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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
석영중 지음 / 예담 / 2013년 3월
평점 :
2008년 중순부터 약 10개월 동안 모스크바에 교환학생을 지낸 적이 있습니다. 이 때 든 궁금증 중 하나가, '순수한 러시아 전통 음식이 무엇일까?' 였습니다. 이 때 일단 내린 결론은, 토박이들도 피쉬 앤 칩스 이상을 대지 못하는 영국만큼은 아니지만, 의외로 '별로 없다.' 였습니다. 지금 러시아 사람들이 먹는 음식 대부분은 몽골 지배시기에 전해진 것들이 많고, 표트르 대제 시절 서유럽에서 전해진 것, 전제 왕정 및 소련시기를 거치면서 중앙아시아, 카프카스 지방에서 전해진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푸쉬킨, 체호프, 투르게네프,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불가코프, 솔제니친 등, 러시아 작가들의 성격과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음식을 예로 들면서 러시아의 음식문화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음식이냐고요?
음식이 갖는 가장 흥미로운 속성은 그 스펙트럼이 거의 무한대라는 점이다. 음식은 완전히 다른 두 개의 극단을 동시에 끌어안는다. 요컨대 음식은 물질인 동시에 물질을 초월한다. 음식 자체는 물질이지만 그것은 먹는 사람의 심리와 인격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기도 하고, 인간과 인간간의 교감을 가능케 하는 언어의 구실을 하기도 하고, 특정 공동체의 가치를 대변해 주기도 한다. (5 페이지)
절대 동감입니다. 그렇기에 음식이 특히 중요한 것이죠. 먹는다는 것, 음식물을 나눈다는 것은 예로부터 삶을 영위하기 위한 행위 이상의 의미를 가져왔습니다. 가족의 다른 이름이 음식을 함께 먹는 입의 집합체라는 뜻의 '식구(食口)' 인 것만 봐도 그렇죠. 이건 동서양과 시대를 초월하는 하나의 문화적 코드인 것입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푸쉬킨의 문학을 예로 들어, 18세기 이후 러시아 문학에서 나타나는 서구적인 경향을 보여주는 <남의 음식과 나의 음식> 부분입니다. 전체 3개 중 하나의 큰 장을 차지하고 있고 분량도 많지만 표트르 대제 이후 서구 문명이 어떤식으로 러시아에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한 흥미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술술 넘어갈 수 있는 파트입니다. 서구의 것을 가져다가 러시아의 것으로 바꾼 두 명의 예술가라면, 문학에서는 푸쉬킨을, 음악에서는 차이코프스키를 꼽죠. 둘 다, 비유를 하자면, 아리랑을 한국인보다 더 잘 아는 이방인이었고, 그 다음에 독창적인 것을 만들기 주저하지 않았던 천재들입니다.
푸쉬킨 문학의 가장 큰 특징은 서유럽의 문학적 전통을 받아들여 완벽하게 독창적인 러시아 문학으로 재창조 했다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앞에서 언급했던 러시아 문화의 특징, 특 '남의 것'과 '나의 것'의 충돌과 융합을 대변해 주는 아이콘이라 할 수 있다. (39 페이지)
이런 가운데, 푸쉬킨 이후에는 이걸 다시 분리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모든 분야에 스며들게 됩니다. 철학 및 사상에서는 '슬라브파'와 '서구파'가 음악계에서는 '국민악파'와 차이코프스키가, 더 넘어서 사회주의 운동에서는 '일국사회주의'와 '보편적 사회주의'까지, 서구로부터의 분리와 융합은 러시아를 이해하는 하나의 경향입니다. 사실 외지인의 눈에서 보자면, 이건 서구를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다고 스스로 규정지어버리는, 러시아의 서구에 대한 열등감인 것 같지만 말입니다.
사실 이 책은 별로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선, 음식이라는 코드를 '분석'하다보니 전체적으로 서술이 딱딱합니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푸쉬킨 파트나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의 식습관을 엿볼 수 있는 몇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쉽게 읽히지도 않습니다. 소개하고 있는 대부분의 책들이 어떤 내용인지 알고 있고, 일부는 러시아어 원어로 발췌독을 했던 경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또, 문학을 음식이라는 코드에 한정지어 이야기를 해 나가려다보니 부자연스러운 부분도 눈에 띕니다. 조금 억지로 의미를 부여한 듯한 뉘앙스가 있어요.
그렇지만 제가 말씀드린 푸쉬킨,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에 대한 부분만이라도 읽어본다면 충분히 건질만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위대한 문호들의 음식에 대한 취향이 그들의 삶과 문학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아는 건 쉽게 주워들을 수 없는 색다른 교양인 것 같거든요. 음식은 개인의 취향이고, 심리와 인격을 비추는 거울이고, 관계를 가능케 하는 매개체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