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해부 - 뇌의 발견이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켰나
칼 지머 지음, 조성숙 옮김 / 해나무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17세기 초, 영혼이 물질적이며 육신과 함께 죽는다는 생각 즉 소멸주의(mortalism)는 분명 획기적인 것이었으나, 청교도 전쟁과 내란으로 얼룩진 당시의 영국에게 이는 신성모독과 같은 것이었다. 이 책은 1장에서 4장에 이르기까지 영혼의 서식처로서 심장을 중요시한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과 더불어 철학에서 천문학, 연금술 등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서술하는데 그 장들을 할애하고 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이렇게 다채로운 관점에서 중세를 파악하지 못했던터라 익숙한 학자들의 이름이 마구마구 튀어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적잖은 어려움을 느끼며 책을 읽었더랬다. 자신의 주장에 광적인 불관용을 보이는 이들을 향해 존 윌킨스(John Wilkins)가 자신의 책에 '냉담한 독자를 납득시키거나 만족시킬 방도가 없다 해도, 작가는 여전히 자신의 의견을 향유할 수 있다.'(본 책의 본문 125쪽)라는 헌정사를 적었다 했듯 나 역시 당장의 만족을 요구할 방도는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토머스 윌리스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5장에 다다르자 재미있게 읽히기 시작했다. 물론 책 전반에 걸쳐 윌리스와 관련되거나 또는 그의 이론에 영향을 끼쳤을만한 사람과 배경이 계속 펼쳐진다. 어느날 꾼 이상한 꿈으로 인해 그만의 관념론을 정립하게 된 데카르트가 얼마나 거만한 인물이었는지를 알게 된 일은 참으로 흥미로웠다. '진실을 밝히는 일은 아무것도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일에서 시작된다'부터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익히 알려진 명제까지 데카르트는 어쨌거나 이후의 지식 세계에 큰 파장을 주는 대단한 인물이긴 하다. 그리고 윌리스가 평생 모범으로 삼은 그의 스승 하비에 대한 이야기도 한참 다루어진다. 하비는 조금 괴짜같은 면모를 지닌 것 같지만, 그가 윌리스에게 전한 가르침은 터부시해선 안될 법하다. '눈에 보이는 사실을 택하라'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해부 장면을 묘사하는 저자의 센스가 식사를 하면서 책을 읽던 나에게 일침을 가했다. (ㅠ.ㅠ)
'인간 정신의 비밀 장소를 열기 위한' 대담한 연구를 위해 '머리를 열고', 물감을 동맥에 주사해 뇌실로 물감이 들어가지 않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기존의 해부학에서 제시하고 있는 내용들을 반박하는 윌리스. <뇌와 신경의 해부학>을 출간함으로써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9장의 '경련'에는 윌리스가 '매우 아름다웠으며 대단히 지혜로웠다'라고 적은 앤 콘웨이(Anne Conway)가 등장한다. 그녀의 고통은 의학적인 기술로는 치유되지 못했지만, 종교적 힘으로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했다. 이 사례는 윌리스에게 던져진 수수께끼였는데, 제멋대로인 독자였던 나는 잠시 콘웨이의 사연에 빠져 그녀의 재능이라던가 삶이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렇듯 이 책에는 꽤 많은 등장인물들이 출현한다. 친절하게도 책의 뒷부분에는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페이지가 있는데, 소개된 인물만 48명이다.(소개되지 않은  이름들은 책을 읽으면서 조금 더 가볍게 지나치는 것이 좋을듯하다.) 그러니 이야기를 읽다가도 이것이 윌리스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이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순간 착각을 하면서 그들의 이야기에 빠지게 되는 것이었다.
여튼 이야기의 핵심은 환자와 증상, 그리고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한 윌리스의 관찰, 연구이다. 그의 연구가 점점 정점을 향해 치달아가고 있는 와중에도 그는 '인간만이 이성적 영혼을 가지며 자신의 연구가 인간의 영혼이 비물질적인 것임을 입증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의 이론들은 교회와 왕립학회의 환영을 받는데, 이는 기독교 세계의 종말을 가져올지도 모르는 기계론적 철학에 대응하고, 퀘이커교도나 광신도들을 '종교적 죄인'이 아닌 병자로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었다.

 

 



윌리스는 뇌를 재정의하면서도 영혼도 재정의했다. 영혼은 간과 심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미립자가 감정과 기억, 지각능력을 만드는 뇌와 신경에서 나온다. 윌리스는 뇌에 비물질적이고 불멸적인 이성적 영혼이 들어 있다고 믿었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감각적 영혼에 의존했다. 이성적 영혼은 자력으로 외부 세계를 지각할 수 없으며 감각적 영혼이 병들면 이성적 영혼도 병들게 된다. 그리고 윌리스는 영혼을 치료하기 위해 춤이나 즐거운 대화 또는 강철시럽 등을 이용해서 뇌의 부패한 미립자를 바꾸고자 노력했다.(308-309쪽 중)

 

 

책에서도 밝히고 있듯 윌리스의 학설이 근대 서구 사상을 구성하는 주춧돌 중 하나가 되었음에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유는 존 로크(John Locke)의 책임이라고 하는데, 사회계약론으로 유명한 존 로크가 그의 스승의 연구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물론 나 역시 저자처럼 그가 스승의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한 그의 이론들을 확인하면서 미소를 짓긴 했지만.
보일의 법칙으로 잘 알려진 보일(Robert Boyle)의 이야기도 책의 중간중간 등장하는데 이 역시 흥미롭다. 그런데 책의 328쪽에서 한글로 '로버트 보일만'으로 표기되어 있어 순간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이 아닌줄 알고 깜짝 놀랐다. 아마 오자인 듯 하다. 여하튼 그도 포함되어 있는, 서로의 연구에 기여하는 '옥스퍼드 회합'이라는 모임의 성과는 매우 지대하다고 여겨진다.
12장에 이르러서는 MRI의 공이 커진다. 윌리스가 두려워했던 것들. 뇌의 활동을 눈으로 확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견해들과 마주 설 수 없는 그의 두려움은 여지껏 확인해왔던 시대 상황으로 미루어보건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놀라운 세상으로 이끌어주었음'은 분명하다.
이 책이 순전히 신경학, 의학 등의 전문 분야의 지식의 서술에만 급급한 것이었다면 나같은 독자는 감히 도전할 용기를 못낼 것이었다. 이것은 분명 과학역사서다. 그리고 누군가의 평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서사의 힘도 느껴진다. 쉽게 읽히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의외로 재밌는 부분도 많다. 사실 이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있을까라는 걱정에(?) 통독을 했지만, 다음은 정독을 해야겠다는 호기를 부리고 있다. 이런 책은 한번 읽고 잊혀지면 안된다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이런 장르의 책에 더욱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을 일으킨 책. 그렇지만 아무래도 관련 분야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흥미진진하게 읽히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

 


인상깊은 구절 :

실수를 바로잡고 동물 정기의 비밀을 밝혀내려면 뇌와 신경을 적절한 방법으로 연구해야 했다. 윌리스가 제대로 된 연구를 수행하기까지 여러 해가 걸렸다. 이에 대해 그는 "지도자나 동료 하나 없이 정도에서 벗어난 길을 걷는 것은 인적이 없는 황야를 여행하는 것과 같다"고 기록했다.(201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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