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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오랜만에 읽는 프랑스 문학인데 꽤나 마음에 들었다. 기억없이 살아가는 것에 대한 불안감과 불만족감, 재구성한 기억이 내 것인가 다른 사람의 것인가에서 제기되는 정체성의 문제. 진짜 내 것을 찾았더라도 그 기억이 과연 나라고 할 수 있는가 또는 기억으로서 별개로 존재하는가 등 기억에 관한 다양한 화두가 소설 속에서 자연스럽게 제시된다. 내가 문학을 철학보다 더 좋아하는 이유는 다양한 문제와 그에 대한 관점이 삶(플롯) 속에서 자연스럽게 통합되어 제시된다는 것인데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매우 만족스럽다. 또한 이 작품이 일종의 미스터리 형태를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를 급하게 몰아치지 않아, 사건 속에 하나씩 던져지는 화두를 천천히 음미하며 걷듯이 생각해볼 여유가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을 읽기 얼마 전 토탈리콜을 다시 보고 쓴 것이 또 크게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최근 다시 필립 K. 딕을 찾게 되면서 그의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를 원작으로 한 토탈리콜을 다시 보게 되었다. 아놀드 슈월츠제네거가 활약을 펼치고 아름다운 여인들이 그를 속이고 또 사랑에 빠지는 전형적인 액션영화의 도식 속에서도 ‘기억과 정체성’이라는 주제는 뚜렷이 드러난다. 기억과 정체성이야말로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키워드가 아니겠는가. 토탈리콜에서도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서도 기억에 대한 사유는 나의 정체성과의 연결을 벗어나 더 나아간다. 기억은 나의 정체성과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를 정의하는데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타인이 나에게 친구인가, 적인가는 기억으로 결정되는 것인가? 자신의 기억을 찾아가는 소설 속의 주인공은 기억 뿐 아니라 모든 사람, 모든 관계, 모든 판단, 나아가 자신을 의심한다.
책의 내용과 별개로 나는 번역이 매끄럽지 않아 읽기가 매우 괴로웠다. 일례로, 사진 등 뒤에 사진 속 인물의 이름이 안 적혀있다고 번역된 부분이 있다. 아마 불어도 영어처럼 ‘등’이랑 ‘뒤’가 같은 단어인가보다. 영어로 치자면 the back of the picture에 이름이 안 적혀 있다는 것인데, 이 영어 단어 back이 상황에 따라 ‘등’ 또는 ‘뒤’라고 적절히 번역되어야 한다. 이런 식의 오묘한 번역들이 계속 나오니 마치 화려한 장관을 초점 안 맞는 thumbnail 사진으로 보는 듯한 답답한 기분이다. 또 한편으로는. 알라딘 서평을 보니 번역하신 분의 이름만으로도 믿고 이 책을 구입할 만큼, 김화영 역자는 프랑스어 번역계에서 유명한 분이시라고 한다. 심지어 역자 약력에는 1999년에 최고의 불문학 번역가로 선정되었다고 적혀 있다. 아니 그렇다면 이 어색한 번역들이 사실은 파트릭 모디아노의 문학적 장치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