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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다식한 경제학자의 프랑스 탐방기 - 아들이 묻고 경제학자 아빠가 답하는 아주 특별한 수업
홍춘욱 지음 / 에이지21 / 2018년 6월
평점 :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난 4년(2014~2017년)간 모스크바에 지사 주재원으로 근무하면서도 지인들로부터 많이 들은 이야기 중 하나가, 유럽이 가까우니 여행은 많이 다니겠다는 거였다. 부러움이 섞인 건 당연하다. 아무리 바빠도 여러번 찾아오는 (한국이든, 현지든) 연휴나 연말/연초 중 몇 번은 반강제적으로라도 시간이 날 수밖에 없다보니 조금만 부지런을 떨었으면 확실히 많이 다닐 수는 있었다. 그러다보니 막연하게 ‘그래도 1년에 두 번 정도는 자연스레 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결국 이러한 소심한 약속조차도 지키지 못했다.
그런 내가 파리는 개인여행으로도 3번을 갔으니 말 다했다. 왜 그렇게 자주 갔냐는 질문을 받으면 나도 모르겠다고 한다. 내가 프랑스어를 할 줄 안다거나, 거기에 친한 지인이 있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고, 문화예술에 대한 조예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또, 모스크바 - 파리 비행기는 운행편수도 많으면서 티켓 가격이 항상 다른 도시보다 비쌌다. 여행 계획을 세울 때마다 '도대체 이 나라(러시아) 사람들은 파리만 주구장창 가나봐!' 라는 푸념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파리에 어떤 매력을 느껴서도 아니었다. 첫 인상도 솔직히 시큰둥이었고,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해도 나는 그런 포장을 잘 못하는 편에 속한다. 노천카페에 가서도 분위기를 즐기기보다는 ‘아 덥네...’ 혹은 ‘자리가 디게 불편하네’ 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다가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드디어 공감할만한 이유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나를 설명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랜드 투어란 18세기 유럽에서 청년들이 교육의 일환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을 여행하던 관행을 일컫는 말입니다. 종교 분쟁과 내전이 진정되어 사회가 안정되자 영국의 상류층은 자식을 유럽 대륙,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보내 세련된 취향과 외국어를 배워오게 했습니다. 이러한 유행은 곧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귀족뿐 아니라 토머스 홉스, 애덤 스미스, 볼테르, 괴테 등 많은 지성인이 동참하면서 ‘엘리트 교육이 최종 단계’처럼 여겨졌죠. (18~19 페이지)
아마도 나 역시 무의식중에 이런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고, 그래서 언젠가는 스스로 그랜드 투어를 해야 한다는 부채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선택지라면, 아마 프랑스 파리가 제격이 아닌가 싶다. 빈은 특정 시기를 한정하는 부분이 있고, 프라하는 너무 작고, 또 로마와 그리스는 시대적으로 너무 멀리 가있다. 유럽문화 전반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로서는 오히려 생경할지 모른다.
무엇보다 나는 이 책이 여행기로 읽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런 여행계획을 세운 의미가 내 인생고민과 너무나 똑같이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두 아들을 키우는 아빠의 입장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이런 시대흐름 속에서 번영할, 아니 솔직하게 말해 살아남을 수 있는 인재로 키울 수 있을지 고민되는 요즘입니다. ... 한국보다 먼저 변화한 나라의 움직임을 살펴봄으로써 미래를 예측하고, 이에 대비하여 아이들의 교육을 시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죠. (219 페이지)
(미국 젊은 남성의 게임중독 경향에 대해) 세계화의 파도가 끝없이 밀려드는 가운데 불평등이 심화되고, 나아가 평생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변화된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게임’으로 해소하려는 것을 어떻게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23~224 페이지)
부모 입장에서는 이 추세를 그대로 인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공부에는 때가 있고, 또 한국을 유럽처럼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지식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제가 읽은 논문의 내용을 전달해주면서 채훈이와 대화를 나누려고 애쓰는 중입니다. (224 페이지)
여행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환원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즉, 갔다가 돌아오는 게 끝이 아니라는 뜻이다. 알면 더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이건 어디까지나 한번의 실행 과정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닐까 싶다. 때문에 시작 단계에서 미리 알고 가는게 좋냐, 모르고 가도 충분한가의 질문은 사실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처음에 조금 더 많은 것을 보았다고 해도 더 알아보려는 노력이 없으면 무의미한 것이고, 모르고 갔기 때문에 새로운 경험을 할 수도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흥미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알아볼 주제를 찾은 것만으로도 제 값을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시작은 시작일 뿐이다’라는 박명수 어록을 지지하는 편이지만, 여행의 경우는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맞는 참 드문 경우가 아닐까 한다.
그러니까 아버지나 아들이나 단순히 이 책의 주인공들을 부러워하거나, 곁에 있는 상대방을 탓할 건 아니라고 본다. 사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나도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는 여러번 그랬다. 그리고 나는 대학교 2학년 때 비행기를 처음 탔다. 정말이지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얼마나 뻔한 이야기들이 나올까 싶어 책을 읽는 동안 약간의 실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현대 파리의 모습들은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벌어지고 있거나, 최소한 그런 조짐들은 나타나고 있지 않나 싶다. 무슨 소리냐고 할 분들에게, 서울의 도시개발구역들을 가서 걸어보고 대림이나 이태원 등에도 놀러가 가보라고 하고 싶다. 문제 의식은 어떤 경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