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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켜줘 아니면 나를 죽여줘
에릭 포토리노 지음, 하진화 옮김 / 레모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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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너무 좋았어요. 얼마나 많은 밑줄을 그었는지 몰라요.

“다른 사람을 공격하면서 예술을 창조할 수는 없어. 나 역시도 무명의 젊은 예술가였지만, 그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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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되었으나 새로운 세계로
최예슬 지음 / 어라운드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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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과 우박이 동시에 흩날리는 날이었다. 하얗고 하얗던 그 세상에 천둥과 번개가 내리쳤다. 비가 내리고, 날이 맑고, 다시 비가 내리길 반복하더니 어느새 창밖은 초록빛으로 물들어있었다. 요란한 봄의 신고식을 통과하면서 온몸이 저릿한 감각을 느꼈다.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몸이 아직 제대로 펴지지 않은 듯하다. 그해 겨울을 어찌 지나왔는지, 나는 그 시간들을 새하얗게 잊어버렸다. 지우고 싶은 문장처럼 새까맣게 칠해버렸나, 지난 겨울 무엇을 했는지 왜 떠오르는 것이 없을까. 제대로 펴지지 않은 것이 아무래도 몸이 아니라 기억인 것 같다.

 

요즈음의 나는 기억 속 세계를 거꾸로 걷는 연습을 하고 있다. 시간의 태엽을 아주 천천히 감으면, 내가 놓친 것들을 다시 볼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스러움, 지나친 것들에 대한 미안함, 섣불리 결정내린 것들에 대한 후회, 그런 것들을 마주볼 때면 자다가도 눈이 떠진다. 온몸의 마디마디마다 소리가 나는 것은 그 어느 시간에도 있지 못하는 내 몸의 비명일 것이다. 몸과 마음이 하나라는 사실을 이렇게 감각하는 것이 서글퍼 나는 더 깊고 작게 웅크린다. 내게 껍데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다시금 기억의 세계로 들어간다. 여전히 알아보아야 할 내가 남았다.

 

한 발짝 떨어져 그 아이를 보는 것이 왜 그리도 힘든지,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신발조차 제대로 신고 나오지 못한 그 아이를 보면서 나는 속절없이 무너져내린다. 여전히 내가 나를 구하지 못해 나는 그 겨울을 반복해 사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맴도는 그 자리가, 결국 나라는 한 사람이 돌아가게 될 곳이라면, 나는 두 손에 내가 쥘 수 있는 모든 봄의 씨앗을 들고 그 아이 곁으로 가겠다. 그렇게 내가 찾던 그 아이가 성장해 다시 나를 찾아올 때까지, 기어코 만날 때까지, 매일을 살아내며 기다릴 것이다. 기다리고 있지만 애타지 않는 마음으로, 기대하겠지만 서두르지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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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수업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안온북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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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냐르는 말한다. 여성들은 변성은 겪지 않는다고. 유년기의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그저 말을 하면 되고, 입을 벌리기만 하면 된다고. 작곡을 많이 한 여성이 드물었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빈약한 논거를 들이밀다니. 앞선 키냐르의 글에서 발견한 아름다운 문장들이 애석할 지경이다. "늙지 않는 강물이 농후한 빛에 잠겨 영원한 상처처럼 흐른다"는 그의 문장에 얼마나 감탄했는데. 


그의 주장으로 인해 오랜 시간 잊혀진 여성 작곡가들을 끄집어냈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연주하지 못했고,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일찍 결혼해야 했으며,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바느질이나 강요받았던 여성 작곡가들. 그녀들의 한탄이 여기까지 들리는 듯하다. 힐데가르드 폰 빙엔, 프란체스카 카치니, 루이스 화렌크, 클라라 슈만, 에이미 체니 비취, 레베카 클라크, 에밀리 메리 헌트, 제인 그리어, 미리암 매크리에게 묻고 싶다-그럴수만 있다면-. 그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현대과학에서 밝혀진 여성도 변성기를 겪는다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그의 주장에는 변성기로 목소리를 잃어가는 남성에 대한 지나친-정말이지 과할 정도로-애틋함이 묻어있다. 특히, 신체적 변화의 "허물벗기"에 있어 남성은 13세 혹은 14세 무렵의 '변성'인 반면, 여성은 45세~50세가 되서서야 '폐경'으로 인한 것이라는 주장은 쓴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정말 그럴까. 

  

키냐르는 남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목소리가 암울해진 자이며, 그래서 자신의 성대에서 사라진 가녀린 고음의 목소리를 찾아 죽을 때까지 헤매는 자라고. 그렇다면 여성은, 여성은 무엇을 찾아 헤매는 자인가. 


그간 남성으로 대표되었던 인간의 목소리가 그 자체로 울부짖음으로 시작되는 소나타라면, 여성의 목소리는, 여성의 울부짖음은 몸 안에 숨겨져 있어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리하여 오로지 자신 외에,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연주될 수 없는 무언가다. 내게 여성은 그 무언가가 과연 자신에게 무엇인지 평생에 걸쳐 찾아 헤매는 자이다.  


남성의 목소리가 시간 안에서 울린다면, 여성의 목소리는 또 다른 여성의 몸 안에서 울린다. 울리고 울리는 울음. 그 울음은 시간을 뛰어넘는다. 


이린아의 시구를 빌려,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밤에만 우물가를 찾는 여인은 짐승의 이빨 사이로 울어본 적이 있어

울음이란 짐승의 이빨 사이에 머리를 집어넣고 다물어지지 않도록 버티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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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온북스로부터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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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잃어버리길 바랍니다
유시은 지음 / 메이킹북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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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은님의 일기장에 쓰여진 글과 사진들을 보면서 어디 털어놓을 곳이 없었구나, 쓰지 않고서는, 그리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었겠구나,라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살기 위해 토해낸 것들, 토해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들. 한 편의 편지와 같은 글과 수많은 그림을 쓰고 그리며 버텨온 시은님을 떠올렸다.

 

굳지 않는 바다가 된 것 같다는 그의 말을 천천히 곱씹으며, 그가 그린 <엉킨 진물>을 다시 보았다. 책에 수록된 여러 그림들 중에서도 유달리 그 그림이 눈에 들어왔던 이유는 무엇일까. 굳었다가 흐르고, 흐르다가 다시 굳고, 그렇게 생긴 피딱지 아래의 노란 진물. 검게 착색되어가는 것들과 그럼에도 여전히 새하얀 것들의 엉킴. 


그 엉킴 속에서 잃어버릴 것은 잊어버리고, 찾아야 할 것들만 기억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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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정의 위로 - 버지니아 울프에게 '자기만의 삶'으로 쓴 답장
이혜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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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이혜미의 이야기에 화답하듯 써내려간 나의 세계다. 아주 조금의 진실을 뒤섞은 거짓의 세계. 혹은 그 반대. 


잠깐, 아주 잠깐, 어떠한 행위을 멈출 수 있을까. 어느 날 문득 바라본 거울에서 무언가, 전에는 보지 못한 것을 발견했어. 얼굴 정 가운데를 아슬히 비켜나간, 세로로 나열된 것. 그게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었어. 별 생각없이 넘기던 쇼츠를 통해서 말이야. 자살점이래.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점과 기억을 함께 지워주는 곳을 알고 있니. 피부정신과 또는 정신피부과 같은 곳. 기왕이면 둘 다 없애는 편이 좋잖아. 


아니다, 없앴다면 난 너의 글을 읽지 않았겠지. 읽을 필요도 없었을 거야.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감각으로 느껴지는 것들. 너의 세계가 낯설지 않다는 것이 슬프면서도 한 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어. 나의 세계 또한 너에게 마찬가지겠지. 


내 어릴 적 세계는 검은 비닐봉지로 씌워있었어. 그 안과 밖에 내던져진 볼품없는 것들. 불 꺼진 것들. 주섬주섬 주워낸, 그것들을 게워낼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정말이지 노력했는데, 왜 아무리 노력해도 눈앞이 희뿌여지는 것을 막을 수 없을까. 노력만으로 안되는 것들은 왜 이리도 많은지. 


넌 적었지. 결점은 스스로 말할 수 있게 된 순간부터 더 이상 결점이 아니라고, 난 조금 다르게 답할께. 자기 자신 외에 그 누구도, 청자이자 독자가 될 수 없는 그런 결점은 끝내 말해지지 못할 거야. 말할 수 있는 결점이라는 것은 어쩌면, 용인되어지는 결점일지도 몰라. 그래, 거기까지. 딱, 그만큼만. 


내 결점은 이상하고도 지독한, 역겹고 메슥거리는, 매섭고도 매서운 것들 사이에 있어. 그것은 이미 나를 관통했고, 그 텅 빈 공간은 우물과도 같지. 빛이 들지 않는 메마른 우물. 너가 삶을 어떻게 지어올릴지 생각하는 동안, 나는 끊임없이 물을 길러야 했지.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 늦게 찾아온 것들은, 더 이상 갖고 싶지가 않아. 다 때가 있는 거잖아. 때를 놓친 것들은 더 이상 소중하지 않아. 나는 그래서 일부러 이름을 잃어버렸지. 이제는 내가 찾아가고 싶은 것들의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 사랑하고 싶은 이들의 이름을 품에 안고 싶어서.


너가 버지니아를 떠올린 시간만큼, 나는 에르노를 떠올려. 방금 날을 간 것만 같은, 칼날인지 펜촉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뚝뚝 떨어지는 선홍빛 핏물 같은 이야기. 자기 자신을 온전한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 발화, 폭발하는 불씨. 내게 에르노는 피 흘리는 마리아야.


그녀의 글은 때론 내게 구원이 되고, 그 자체로 빛이 되지. 나는 그 빛에 의지해 덜덜 떨리는 손과 발로, 매서운 바람에 몸을 웅크리면서도, 걷고 또 걸어. 긷고 또 길어. 메마른 우물을 채우기 위해서. 실은, 채워지는 것은 중요치 않아.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그 발걸음, 그 발걸음에 집중할 뿐이지.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우물에 빠져 죽지 않는 것. 귀신이 되지 않는 것. 


멀리, 아주 멀리 흐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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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즈덤하우스로부터 책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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