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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
브라이언 스티븐슨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0월
평점 :
<월터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은 올해 내게 온 책 중 최고의 책이며, 비문학 부분에선 아마도 지금껏 최고의 책일 것이다. 담겨있는 내용, 책을 덮고 난 후의 여파, 책을 통해 알게 된 사실들 뿐만 아니라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사로잡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작가의 역량 또한 굉장한 책이다. 이 책의 저자 브라이언 스티븐슨은 Equal Justice Initiative라는 인권보호단체를 이끌고 있는 미국의 변호사로, 20대 초반 어떻게 자신의 꿈을 발견하고 이 분야로 뛰어들었는지부터 가장 최근의 사례까지, 자신이 맡았던 의뢰인들의 사례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첫 장부터 에필로그까지 이어지는 월터 맥밀리언 케이스를 중심으로 다양한 케이스가 소개되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각종 보도 자료와 통계치가 객관적으로 함께 제시되며 소설보다 더 허구같은 미국의 현실이 독자를 충격에 몰아넣는다.
브라이언 스티븐슨과 Equal Justice Initiative의 동료들이 변호한 의뢰인들은 저지른 죄보다 턱없이 높은 형을 구형받은 - 주로 사형과 가석방없는 종신형을 받은 - 흑인들과 가난한 백인들이다. 수백명이 변호를 요청하지만 인권변호단체의 인력 부족으로 고르고 고른 의뢰인들인지라 사례들이 모두 기구하고 극적이다. 모두 실화이기 때문에 각 사례가 사형이라는 비극적인 엔딩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아 어떤 소설 못지 않게 글의 흐름이 긴박감을 가진다. 저자가 성공적인 변호사라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각 사례를 교차하며 제시하는 순서나 방식이 매우 효과적이어서 내용의 무거움을 잊고 어느새 여러 페이지를 순식간에 빠져 읽고 있게 된다. 사례 도중도중 관련 통계치를 삽입하여 제시하는데 이 타이밍 또한 매우 적절하여, 통계치가 지루하기는 커녕 각 사례에 이미 사로잡혀 있는 독자로서는 숫자로 나타난 현실에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
문학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시적인 비문학에 비해, 주제가 좀 더 함축적으로 플롯에 통합되어 제시되며, 더 다양한 층위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월터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은 비문학의 냉철한 진실 폭로와 더불어 이러한 문학의 장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특히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되는 월터의 케이스와 그 이후를 보면 한 사건이 개인에게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삶의 모든 것을 관통하는지, 영화에선 전부처럼 그려지는 재판 승소 여부가 실제로는 얼마나 지엽적인 문제인지, 공포와 혐오와 편견 등과 같은 감정이 개인의 심리에 또는 집단의 심리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등, 곱씹어 볼 때마다 새로운 각도에서 다시 생각하고 깨닫게 된다. 여기에서 한번 더 작가의 역량을 느낄 수 있다. 이 사례의 속성상 작가가 이 모든 것을 전부 조금씩이라도 명시하여 언급하는 것조차 불가능할만큼 담겨있는 의미가 다층적이다. (사실 우리의 삶이 다 그렇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를 다 언급하지 않더라도 읽는 사람에 따라 생각해 볼 거리가 다양하도록 글이 뛰어난 것이다. 브라이언 스티븐슨의 이러한 역량은 물론 그의 필력에도 기인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러한 문제들이 그에게는 대상이라기보단 몇십년간 직접 살아온 그의 인생 자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Just Mercy이다.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인간다운 자비심이 있다면, 다른 인간에게 이러한 일을 계속할 수도, 이러한 일이 계속 이루어지도록 방치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 다뤄지는 것들은 미국 현실만도 아니고, 인종문제만도 아니고, 사법체계 얘기만도 아니며, 빈부격차의 문제만도 아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많은 부분에서 우리나라가 떠오른다. 아마도 세계의 많은 곳에서 Just Mercy에서 자신들의 사회와 닮은 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은 이 시대의 양심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읽고 이에 대해 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인들에게 많이 소개하여 현재 읽고 있으며, 몇몇 친구들은 내가 선물로 줄 것을 기다리고 있다. 이 책을 우리에게 선물한 브라이언 스티븐슨에게 존경을 바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