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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되었으나 새로운 세계로
최예슬 지음 / 어라운드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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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과 우박이 동시에 흩날리는 날이었다. 하얗고 하얗던 그 세상에 천둥과 번개가 내리쳤다. 비가 내리고, 날이 맑고, 다시 비가 내리길 반복하더니 어느새 창밖은 초록빛으로 물들어있었다. 요란한 봄의 신고식을 통과하면서 온몸이 저릿한 감각을 느꼈다.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몸이 아직 제대로 펴지지 않은 듯하다. 그해 겨울을 어찌 지나왔는지, 나는 그 시간들을 새하얗게 잊어버렸다. 지우고 싶은 문장처럼 새까맣게 칠해버렸나, 지난 겨울 무엇을 했는지 왜 떠오르는 것이 없을까. 제대로 펴지지 않은 것이 아무래도 몸이 아니라 기억인 것 같다.

 

요즈음의 나는 기억 속 세계를 거꾸로 걷는 연습을 하고 있다. 시간의 태엽을 아주 천천히 감으면, 내가 놓친 것들을 다시 볼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스러움, 지나친 것들에 대한 미안함, 섣불리 결정내린 것들에 대한 후회, 그런 것들을 마주볼 때면 자다가도 눈이 떠진다. 온몸의 마디마디마다 소리가 나는 것은 그 어느 시간에도 있지 못하는 내 몸의 비명일 것이다. 몸과 마음이 하나라는 사실을 이렇게 감각하는 것이 서글퍼 나는 더 깊고 작게 웅크린다. 내게 껍데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다시금 기억의 세계로 들어간다. 여전히 알아보아야 할 내가 남았다.

 

한 발짝 떨어져 그 아이를 보는 것이 왜 그리도 힘든지,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신발조차 제대로 신고 나오지 못한 그 아이를 보면서 나는 속절없이 무너져내린다. 여전히 내가 나를 구하지 못해 나는 그 겨울을 반복해 사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맴도는 그 자리가, 결국 나라는 한 사람이 돌아가게 될 곳이라면, 나는 두 손에 내가 쥘 수 있는 모든 봄의 씨앗을 들고 그 아이 곁으로 가겠다. 그렇게 내가 찾던 그 아이가 성장해 다시 나를 찾아올 때까지, 기어코 만날 때까지, 매일을 살아내며 기다릴 것이다. 기다리고 있지만 애타지 않는 마음으로, 기대하겠지만 서두르지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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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3종 리커버 세트 - 전3권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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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아름답게 다시 나오기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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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이 발견한 반 고흐의 시간 - 고흐의 별밤이 우리에게 닿기까지, 천문학자가 포착한 그림 속 빛의 순간들
김정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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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기록부 삼 년 내내 적어낸 꿈은 미술선생님이었다. 왜 그런 꿈을 꾸었더라. 다 지난 이야기. 교복을 입는 내내 만났던 미술 선생님들을 좋아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나는 미술관 근처에도 가본 적 없었다. 그로부터 한참 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찰흙 조소 모델을 지원했을 때, 미술학원에는 입성할 수 있었다.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을 보기 시작했던 것은 독립 아닌 독립을 시작한 후였다. 그때 본 작품들은 기억에 없다. 정처 없이 돌아다닌 탓에 발바닥으로 전해오는 얼얼한 감각만이 선명할 뿐이다.

 

잊고 지낸 그 기억들이 소환된 것은 이 책의 저자인 김정현의 멘트 때문이다. “진로에 대한 고민 한번 없이, 별을 보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아버지와 어머니께 감사를 전한다”. 저절로 나오는 부러움 섞인 탄식. 근래에 이리 부러운 사람이 또 있었나. 나는 김정현이 보는, 그러니까 별을 보는 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는 이가 바라보는 어둠 속 빛은 어떨까 궁금해졌다.

 

김정현의 글을 따라가면서 다시 교복을 입은 학생이 되었다. 과학과 미술 수업을 동시간에 듣는 헤르미온느가 된 기분이었다. 김정현이 <론강의 별밤>과 실제 별의 위치를 비교 분석한 것과 <별이 빛나는 밤>에 세 가지 가정을 세워 밤하늘을 재배치한 것에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의 시선 덕에 나 역시 <밤의 카페테라스>, <론강의 별밤>, <별이 빛나는 밤> 속 그려진 별의 차이를 유심히 바라보게 되었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빛을 그려내는 빈센트 옆으로 간다. 저는 오랜 기간 어둠 속에서 자랐어요. 그 탓에 어둠과 빛을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당연했던 것이 결코 당연하지않음을 알게 되었을 때 저는 울부짖었습니다. 그때의 제가 가진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혹 당신은 말할 수 없어 그리는 사람인가요. 저는 말할 수 없어 적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설명할 수 없던 것을 설명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어둠 속에서도 빛의 스펙트럼을 봅니다.

 

나는 빈센트가 테오와 주고받은 편지를 한 장씩 넘기며, 그가 살아온 삼십칠 년의 시간을 살아본다. 미래를 상상할 수 없어, 끝내 자신에게 칼을 쑤셔 넣어야만 했던.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들을 들여다볼 때면, 내 안의 온갖 감정들이 소용돌이친다. 특히, <아몬드 꽃>에는 그 밝은 색감에도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것만 같다. 그렇게 빈센트의 영혼과 정신은 백여 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내게 온다. 그가 남긴 다양한 스케치들과 다소 낯선 <구리 꽃병에 담긴 프리틸라리>, <오렌지를 든 어린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외젠 들라크루아의 <피에타>와 렘브란트의 <리자로의 부활>까지. 흐르는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주되는 것들은 그의 작품만이 아니다. 그것을 보는 나 역시 변하고, 변하고, 또다시 변한다.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이 나를 향한 칼을 내려놓게 만든다.

 

내 안의 별을 향해 작은 소망을 쏘아올린다. 별이 빛나는 밤에 저를 데리러 와주세요. 그때까지 빛을 향해 걷고 또 걷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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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제공: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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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수업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안온북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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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냐르는 말한다. 여성들은 변성은 겪지 않는다고. 유년기의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그저 말을 하면 되고, 입을 벌리기만 하면 된다고. 작곡을 많이 한 여성이 드물었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빈약한 논거를 들이밀다니. 앞선 키냐르의 글에서 발견한 아름다운 문장들이 애석할 지경이다. "늙지 않는 강물이 농후한 빛에 잠겨 영원한 상처처럼 흐른다"는 그의 문장에 얼마나 감탄했는데. 


그의 주장으로 인해 오랜 시간 잊혀진 여성 작곡가들을 끄집어냈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연주하지 못했고,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일찍 결혼해야 했으며,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바느질이나 강요받았던 여성 작곡가들. 그녀들의 한탄이 여기까지 들리는 듯하다. 힐데가르드 폰 빙엔, 프란체스카 카치니, 루이스 화렌크, 클라라 슈만, 에이미 체니 비취, 레베카 클라크, 에밀리 메리 헌트, 제인 그리어, 미리암 매크리에게 묻고 싶다-그럴수만 있다면-. 그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현대과학에서 밝혀진 여성도 변성기를 겪는다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그의 주장에는 변성기로 목소리를 잃어가는 남성에 대한 지나친-정말이지 과할 정도로-애틋함이 묻어있다. 특히, 신체적 변화의 "허물벗기"에 있어 남성은 13세 혹은 14세 무렵의 '변성'인 반면, 여성은 45세~50세가 되서서야 '폐경'으로 인한 것이라는 주장은 쓴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정말 그럴까. 

  

키냐르는 남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목소리가 암울해진 자이며, 그래서 자신의 성대에서 사라진 가녀린 고음의 목소리를 찾아 죽을 때까지 헤매는 자라고. 그렇다면 여성은, 여성은 무엇을 찾아 헤매는 자인가. 


그간 남성으로 대표되었던 인간의 목소리가 그 자체로 울부짖음으로 시작되는 소나타라면, 여성의 목소리는, 여성의 울부짖음은 몸 안에 숨겨져 있어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리하여 오로지 자신 외에,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연주될 수 없는 무언가다. 내게 여성은 그 무언가가 과연 자신에게 무엇인지 평생에 걸쳐 찾아 헤매는 자이다.  


남성의 목소리가 시간 안에서 울린다면, 여성의 목소리는 또 다른 여성의 몸 안에서 울린다. 울리고 울리는 울음. 그 울음은 시간을 뛰어넘는다. 


이린아의 시구를 빌려,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밤에만 우물가를 찾는 여인은 짐승의 이빨 사이로 울어본 적이 있어

울음이란 짐승의 이빨 사이에 머리를 집어넣고 다물어지지 않도록 버티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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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온북스로부터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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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잃어버리길 바랍니다
유시은 지음 / 메이킹북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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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은님의 일기장에 쓰여진 글과 사진들을 보면서 어디 털어놓을 곳이 없었구나, 쓰지 않고서는, 그리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었겠구나,라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살기 위해 토해낸 것들, 토해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들. 한 편의 편지와 같은 글과 수많은 그림을 쓰고 그리며 버텨온 시은님을 떠올렸다.

 

굳지 않는 바다가 된 것 같다는 그의 말을 천천히 곱씹으며, 그가 그린 <엉킨 진물>을 다시 보았다. 책에 수록된 여러 그림들 중에서도 유달리 그 그림이 눈에 들어왔던 이유는 무엇일까. 굳었다가 흐르고, 흐르다가 다시 굳고, 그렇게 생긴 피딱지 아래의 노란 진물. 검게 착색되어가는 것들과 그럼에도 여전히 새하얀 것들의 엉킴. 


그 엉킴 속에서 잃어버릴 것은 잊어버리고, 찾아야 할 것들만 기억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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