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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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두 함께 밤에 걷는다. 단지 그것뿐인데 말이야.

어째서 그것뿐인 것이, 이렇게 특별한 걸까.

 밤새 80킬로를 걷는 ‘야간보행제’ 북고의 학생들은 일 년에 한번 있는 그 행사를 시작하려 하고 있다. 그 속에는 이복남매인 것을 숨기고 있는 고다 다카코와 니시와키 도오루가 있다.

 서로를 무시하면서도 그 누구보다도 강하게 서로를 의식하고 있는 두 사람.

이 두 사람의 입장에서 온다 리쿠는 야간보행제와 그들 주변의 친구들과의 사연, 그리고 청춘에 대해 풀어내고 있다.

 고다 다카토는 이 ‘야간보행제’ 중에 자신과 작은 내기를 한다. 그에게 말을 걸어, 대답을 듣는 것. 이 작은 내기가 과연 이루어질까? 이루어진다면 어떤 상황으로 전개될까에 초점을 맞춰 읽다 보면 어느새 다른 흥미를 자극하는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다카토의 친구이자 니시와키를 짝사랑하는 안나. 미국으로 간 안나에게서 온 엽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 아마, 나도 함께 걷고 있을 거야. 작년에, 주문을 걸어두었거든. 다카코네의 고민이 해결되어서 무사히 골인할 수 있도록 뉴욕에서 기도하고 있을게.

주문은 또 무엇이고, 작년에 언제 어떻게 걸어 놓았다는 것일까? 그리고 고민? 무슨 고민을 말하는 것일까?

 니시와키의 친구인 도다 시노부, 다카코는 도다 시노부와 문제의 여학생이 같이 있었던 것을 기억해 낸다. 그 여학생의 사촌은 이 야간보행제를 통해 그녀가 낙태하게 만든 문제의 남자를 찾고 있다. 그렇다면…….

 작년 그 어느 반에서도 존재를 확인할 수 없었던 검은 야구모자를 쓴 소년. 그는 대체 누구였을까? 과연 올해도 등장할까?

 야간보행제 기간에 니시와키에게 고백하기로 결정한 우치보리 료코. 그 소문은 야간보행제가 계속되는 동안 모두에게 화젯거리가 되고 있다. 과연 그녀가 준비한 선물은 무엇일까? 니시와키는 그 고백을 받아들일까?

 

 그들이 걷고 있는 길과 주변 풍경에 대한 묘사를 읽으며, 그들의 생각을 듣고 있다 보면 어느새 나도 같이 그들과 야간보행제를 참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몰래 도다 다카코의 뒤를 따라 걷다 니시와키가 있는 곳까지 내달려 뛰면서 아니라니까. 다카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아. 라는 조바심을 내게 만든다. 조잘조잘 이야기를 하며 걷는 친구들. 피곤에 지쳐서 어느새 말을 잃어버리고 걷는 데만 열중하기도 하고, 주변 풍경을 돌아보며 야간보행제가 끝나는 것을 아까워하기도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새 나는 내 청춘의 시기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그들 만큼 무언가를 고민해 본 적이 있었던가? 맞아. 우리 때는 이런 행사를 했었어. 그때 나는 뭘 하고 있었지?

 기록을 남긴다는 것, 일기를 남긴다는 것은 사라져가는 추억을 붙잡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매일매일 새로울 수 있었던 시기를 넘긴 지금에서야 후회를 하다니……. 바래져가는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지난 기록을 훔쳐보는 것이 아닐까. 아쉽게도 나에게는 그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찬찬히 기억의 조각들을 살피고 있자니 추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슬며시 떠오른다. 그런 기억을 찾아낼 때마다 입가에 피어나는 미소와 반대로 눈가가 시리는 것은 왜일까. 아마. 나에게도 청춘이라 부를 수 있는 그 시기가 있었다는 흐뭇함과 더는 그 시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아쉬움 때문이겠지.

 

해는 옛날에 저물었다. 그러나 수평선을 밝았다.

하늘도 바다도 완전히 밤의 소굴인데 수평선만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이다. 분명 바다 저편에 광원(光源)이 되는 뭔가가 있다.

세 사람은 홀린 듯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 뭔가가 있다.

마치 수평선이 이 세상을 가로질러 금이라고 그어 놓은 것 같았다. 창호지인지 무엇인지가 그곳만 얇아져서 건너편 세계의 빛이 새어 나오는 것 같다.

그러나 위아래에서 밤이 공격하고 있었다. 조금 시선을 올렸다 내렸다 하면, 칠흑 같은 밤과 파도가 수평선을 향해 밀려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저 수평선만이 낮의 마지막 아성인 것이다. - P106

캄캄한 양배추밭이 길게 이어지는 경치 좋은 길이다. 학생들이 들고 있는 회중전등 불빛이 깜박깜박 옅은 빛의 행렬을 지어 움직인다. 대단한 빛은 아닌 듯이 보이는데, 떨어진 곳에서 보고 있으면 직선의 빛이 하늘의 구름에 반사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

"신비롭다."

"구름까지 닿아 있어."

"빛이란 직진하는 거 맞구나."

그런 사소한 발견이 기쁘다. 어두운 곳을 걷는 데도 익숙해져서 호흡과 보조가 어둠에 녹아들고 있는 것에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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