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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신 유희정신 - 어린이문학의 길 ㅣ 이오덕의 문학 1
이오덕 지음 / 양철북 / 2020년 2월
평점 :
품절
글쓰기 교육을 해마다 하고 있지만 모든 아이들이 제 마음이 살아있는 글을 써내진 않는다. 일기 쓰기를 비롯한 글쓰기를 공부처럼 어른들에게 강요받은 적이 있던 아이들은 문장 하나 쓰기가 고역이다. 그런 아이들에게는 마음에 드는 동시 따라쓰기를 권한다. 글자수가 적은 동시만 선택할까 싶어 많은 이들에게 좋은 동시로 알려진 동시 소개도 한다. 해마다 여러 동시들을 읽게 되지만 지금 이 시점에 돌이켜보니 동시 읽기를 비판적으로 해본 적이 없다. 이오덕 선생님의 <시정신 유희정신>을 읽고 나니 당혹감이 밀려온다.
아이들은 또래 아이들이 쓴 재치있고 귀여운 동시들을 읽고 크게 공감한다. 그런데 아이들 동시만 보여주기는 어쩐지 뭔가 부족한 느낌이 앞선다. 그래서 어른들은 작가들이 쓴 동시를 ‘교과서’처럼 여기고 ‘동시란 이런 것이다’라고 가르쳐 본다. 어른들이 쓰고, 어른들이 소개하는 그 동시들이 모두 진짜 동시인가? 그동안 이를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오덕 선생님은 어린이가 쓴 시가 ‘어른이 쓰는 문학작품과 다르고 달라야 한다’고 말한다.그리고 어른이 쓴 시로 일반시, 동요, 동시, 어린이가 쓴 시는 어린이시로 구별하고 다음 내용들을 당부한다. ‘모든 어린이가 자기 생활을 정직하게 글로 써서 개성을 펴 나갈 수 있도록 참된 생활 글쓰기 교육, 어린이 자신의 시를 쓸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어린이에게 소위 동시라 불리우는 어른들의 흉내인 말장난인 글을 쓰게 해서는 안된다. 어린이시와 어린이를 위해 쓰여진 어린이문학 작품인 동시는 구별되어야 한다. 어른인 동시 작가는 시와 어린이의 글쓰기 작품을 많이 읽고, 어린이 속에 살면서 어린이의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
<시정신 유희정신>은 동시인과 어린이들에게 글쓰기 교육을 하는 어른들에게 어른의 관념에 사로잡혀 저지르는 실수와 잘못을 돌아보게 한다. 어린이의 삶을 외면하고, 어린이를 속이고 희롱하는 글, 어린이가 해독할 수 없는 글을 만난 아이들이 문학에서 떠나게 된다면 여기에 어른들의 책임이 없다고 누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아이들에게 억지로 문학을 쥐어줘서는 안된다.
이오덕 선생님이 1977년에 펴 낸 <시정신과 유희정신> 평론집이 그동안의 어린이문학 발전에 분명 기여한 바가 클거라 확신한다. 30여년 가까이 흐른 2020년에 선생님의 글을 읽게 된 나 역시 앞으로 동시와 어린이시를 구별하고 어린이문학작품을 좀 더 깊게 바라본 뒤 아이들에게 소개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어린이 문학작품을 쓰는 작가와 그 글을 이용하는 교육자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문학을 통해 아이들을 만나는 길, 이 책도 길잡이 역을 톡톡히 할 것이다.
*책 뒷표지 글
어린이가 없는 어린이문학이 있을 수 없는데도 우리는 지금까지 어린이 문제를 한 번도 논의한 일이 없다. 우리가 쓰고 있는 동화와 시를 읽어 줄 아이들, 그 아이들은 과연 어떤 아이들인가?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살아가기를 권하고 있는가?
p.41
동심의 유희 세계는 그 주제의 빈약성과 제재의 한계성 때문에 우리 동시를 참된 시로서 높여 주지 못하고 갈수록 심하게 반시적인 수공품의 조작 경향으로 기울어졌다. 윤석중과 박목월의 유아적 세계는 김영일과 강소천에 와서 어린이 혹은 소년층까지 그 유희의 대상이 높아졌을 뿐, 생활의 표면만을 미화하고 어린것의 흉내를 내는 상태는 다름이 없었다. 이런 동시인의 작품들은 안이함을 원하고 이기적인 삶의 태도를 익히고 있는 많은 어린이들에게 한갓 오락물을 주는 구실을 하여 크게 환영받았다. 매스컴의 물결을 타고 전국의 도시와 농촌 아이들에게 침투되고 보급되었다. 비뚤어지고 추잡한 어른의 사회에서 거칠고 살벌하고 잔인한 습성에 젖어 있던 아이들은 이런 동시에서 경박한 웃음과 신기로운 말재주의 잔꾀를 공급받고 좋아한 것이다.
p.46-47
어린이문학 작가는 어린이를 그가 생산한 작품으로써 키워 가야 하는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여야 한다. 시로써 어린이를 키워 가자면 무엇보다 시가 되어 있어야 하고, 시가 되자면 아이들이 읽어서 가슴 깊이 파고드는 것이 있어야 한다.
감동이 없는 동시를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나온 많은 동요.동시들이 감동 대신에 가벼운 웃음과 손재주를 팔아 왔다. 동시인들은 아이들을 유치한 세계에서 꿈만 꾸고 놀이와 장난만 하고 있는 천사로 생각해 왔다. 그래서 아이들인 척하여 우스꽝스러운 흉내를 내고, 괴상한 말의 재치와 꾸밈으로 아이들의 관심을 끌고, 혹은 공연히 어렵게 써서 아이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고, 더러는 괴이한 느낌이나 생각을 억지로 만들어 보이기도 했다. 물론 극소소의 훌륭한 시인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에게 보급되는 상품의 양이라는 면에서 볼 때 이러한 대세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던 것이다.
p.48-49
많은 작가들이 당분간 동시라는 말을 기피할 필요도 있을 것 같다. 동시를 쓴다는 생각을 버리고 시를 쓴다는 정신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아이들을 멀리서 바라보지 말고, 위에서 내려다보지 말고, 또는 하늘 위에 모셔 두지 말고, 자기와 같은 자리에서, 바로 옆에서 함께 손을 잡고 살아가는 인간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함이 유익할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계를 넓혀야 한다. 말장난, 심리의 장난, 골동품의 장난, 그 손장난을 그만두고, 더욱 크고 넓고 깊고 무겁고 굵직한 감동의 세계로, 생활의 세계로 나와야 한다. 안개만 마시고 꿈만 꾸는 그 천사도 아닌 유령의 세계에서 탈출해야 한다.
p.473
흔히 어린이문학은 동심의 문학이라고 하지만, 이 동심이란 것을 좀 깊이 추궁해 본 일이 우리에겐 없었다. 그저 막연히 ‘아이들의 티 없이 맑은 마음’ 정도로 만족해 왔다. 그러나 어린이 문학이 동심을 찾고 동심을 키우고 동심을 보여 주는 동심의 문학인 것이 사실이라면 ‘순진무구한 세계’라고만 간단히 말해 넘기는 것은 무책임한 짓이다. 동심의 정체를 꼭 어떤 형상으로 고정시켜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의 성격, 자세, 지향같은 것을 문학을 창조하는 작가의 세계에서 제 나름대로 체득해 놓아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202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