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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ㅣ 대교북스캔 클래식 23
버지니아 울프 지음, 김정란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돈과 자기만의 방이 가져다 줄 지적 자유.
자연과 사물을 의식하고 기술하는 감성적인 그녀의 사고를 뒤따르고 있자니, 바삐 좇아가는 나의 눈길도 어느새 기쁨의 빛으로 반짝반짝 빛난다. '잠긴 문 밖에 있는 것이 얼마나 불쾌한 일인가를 생각'하다가 '잠긴 문 안에 있는 것이 더욱 나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울프를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실은 나도 당신 생각에 동의하고 있다고 읊조리는 스스로에게 놀라기도 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최근에 본 적이 있던가? 나도 모르게 꼭 원어로 다시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적당히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게 분명했지만, 울프의 필력은 조심스럽게 느껴지리만큼 풍부한 감성에서 우러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도 그럴것이 '대부분의 여성은 성격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 포프나 '여성은 극단적이다. 그들은 남성보다 우월하거나 또는 저열하다'라고 말한 라 브뤼예르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옮겨놓고선 자신의 복합적인 또는 감추어진 분노를 상냥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2장에 이르기까지 울프는 '여성과 픽션'이라는 자신의 강연 주제에 대해 깊이 고민한다. 그러다가 3장에 다다르면 우리는 시대적으로 배제되고, 내동댕이쳐졌던 여성의 처지를 이야기하던 중 셰익스피어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특유의 상상력으로 그의 누이를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시인으로 탄생시키는(물론 그녀는 허구의 인물이다) 재치를 발휘하는 울프를 만날 수 있다.
16세기에 여성에게 문학적 재능은 축복이라기 보다는 저주였을지도 모른다. 특히 가난한 여성에게 재능은 부단한 시련과 투쟁의 삶을 감내할 것을 종용하는 원동력이었을 터다. '여성에게 지적으로 기대할 만한 것은 전혀 없다는 남성의 의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곳에서라면 이 짐작은 거의 확실하다.
울프는 남성이 속물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다만 재능있는 여성의 삶이 무성히 자란 잡초와 가시나무로 뒤덮여지는 것에 유감을 표할 따름이다. 그리고 여성의 글쓰기에 만연한 적대감이 여성이 글을 씀으로써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순 없는 노릇이나, 자기만의 방에서 쓰여지지 않은 여성의 글이 더 큰 혜택을 받을 기회를 놓치고 있다는 점도 애석히 여긴다. 어쩌면 '결핍'이 여성의 글쓰기에 필요악은 아니었을까?
울프의 책읽기, 상상력, 글쓰기에 대한 신념에 부러움의 시선을 던지며 삶의 기록 또는 예술적인 기록으로서의 여성의 글쓰기란 어때야 하는가를 생각한다.
문단 하나 하나가 인상적이다. 무엇보다 책을 읽고 쓴다는 것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던 찰나 짐짓 모른 체 해왔던 여성으로서 글을 쓰는 작업에 뒤따르는 분노와 한계를 부끄럽지 않게 고백할 수 있게 하는 설득의 힘에 탄복했다.
까짓 한 번 믿어보자. 돈과 자기만의 방이 가져다 줄 지적 자유와 무엇을 쓰더라도 그것이 무한한 가치를 가지게 될 것임을.
아쉬워요! : 개인적인 느낌입니다만 번역문장의 마침이 거의 '~해요'로 되어 있었는데, 읽으면서 글이 조금 가볍고 억지스러운 느낌이 들어 아쉬웠습니다. 어색한 표현들도 더러 있었구요. 읽던 중에 도서관에 들러 일부러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번역본과 대조해서 읽어 보았는데, '~습니다' 표현을 적당히 혼용한 것이 읽기에 더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아무래도 개인적 취향에 따른 것이겠지만, 번역이 좀 더 매끄러웠더라면 감동이 더해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래 인상깊은 구절에서 회색 글씨가 본 책의 번역이고, 파란색 글씨는 제가 비교해 본 다른 책(출처는 일부러 밝히지 않았습니다만, 삭제해야 한다면 언제든 삭제 하겠습니다)의 번역입니다. 리뷰 작성하면서 유난스럽지 않느냐는 핀잔을 들을지도 모르겠지만, 느낌이 다른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비교해보시라는 의미에서 옮겨 봤습니다. 번역판 두권을 대조하다 보니, 원서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해집니다. 완벽한 번역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걸 알기 때문에, 분명 색다른 기쁨일거라고 확신합니다.
좋아요! : 좋은 작품을 예쁜 표지의 양장으로 간직할 수 있다는 점, 들고 다니며 보기에 적당히 작은 책이라는 점, 글자크기와 본문편집 등이 수월한 읽기에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는 만족스럽습니다.
인상깊은 구절 :
검푸르고 망막한 하늘에는 수천 개의 별들이 반짝거리고 있었어요. 헤아릴 길 없는 사회를 상대로 홀로 서 있는 듯했어요. --- 본문 45쪽 중에서
[다른 이의 번역]'푸르고 광막한 하늘에는 수천 개의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마치 불가사의한 사회에 혼자 버려진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삶은 남성, 여성 모두에게 - 나는 길을 따라 어깨를 스치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았어요. - 고되고 어려운, 끊임없는 투쟁이에요. 엄청난 용기와 힘을 요구하지요. 우리처럼 환상을 지닌 피조물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필요한 듯해요. 자신감이 없다면 우리는 요람 속의 아기 같겠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헤아릴 수 없지만 무한한 가치를 지닌 특성을 가장 신속하게 창출해낼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들을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본문 65쪽 중에서
[다른 이의 번역]어느 성에게나 삶은 힘들고 어려운 영속적인 투쟁입니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용기와 힘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우리같이 환상을 지닌 피조물에겐 그것은 아마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필요로 할 겁니다. 자신감이 없다면 우리는 요람에 누운 아기와 마찬가지이지요. 이 측정할 수 없이 가벼운, 그러나 무한한 가치가 있는 자질을 어떻게 해야 가장 신속하게 획득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들이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함으로써 가능하겠지요.
그렇긴 해도, 내가 지금 쓰려고 하는 첫 번째 문장은, 글을 쓰는 사람이 자신의 성을 생각하면 치명적이라는 거에요. 나는 책상을 향해 가로질러 가서 여성과 픽션이라는 제목이 적힌 종이를 집어 들며 말했어요. 순전히 남성 또는 여성이 되는 일은 치명적이에요. 남성적인 여성이나 여성적인 남성이 되어야만 해요. 여성이 어떤 불만을 조금이라도 강조하거나 또는 정당하더라도 어떤 원인을 변명하는 것.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여성임을 의식하고 말하는 행위는 치명적이에요. 치명적이란 말은 비유적 표현이 아니에요. 의식적인 편견을 가지고 쓴 글은 모두 소멸될 운명에 처해져요. 풍요롭게 될 수가 없지요. 하루 이틀 정도는 빛나고 효과적이며 유력하고 걸작처럼 보이나 해질녘이 되면 시들어 버려요. 다른 사람들의 마음 안에서 자라날 수가 없어요. 창조 행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 안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이 협력해야 하지요. ----본문 191쪽 중에서
[다른 이의 번역]내가 여기에 쓰게 될 첫 번째 문장은 바로 글을 쓰는 사람이 자신의 성을 염두에 두면 치명적이라는 것입니다. 순전한 남성 또는 순전한 여성이 되는 것은 치명적입니다. 인간은 남성적 여성이거나 여성적 남성이어야 합니다. 여성이 어떤 불평을 조금이라도 강조하거나, 정당한 것이라 하더라도 어떤 대의를 변호하는 것, 어떤 식이건 여성으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치명적인 일입니다. 여기서 '치명적'이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의식적인 편향성을 가지고 쓰인 것은 필연적으로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비옥해질 수 없지요. 그런 작품은 당장 하루 이틀 동안은 빛나고 효과적이며 강력한 걸작처럼 보일지 모르나, 해 질 무렵이면 시들어버립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서 자라날 수 없는 것이지요. 창조적 예술이 이루어질 수 있으려면 먼저 마음속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이 협력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