿠테스 문 세균의 비중이 47.3%로 줄었다. ‘뚱보균’ 이라고도 불리는 피르미테쿠스는 에너지를 과잉으로 저장해 비만을 유방하는 원인균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15.7%에 불과했던 박테로이테테스 문 세균은 47,7%로 늘었다, 피르미테쿠스는 열량을 과잉 섭취하는 사람의 장에서 잘 자라고, 박테로이데테스는 그렇지 않은 날씬한 사람의 장 속에 많다. 이는 쉽게 말해 장내세균 구성이 비만 체질에서 마른 체질로 바뀌었다는 뜻이었다. (25~26 페이지)
말 그대로 정보와 분석 그 자체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 분야에서 무엇을 하든 이공계 지식이 기반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거의 매일 한다. 블록체인이나 비트코인 같은 것들 때문이 아니다. 점점 수치로 나온 자료를 볼 일이 너무 많고, 내가 만들어야 하는 보고서에는 기본적으로 사진(시각증거) 아니면 숫자(데이터)가 들어가도록 은근 강요받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예전처럼 단어나 문장이 세련되지 못하다고 지적받는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이는 내 조어 실력과는 상관이 없이 말이다. 오죽하면 지금 가장 필요한 분야를 하나 꼽으라면 주저 않고 통계학이라고 할까. 내 머릿속에서는 이 생각을 이미 수 백번은 했다. 설사 내가 글렀다고 치면 아들도 그렇지만, 나는 딸도 이제는 이공계 전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거의 신념에 가깝다. 그런데 그게 책을 읽고 나서 더 강해졌다.
아무튼, 위에서 인용한 장내 미생물 에피소드의 막바지에는 이런 내용도 나온다.
장내세균 구성이 달라져서 체중이 줄어든 것인지, 체중이 감소하면서 부산물로 장내세균 구성이 더 크게 달라진 것인지 인과관계는 정확하지 않다. 그렇지만 상관관계는 분명히 있었다. (26 페이지)
아, 여러번 봐도 이런게 실험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닌가 싶다. 문과가 상상 혹은 논리라면, 이과는 실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